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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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익숙함과 결별할 때 바로 보이는 진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기원? 대표작은 달랐다
 
세이초는 자신의 추리소설이 사회파라고 불리는 점에 대해서 “사회 구조를 테마로 삼아서 거기에서 비롯된 범죄 등을 써왔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면서, “사회소설을 쓰는 데 추리소설의 방법을 적용한 것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그리고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대담집 <발상의 원점>). 이 말에는 세이초의 추리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들어 있습니다. 즉 세이초가 우선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그 안에 처한 인간의 삶을 ‘테마’로 잡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추리소설이라는 ‘방법’을 쓰고, 마지막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리얼리티’를 부여합니다. - pp.239~240(역자의 말 中)
작가의 최고 작품은 꼭 연륜(연차)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님을 <점과 선>을 읽으며 또 한번 느꼈다. 물론 <점과 선>을 세이초의 최고 작품이라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1천여 편이 넘는 그의 작품에서 대표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점과 선>, 읽어보니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 알 것 같았다. <점과 선>은 1958년에 출간한 소설로 비교적 세이초의 초기작이다(세이초는 1950년 등단). “여행”이란 잡지에 1957년 2월부터 1958년 1월까지 연재했다가 단행본으로 낸 소설인데, 연재 당시에는 같은 시기에 함께 연재했던 <눈동자의 벽>이 훨씬 폭발적인 반응이었고 <점과 선>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식출간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누적판매 500만부를 돌파하며 대표작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또한 <점과 선>은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정과 통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소설의 한계를 세이초는 오히려 문학이 더욱 잘 현실을 반영하고 더 쉽게 대중과 소통하는 강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점과 선>은 당대를 향한 세이초의 비판의식은 무엇인지, 세이초식 사회파 추리가 무엇인지 살필 수 있는 좋은 견본이다.
 
 
완벽한 사건, 정말 빈틈은 없는가
 
가사이 해변의 동반 자살 사건은 탈도 없고 잡음 하나 없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 흘러갔다. (...) 이 사건에 끼어들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 p.51(본문 中)
미하라는 지쳤다. 그는 벽에 포위되어 있었다. 어느 쪽 벽도 깨지지 않았다. - p.197(본문 中)
해변에서 한 쌍의 남녀 시신이 발견된다. 남자는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성 과장 대리였고 여자는 요정 여종업원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전형적인 불륜지간의 동반자살로 판정하고 심드렁해한다. 유사 이래 이런 류의 동반자살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오토키(죽은 여자)가 낯선 남자와 기차를 타는 것을 본 목격자도 확보되었고 탑승기차, 투숙여관, 이동경로 등 상황 판단도 끝났다. 비리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한 실무책임자 사야마(죽은 남자)가 애인 오토키를 꼬드겨 함께 음독자살한 사건으로 결론내리고 별다른 추가수사 없이 덮으려 한다. 그러나 관할 형사 도리카이는 수상쩍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성 비리 사건을 수사하다 사야마의 자살 소식을 듣고 의혹을 품은 도쿄 경시청 미하라 경위가 합세해 진실을 찾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혼자만 밥을 먹은 영수증 등 이상한 사실들 몇 개를 발견하지만 사건의 곁가지에 불과하거나 심증만 있지 정확한 물증이 없어 둘은 답답해한다. 아무리 발로 뛰고 머리를 굴려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수사, 철옹성처럼 견고한 시나리오에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정말 숨겨진 비밀은 없는 걸까.
 
 
일상의 해체와 재구성, 훔쳐보고 상상하는 사람들
 
전국의 여러 지방에는 일제히 기차가 정차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인생에 따라 기차에 타거나 혹은 내린다.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정경을 상상한다. (...) 나는 지금 이 순간, 여러 고장에서 펼쳐지는 스쳐 지나가는 인생을 한없이 공상할 수 있다. 타인의 상상력이 만든 소설보다도 자신의 공상이 훨씬 흥미롭다. 꿈이 떠다니는, 고독한 즐거움이다. - pp.137~138(본문 中)
‘점과 선’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좌표였다. X축과 Y축이 교차된 평면 위에 점들의 궤적이 함수(관계)가 되고, 축이 추가되면 차원이 높아지고 축을 없애면 1차원이 되며, 그 모든 것의 시작이자 기본은 점과 선이다. 세이초도 비슷한 발상인데, 그가 말하는 ‘점과 선’의 1차적 의미는 기차이다. 점(길)과 선(역)으로 이루어진 기차노선표, 그 위의 여정과 사건을 ‘점과 선’이라 단순화하고 추상화시킨 개념으로 짧게 표현한다. 일상을 해체해 낯설게도 보고 상상도 하면서 재구성하는 것이 <점과 선>의 발상이자 감상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흥미로운 인물인 료코가 등장한다. 오토키가 일했던 요정의 단골 다쓰오의 아내로 폐결핵 때문에 병원과 요양을 전전하는 그녀는 소설보다 기차시간표와 노선표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점과 선, 숫자의 교차를 보며 가고 싶은 곳을 그려보고 기차 위의 인생들을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엄청난 여행을 했지만 어릴 적엔 가난으로 발이 묶였던 작가의 투영이기도 하고 지금 이 소설을 읽으며 골똘히 추리하는 독자의 투영이기도 하다.
   
 
왜 조직 비리사건의 희생자는 항상 과장 대리급일까
 
과장 대리라는 건 그야말로 실무의 프로. (...) 대신에 출세할 가능성은 없어. (...) 그런 사람들은 상관이 한번 잘해주면 감동하거든. 줄곧 포기하고 있던 출세에 희망이 보이니까, 상관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지. (...) 이번 비리 사건에서도 모든 선이 사야마 과장 대리에 집중돼 있어. (...) 과장 대리들 (...) 사명감에 쉽게 목숨을 버리지. 대형 비리사건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꼭 과장 대리급이거든. - pp.186~187(본문 中)
세이초의 소설은 명쾌하다. 콘셉트 하나, 주제 하나, 고발점 하나 등 단출하게 골격을 잡고 기지를 채워가는 식이다. <점과 선>에서 세이초가 주목한 것은 조직의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핵심인사가 아닌 과장 대리급에서 처벌하다 끝나는 불편한 현실이었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과장 대리’가 연차는 쌓여 있는데 과장으로 승진하긴 모한 직원들을 위해 만든 허울 좋은 직급으로 만들어놓는 조직이 많은데 <점과 선>에서의 과장 대리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 세이초 역시 그런 부정적 뉘앙스의 ‘과장 대리’를 말하고 있다.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진급의 희망에 몸을 내던지지만, 역시나 총알받이였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도리카이의 고군분투에 미하라가 합류하면서 <점과 선>은 동반자살에만 대한 집중에서 동반자살과 ○○성의 비리가 따로 또 같이 만났다 평행선을 그렸다 하며 이야기가 확장된다. 이러한 소설의 후반부 양상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휘말리는 개인의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세이초식 사회파 추리의 양상이자 결말이 가까워 옴을 알리는 신호다.
 
 
익숙함에 눈 멀 때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기차가 교차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필연이지만, 타고 있는 사람들이 공간적으로 교차하는 것은 우연이다. - p.138(본문 中)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점 (...) 저희는 잘못된 선을 그어서 둘을 묶은 것입니다. - p.222(본문 中)
<점과 선>의 트릭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이 소설의 사건 정답을 푸는 열쇠는 트릭에 집착하기보다 맹점에 눈을 뜨는 것이다. 앞서 ‘점과 선’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기차’를 상징화한 것이라 말하였다. 세이초는 왜 굳이 그런 발상을 했을까, 그저 멋들어진 책 제목을 짓기 위해? 익숙하고 전형적인 관념에 빠져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때 눈은 멀기 시작한다. 상식과 신념에 의문을 품을 때, 일상을 해체하고 낯설게 볼 때, 거짓말처럼 답답함이 사라지고 전말이 모두 보인다. 복선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사건의 조각을 엮을 필요도 없고, 한번만 생각을 틀면 끝난다. 그래서 어떤 이에겐 그냥 작가의 문장을 따라 끝까지 붙을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을 알고 보는 소설이기도 하다. 추리하는 재미는 별로 없는 소설,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장르적 트릭 기교의 훌륭함보다는 사소한 발상의 전환으로 장편을 이끌어가는 능력 때문이다.  1968년이 있다면 그 10년 전엔 '점과 선의 복합'이 있다. ‘점과 선’의 1차적 의미가 사건의 배경이 되는 기차라면 사건을 풀기 위해 인물과 단서를 나열하고 연결하는 소설 전체가 ‘점과 선’ 자체기도 하다.
  
 
우리식 <점과 선> 특별판
 
<점과 선>의 배경은 도쿄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홋카이도, 서쪽으로는 규슈지방에까지 이릅니다. (...) 점과 선에는 수많은 지명에다가 여러 철도 노선까지 등장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비딕 편집부에서 틀림없이 뭔가 해주실 테니까요. -p.241(역자의 말 中)
반백년 전 외국소설을 오늘의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영화나 드라마로는 알게 모르게 접했지만 정작 원작을 읽어본 적 없는 이들을 위해 세이초월드를 만드는 출판사는 매번 고심했다. <점과 선> 자체도 이미 특별하다. 작가가 소설 중간 중간 강조하고 싶은 구절에 계속 방점을 찍고 노선도와 플랫폼 배치, 시간표들을 삽입했다. 그런데 일본에선 세이초 탄생 100주년을 맞아 분게이슌주에서 새로 낸 <점과 선>이 등장한다. 컬러 삽화가 담은 특별판 개념의 책이었다. 고분샤의 <점과 선> 판권을 산 모비딕판 <점과 선>은 원래 <점과 선>과 그대로 방점과 그림을 옮겼지만 분게이슌주의 컬러삽화는 없다. 대신 27개의 흑백삽화를 새로 넣어 나름 우리식 <점과 선> 특별판 을 만들어냈다.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세이초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싶다면, 방점과 그림이 있는 '조금 특별한' 세이초 소설을 읽고 싶다면 <점과 선>을 읽어보라 추천한다. 한편 <점과 선>은 '점과 선2'로 불리는 <시간의 습속(1962)>이란 속편이 있다. ○○성 비리 사건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리카이와 미하라가 다시 합심해 새로운 사건을 해결한다고. 이 작품도 모비딕에서 한창 번역 중인데 <점과 선>만큼 재밌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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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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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동화를 찾아서

소담한 글이 품은 강한 힘과 울림

등단 이후 발표한 산문과 시를 추리고 한 편의 동화를 더한 故권정생의 산문집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에게 덴마크의 한 소녀가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동화 작가가 될 수 있겠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쇼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첫째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것, 둘째도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것, 셋째 역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질 것”  *본문에도 나오는 구절(p.200)*

 

 

 

어린 내게 동화는 귀한 것이었다. 도서관도 책대여점도 없었다. 부자든 가난하든 어미의 마음은 같아서 자식에게 책을 주려고 어머니는 부단히 발품을 팔았다. 남의 집 잔치에 요리를 해주고 품삯 대신 그 집 아이들의 책을 빌려오고, 이웃네 친구네 놀러갈 때 나를 데리고 가 책을 읽혔다. 나는 어머니랑 보물 찾는 날이 참 좋았는데 폐지 버린 더미에서 책을 주워와 깨끗이 닦는 걸 우린 그렇게 불렀다. 사정을 들은 친척들이 책을 물려주기도 했다. 속이 없어 집안일과 부업에 지친 어머니가 목이 쉬고 입이 부르트도록 밤마다 책을 읽어 달라했고 한권 두권 외우다보니 글씨를 알게 되었다. 까막눈이었을 때부터 책을 볼 수 있을 땐 무조건, 빨리, 많이 보는 게 습관이 된 탓에 유치원에 입학해선 그곳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아무 친구도 안 사귀다가 선생님의 요주의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동화를 읽으면서 글과 세상을 알았고 동화 삽화를 베끼며 미술을 익혔다. 7살쯤부터는 읽을 책이 없으면 동네 애들을 앉혀놓고 되도 않는 이야기를 지어내며 어떠냐고 묻고 다녔다. 나는 말을 안 들으면 발목이 잘리고, 아이들이 할머니를 삶아 죽이고, 못된 계모를 젓갈로 만드는 전래 동화들보다 고운 말로 지금 우리의 얘길 하는 창작동화들을 좋아했다. 이상교, 권정생, 이오덕 등의 동화를 읽으며 그들처럼 누군가를 위해 재미지고 예쁜 글을 쓰는 어른이 되길 꿈꿨다. 그런데 나를 키운 그 많던 동화들이, 꿈을 꾸며 부풀었던 마음이 지금은 어딜 갔을까. 휘발되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 별것 없는 잡문의 모음인데 <빌뱅이 언덕>은 끊임없이 기억을 두드리고 가슴을 울리며 나의 상실과 생채기를 일깨워주었다.

 

권정생의 동화와 소설 몇 권을 읽었지만 그의 생애를 관심 있게 찾아본 적은 없었다. 올해는 그의 귀천 5주기이다. 선생은 천상병 시인과 함께 귀천이란 말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베스트셀러 동화를 썼지만 한 번도 풍족한 적이 없었다. 마을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다가 30년 전에야 강아지 같은 빌배산의 강아지 꼬리 같은 빌뱅이 언덕 아래에 강아지 똥 같은 작은 제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유언은 인세를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는 것이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때를 놓친 치료로, 스무 살에 얻은 폐렴과 늑막염으로 망가진 몸은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취 없이 죽을 생각을 했던 젊은이는 세월이 지나 사람의 삶은 수많은 타인에게 신세를 지며 이루어짐을 깨닫지만 그 때의 마음을 모두 잊진 않았던 건지 끝내 가정을 이루지는 않았다.

 

머리말을 읽다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발상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여러 출판사가 함께 먹고 살아야 하며 당신의 전집이 나오는 것을 반대했다는 얘기였다. 선생의 뜻을 지키겠다는 재단(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엄밀히 말하면 그의 뜻이 아님에도 굳이 엮어낸 이 책은 어떨지 궁금해져 재빨리 본문으로 책장을 넘겼다. 생전 선생은 산문집을 낼 생각이 없었지만, 여러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묶어 남의 뜻으로 낸 산문집이 두번 있었고 모두 절판되었다. 세 번째 <빌뱅이 언덕>도 남의 뜻이다. 절판된 두 산문집을 추리고 1975년부터 2006년까지 잡지에 발표했으나 단행본화된 적 없는 글을 재단과 출판사가 새로 찾아 43편의 산문을 담았다. 또 단행본으로 내기엔 분량이 애매했던 시 7편과 동화 1편도 담아 한 권의 책을 꾸렸다. 그래도 채 담지 못하고 남긴 글은 다음을 기약하며.

 

산문은 총 3부로 나누어 1부엔 선생의 자전적 산문들을, 현재의 세태에 대한 성찰을 담은 산문들을 1990년대~2000년대의 산문은 2부에 1970년대~1980년대의 산문은 3부에 담았다. 시와 동화는 부록으로 처리했고, 머리말은 재단 사무처장이자 시인인 안상학이, 책 끝의 발문은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가 맡았다. 또렷한 기억의 편린이지만 곳곳의 구멍으로 부정확한 사실들은(ex.연도) 각주를 통해 차이를 밝히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겼다. 지배국에 사는 식민지인이 받는 처우와 그들의 생활, 가족을 갈라놓고 인도를 잃게 하고 몹쓸 병을 퍼뜨리는 전쟁과 가난, 어제처럼 추억이 생생해 더욱 그리운 친구와 사랑했던 이, 어여뻐 하는 아이들과의 웃고 우는 일, 그리 순한 성품에도 역성을 들며 비판하는 것들, 쌓이는 인생의 나날만큼 깊어지고 늘어지는 수많은 상념들. 두런두런 선생을 닮은 글에서 선생의 삶과 철학이, 그리고 우리들이 살던 수십 년이 뚝뚝 묻어난다.

 

슬프지만 절망이 없는 이야기, 우리가 겪은 고난이기에 세대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누구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이 인간답고 아이가 아이답길 바라며 쓴 이야기. <빌뱅이 언덕>을 읽으며 나름대로 선생의 동화론을 정리해보면서 무척 공감하였다. 어린 날 이런 동화를 읽다가 할매는, 아저씨는 이랬어하고 물으면 무뚝뚝하고 말주변이 없던 어른들마저 술술 입을 열며 꼬마와 수십 년을 허는 친구가 되었다.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이 안주거리 추억이 되고 더 큰 상처도 이겨낼 수 있음은 물론 한마저 사라지는 것에서 나이 듦의 장점, 슬프지 않은 슬픔을 알았다. 아무리 남녀노소 즐길 수 있다 해도 선생의 동화는 역시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빌뱅이 언덕>은 아이를 지나 시간의 켜들을 맞으며 다 커버린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아이인 적이 있었기에, 귀천한 선생이 산 궤적을 밟으며 매일 늙어가고 있기에 더욱 파고들고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방끈이 긴 자는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이성과 논리에 입각해 사리를 따진다. 이런 이들에게 선생이 전쟁이나 통일 등 시사적인 주제에 대해 쓴 글은 비판할 구석이 여럿 보인다. 그러나 경험과 감정에 입각한 이 주장들을 수준 낮고 그르다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는 만큼 눈이 머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한편 새삼 신선했던 점은 20대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래 평생 교회 일을 했던 선생이 경향이나 생활성서 같은 천주교 잡지에 글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나 담임목사부터 개신교 전체까지 조목조목 통렬히 꾸짖는 것이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 동안 책으로 안 나온 것이 원통할 정도로 빼어난 문학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교가 있는 문장도 아니다. 권정생이란 이름을 지우고 보면 옆집 할아버지가 쓴 것도 같다. 그만큼 평범하고 수수하다. 하지만 염무웅의 표현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내는 가장 맑은 목소리’가 무엇인지 통감하고 읽는 이의 가슴을 알캉이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우리 아동출판의 황금기는 1990년대였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표현은 더욱 자유로워졌고 끝없는 호황으로 더욱 여유로워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더 많고 질 좋은 아동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만큼 많이 사고 많이 읽었다. 그 혜택을 받은 90년대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거짓말처럼 나라가 파산한다.  돈의 무서움을 온몸에 아로새긴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동물처럼 반응하고 수많은 가치를 버리며 살아남기 위해 처절히 경쟁했지만 돌아온 건 88세대니, 3포세대니 하는 낙인이었다. 재산과 경력이 보잘것없고 힘든 것은 20대에 당연한 것인데, 절망에 휘감기며 자라다 벌써 지친 건지 패기도 적고 정말 3포의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누가 조금만 위로해줘도 동요한다. 어떤 어른보다 어린 시절 좋은 책을 읽었지만 자라면서 독서가 사치가 되어버린 90년대의 아이들, 하지만 이전 세대가 그랬듯 그들도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동화를 다시 찾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멈출 수 없고 희망을 믿기에. 

 

http://der_insel.blog.me/120170736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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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복합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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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복합] 스토리텔러의 일덕

 

 

전설 찾아 떠난 두메 취재에서 만난 살인사건, 우연이 아닌 철저한 계획이다?

누가, 무엇을 위해 D의 복합으로 우릴 초대하고 조종하는 걸까 .

“선생님은 알고 계세요.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거길 가실 리 없어요.”

 

 

무명작가인 이세는 월간지 「구사마쿠라」의 편집 차장인 하마나카의 원고 의뢰로 '전설을 찾아가는 벽지 여행'이라는 기행 에세이를 연재하기로 한다. 여행지를 정하고 하나마카와 함께 취재를 떠나는 이세, 첫 번째 목적지인 기쓰 온천에서 둘은 숙소 근처 산에서 사체 수색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갑작스런 투고에 발생 1년 만에 수사가 재개된 살인사건은 이상하게 이세와 하마나카의 여정마다 계속 얽힌다. 의도치 않은 이 기묘한 경험을 이세는 흥밋거리 삼아 연재물에 쓰고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다. 이세는 욕심을 부려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보려 하고, 때마침 열혈 독자를 자청하는 사카구치와 니노미야의 편지를 받는다. 다른 독자들과 달리 이세의 연재가 편집부의 기획인지 이세의 착상인지를 궁금해 하는 둘, 그런데 이세를 만나 이상한 얘기를 늘어놓던 사카구치는 살해당하고 니노미야는 이세와의 만남 후 실종된다. 진실을 알려할수록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다.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이세는 안전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추리와 여행을 결합한 '여행 미스터리(여정 미스터리, 온축 미스터리)' 장르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유행한다. 그리고 장르적 기원을 1968년 작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D의 복합>으로 삼는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세이초 선집'을 표방하며 두 출판사가 합심해 내놓은 『세이초 월드』의 첫 작품이 왜 <D의 복합>인지 조금 의아하다. <D의 복합>은 일본 고대사와 민속학적 소재들을 엮으며 풀어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본엔 세이초 외에도 류노스케 등 자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깊이 파고든 유명 소설가들이 많다. 문제는 그런 배경지식이 없는 외국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작품의 깊이와 재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D의 복합> 초역본을 두고 어려워서 쉽게 작품에 빠져들지 못한다거나 읽어보려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반응이 꽤 있다. 데뷔작이나 더 유명한 작품을 제치고 굳이 <D의 복합>을 선정한 것은 역사전문출판사의 정체성 표현의 의지일까(<D의 복합>을 낸 모비딕은 역사비평사에서 처음 만든 문학 임프린트다), 추리·역사·시사를 넘나드는 세이초의 문학세계 전반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D의 복합>이란 판단에서였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D의 복합>이 매우 일본 독자 맞춤형 소설인 것은 맞지만. 배경지식이 없다고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다. 단지 소설의 양념에 불과할 뿐이고 태생(대중소설)을 뛰어넘을 만큼 심오하지 않다. 박학하면 더 좋겠지만, 책 서두에 실은 지도를 참고하며 소설에서 작가가 서술하는 만큼만 읽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집중해야할 것은 작품의 본질인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자신이 맞닥뜨린 사건이 단순히 재수 없이 겪은 우연이 아닌 것을 깨닫는 순간 단순한 호기심은 집요한 갈망이 되고 이세는 사설탐정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점에서 세이초의 단편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가 생각난다. 하지만 그 단편에 비하면 <D의 복합>의 이세의 동물적 감각과 행동력은 약하다. 이세와 같은 걸음을 걷는 독자, 사카구치가 알아챈 이세의 여정 속 35 숫자의 연속은 살인사건을 푸는 실마리고 온갖 방법의 중첩들은 게임의 끝을 가리킨다.

 

북위 35도, 동경 135도를 영어로 하면 North Latitude 35 degrees, East Longitude 135 degrees다. 네 개의 D가 중복되어 있으니 ‘D의 복합’이다. 게다가 위도와 경도는 지구를 가로와 세로, 각각 둘로 나누고 있으니까 그 모양으로 봐도 D형태의 조합이 된다. - p.259

 

440여 쪽의 <D의 복합>은 D의 복합의 의미를 밝히는 259쪽을 기점으로 소설이 갈린다. 장르물의 공식대로, 온갖 정보들의 나열과 지지부진함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는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선 앞서 던진 단서와 복선들이 짜 맞춰지며 속사포처럼 전개된다. 누군가가 철저하게 만든 시나리오에 맞춰 전개되는 사건들, 이세를 비롯한 초대자들, 이 게임의 호스트는 누구며 이유는 무엇일까. '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설 내내 신경 쓰이는 사람, 지금 당신이 혹시 하는 그자가 '범인'이다. 끊김이나 틈 없이 서두부터 결말까지 엮는 모양새, 치밀한 계산과 기획으로 썼겠지 싶은 <D의 복합>이 계속 퇴고해서 전체 작품으로 출판한 게 아니라 2년 반 동안 잡지에 연재했던 소설을 묶은 것이란 걸 알고 놀랐다. 물론 출판과정에서 전체 교열을 했겠지만, 전체그림을 모두 그려놓고 쓰지 않는다면 구현하기 힘든 내러티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격적으로 놀라운 작품까진 아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보기엔 결말 처리나 트릭이 눈에 익기 때문이다.

 

황순원은 등단 후 문학성을 지키기 위해 잡문이나 연재소설을 쓰지 않았다. 코난 도일은 억지로 죽은 주인공을 살려내야 했고 찰스 디킨스가 혹평과 평가절하에 시달렸던 것은 그들이 작품을 주로 신문이나 잡지 연재로 발표하는 대중소설가여서인 이유도 있다. 대중이나 연재란 단어는 '쉬운', '상업', '소모성', '돈 때문에 하는' 따위의 어감이 있다. 실제로 수많은 대중소설·연재소설들이 순수소설보다 완성도와 문학성이 낮아 선입관을 강화시킨다. 소설은 대개 학술·교양서보다 읽기 쉽고 그래서 많이 읽는다. 하지만 술술 읽히고 내용이 그럴듯한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수없이 취재하고 경험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고생한 만큼 티가 나지 않고 다작 욕심에 암묵지 쌓기를 소홀하고픈 유혹에 빠지기 쉽다. 비단 소설 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모든 스토리텔링이 마찬가지다. <D의 복합>을 읽으면서, 세이초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고 발로 뛰었을까 눈에 선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애쓴 만큼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이 쓸 이야기를 위해 쉼 없는 것, 재미도 재미였지만 <D의 복합>을 통해 스토리텔러의 일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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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루이비통 - 마케터도 모르는 한국인의 소비심리
황상민 지음 / 들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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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루이비통]

마케터가 모르는 마케팅, 소비자가 모르는 소비심리

‘소비자 심리학을 아시나요? 한국인을 위한 소비자 심리학 교양서’

 

 

 

http://der_insel.blog.me/120167727333

 

 

카프카는 종일 부족한 것을 생각하고 원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광고를 보지 않았다. 프롬은 인간이 행복한 존재가 되는 데에 소유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사회는 소비를 미덕으로 여긴다. 우리는 대공황을 통해 공급이 스스로의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의 법칙은 틀렸음을 깨달았다. 생산을 계속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수요를 만들고 다양화해야 한다. 1987년 크루거가 데카르트의 명제를 패러디해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10년 후엔 보스하르트가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쓴다)는 슬로건이 적힌 포토몽타주를 제작했을 때 대중들은 신선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소비의 대상은 유무형의 재화뿐만이 아니다. 실존과 인간본위의 삶을 위해 멀리 했던 가치였던 소비가 이제는 정체성을 나타내고 실존의 중심가치가 되어버렸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소비자이자 마케터이다. 소비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스스로를 상품화하여 누구 혹은 어디엔가 소비되길 바란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비자인 동시에 마케터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고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는 소비자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위해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무엇을 남에게 제공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마케터이기도 하다. 자신의 재능이든 노동력이든 무엇인가를 남에게 팔아야 하는 탓이다(우리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소비행위’라 할 수 있다(p.31).

 

 

 

 

황상민 교수의 TV 출연이 특정 분야가 아닌 전천후임을 깨닫고 나서 그의 전공이 무척 궁금해졌다. 처음 그를 TV에서 봤을 땐 아동심리학 교수인가 생각했고 그 다음엔 무난하게(?) 사회심리학인가 싶었다. 그리고 황 교수가 쓴 저서들을 보게 되었고,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정확한 전공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에 와서인데, 알고 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모든 활동이 전공에 기반을 둔 것임을, 흥행을 아주 잘 아는 분임을 깨달았다. 소비자를 연구하는 사람은 전략은 달라도 원하면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시대의 멘토가 될 수 있다. 황상민 교수는 그를 반증하는 대표적인 우리 사회의 ‘유명 인사’다. 그는 10여년 이상 강단에서 소비자 심리학 강의를 했다고 하지만 원래 그의 전공은 발달심리학 혹은 인간발달학이다. 인간의 생애주기 및 발달단계 전체를 연구하거나 특정 단계(ex.아동, 노인)의 인간 행태 및 심리를 연구하는 분야다보니 자연스럽게 소비 패턴이나 연령별 소비자 특성 연구와도 연결이 되고 황 교수 외에도 이 전공을 베이스로 한 소비자 연구자들이 꽤 많다.

 

 

 

황상민 교수가 이 책을 쓴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교과서는 모르는 한국 소비자 : 미국 소비자 이론의 한계와 우리식 소비자 연구의 필요성

2. 마케터가 모르는 마케팅: 경영학 중심의 마케팅 기법의 한계와 소비자 심리학 소개

 

 

 

소비자를 연구하는 학문으로는 경영학의 마케팅 분과, 심리학의 산업심리 분과, 경제학의 소비자경제 분과, 소비자와 소비행위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는 소비자학 등이 있다. 그 외 규제행정론의 소비자보호, 광고학의 일부, 소비철학, 관련법 등 전공 단위라기보다 과목단위로 공부하는 분야도 있고 앞서 말한 인간발달학이나 문화인류학·사회학 같이 기본 바탕이 되는 학문도 있다. 그래서 학부 때 복수전공이나 타전공수강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분위기다. 그러나 기업 마케팅부서는 진입장벽도 낮은데다 고용도 불안정하고(인사 회전이 빠르고), 기업의 중심이나 사원들의 최종 비전인 경우가 별로 없다. 주요 경영학과 학생들이 고시나 CPA에 주로 매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나 공격적인 마케팅 욕구가 있어도 예산 제약이나 실패시 인사 공포 때문에 몸을 사리고, 무수히 쏟아지는 마케팅 서적 덕분에 누구나 어느 정도의 마케팅 지식은 다 가지고 있다. 경영학과 없는 대학을 찾긴 힘들고 시스템도 무난하나 소비자심리학과 소비자학은 좋은 학교가 손을 꼽는다.

 

 

 

소비자의 심리를 알고 그들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다양한 소비행동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그 이유나 동기, 내면에 가려진 심리적 근거들을 찾는 일이다(p.262). 소비현상은 우리 각자가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행동을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낸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사람 수만큼 다양한 행동이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시장에 접근하는 마케터들의 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소비자의 유형에 따라, 소비자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서. 마케팅에서의 ‘고정관념’은 ‘고장 난’ 마케팅만 양산할 뿐이다(p.280).

 

 

 

사정이 이렇다보니 인사 리스크를 줄이려는 채용자 입장에선 전공자는 경영학과 위주로 뽑고 경영학 중심의 마케팅 전략, 누구나 다 아는 기법을 쓴다. <대통령과 루이비통>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누구를 위한 마케팅이고, 제대로 소비자를 파악하고 있는지. 미국의 마케팅 기법을 그대로 소개하는 교양서와 교과서만으론 한국 소비자를 분석할 수 없으며, 경영학만이 소비자 연구와 마케팅 분야의 전부가 아니란 것이 황상민 교수의 주장이다. 사회조사방법론에 기초한 기본적이고 기계적인 시장조사기법은 담당자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핵심적인 결과물은 도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소비자 연구기법은 계속 진화하고 학자들은 보다 효과적이고 현실 적용 가능한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애쓴다. <대통령과 루이비통>은 무조건적으로 경영학과 다른 소비자 연구 관련 학문을 대립시키고 후자의 우수성을 부각시키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 이론·기법과 최신 이론·기법의 대결, 흔히 이론(학문)이 실제(기업)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대한 반론에 가까운 책이다.

 

 

 

<목차>

1부. 시장으로 나온 심리학

2부. 특명 사례 탐구

3부. 대통령과 루이비통

 

 

 

<대통령과 루이비통>의 부제 ‘마케터도 모르는 한국인의 소비심리’를 보면 <한국인의 심리코드>, <짝 사랑>과 같은 저자의 이전 저작들처럼 ‘한국인’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한국 소비자 분석에 주력한 책일 것이란 예상을 한다. 그러나 의외로 이 책은 잘 만들어진 한국형 소비자 심리학 개설서 같은 느낌이 강하다. 전공생들에겐 개론 수업 리더 정도로 제시할만하고,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고3 수험생이나 대학 신입생들에겐 괜찮은 전공탐색서이다. 한국 소비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는 것은 3부에 와서이다. 1부에선 소비자 심리학에 대한 소개와 경영학과의 차이 비교, 소비자 연구의 역사와 중요 마케팅 사례들을 다룬다. 독자에 따라 이 부분도 한국 소비자를 분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2부는 프로야구팀과 휴대전화통신요금을 대상으로 소비자 심리학 관점의 분석 예시다. 꼼꼼히 읽으면 관련 전공수업 아무 시험이나 봐도 답안지에 뭔가 쓸 수 있을 정도로(C+이상의 학점 방어까지 보장하진 못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꽤 많은 책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바를 ‘항상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p.124).

하워드 모스코비츠의 실험 (...) 보편성과 일반성의 법칙을 찾고 여기에 목매달던 사람들이 비로소 차별성과 개별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p.137).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 비합리적인 성향의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삶의 결과가 바로 ‘다양성’이다(p.140).

좋은 질문이 정확한 답을 유도한다(p.144)

 

 

 

소비자 연구에서 완벽하고 이상적인 한 가지 답은 없다. 보편성이 아닌 다양성, 수동적인 고객이 아닌 능동적인 소비자로 인식, 인간의 비합리성을 인정할 때 소비자가 보이고 마케팅이 성공한다. 가장 인기 많은 제품이 아니라 수요층이 있는데 없는 제품을 알아내는 것이 기업경쟁력과 시장창출로 이어지는 비결이다. 분석 단위는 더욱 세분화되어야 하고 보다 대상의 심층(내면)에 접근해야 한다. 황상민 교수는 이를 가리켜 ‘마음을 MRI’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심리학에만 있는 기법이 아니라 경영학의 ZMET 등 다른 소비자 연구 분야에서도 고안·사용하고 있고 종류도 다양하다. 그만큼 마케팅에 있어 조정자·조사자의 역량이 점점 중요해진다. 당장 이 책의 사례들을 봐도 느낄 수 있다. 황상민 교수는 미국의 VALS 개념과 치환할만한 한국소비자 세분화 일반형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들을 내놓는다. 그런데 읽고 있노라면 각 유형들이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아 일반인들이 보기엔 자기 유형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헷갈린다.

 

 

이제 막연히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한국에서도 그대로 일어날 것처럼 이야기하는 마케팅이나 소비심리에 대한 책은 더는 필요 없다. (...)

우리 삶의 방식과 삶의 가치, 그리고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에 대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소비심리에 대한 정확한 탐색일 것이다(p.368).

  

 

이 책에 대한 출판사 소개글과 목차, 독자 서평들을 보고 소비자 심리학이란 학문이 궁금하고 소비자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이 궁금해진다면 더없이 취향에 잘 맞고 즐거울 책일 확률이 높다. 한국인의 명품소비 등 이 책에서 황 교수가 내린 진단은 정답이 아닌 가능성이고 예시다. 또 현재에 있어선 타당한 분석이지만 과거에 그러지 않았듯 미래에 달라질 수 있는 현황이다. <대통령과 루이비통>은 쉬운 설명과 다양한 총천연색 사진 자료와 도표로, 소비자 심리학과 유용한 시장 조사 및 분석 기법에 대해 친절하게 얘기하는 책이지만 안내서이다. 이 정보들을 참고하고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에 흥미가 생긴다면 내용 요약본을 찾으려하지 말고 목차 정도만 훑어보고 직접 책을 읽으며 배우고 생각하길 권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소비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능동성에 대해 돌아보고 견주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소비 가치에 매몰된 서글픈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나의 의지로 소비하는 것이고 그래서 행복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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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완성한 여자 메리 퀀트
메리 퀀트 지음, 노지양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메리 퀀트] 영국과 여성의 갈비뼈 시대를 연 데이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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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그리던 패션소녀, 디자이너가 되다

모든 여자들은 패션소녀였다. 선천적으로 남자에 비해 월등한 눈썰미를 가진 여자들에게 패션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러운 탐구주제가 된다. 헤어스타일과 손발톱, 액세서리, 옷과 화장 그리고 신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소한 변화들을 매의 눈으로 알아챈다. 그래서 그걸 못 알아차리는 남자들에게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마귀할멈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반대로 여자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꾸민 적 없다 내숭을 부렸다가 웃긴다는 소리를 듣는다. 똑같이 드라마를 봤는데 여자는 줄거리 및 명대사 파악은 물론 그 날 방송 몇분 몇초대에 주인공 책상 위에 있던 시계까지 기억하고 검색을 해대니, 오늘날 마케터들은 PPL을 포기할 수가 없다. 성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요즘이지만 타고난 특질의 우위가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 치고 어릴 적 스케치북 가득 여자들을 그리거나 (종이)인형 놀이를 하며 코디 연습을 하거나 새로운 룩을 제시하지 않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학예회나 수련회에서 준비한 게 없거나 마땅히 떠오르지 않을 땐 그렇게 패션쇼를 해댔다. 메리 퀀트도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패션소녀에 그치지 않고 디자이너가 된다.

 

패션과 여성해방

블루머란 옷이 있다. 길이가 짧고 통이 큰 바지의 끝에 고무줄을 넣어 푼푼하게 입는 옷으로 지금은 속옷이나 속바지, 잠옷으로 입지만,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을 땐 최초의 여성용 (겉)반바지로 고안한 옷이었다. 이 옷을 만들고 입길 장려한 아멜리아 젠크스 블루머는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불린다. 진정한 양성평등이란 무엇일까. 모든 일을 남녀가 동등하게 하는 것? 성적 차이를 인정하고 각 성의 우위적 특질을 중심으로 철저히 성역할을 나누되 동등한 가치로 평가받는 것? 20세기의 양성평등은 전자의 관점에서 외쳐졌다. 여성이 겉옷으로 바지를 입는 것은 남성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전거나 말을 탈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의 의복에 실용성이 더해지는 것은 ‘여성의 인간화’의 출발이었다. 그래서 20세기의 여성 의복혁명은 여성해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루머 이후 니트보커스 등 남성의 바지들을 여성용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하의는 점점 짧아졌다. 20세기 초반 코코 샤넬은 여성이 바지를 입어도 기품이 있고 여성성이 반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메리 퀀트는 짧은 하의의 종결점을 찍으며 실용적인 여성의복의 섹슈얼리티를 극대화시킨다.

 

영국과 여성의 시대가 열린 1960년대

해가 지지 않던 나라 영국이었지만 패션, 문학 등 문화에 있어선 계속 프랑스에 뒤져 있고 베끼기 급급했다. 게다가 양차대전 이후 헤게모니를 쥐게 된 미국이 비약적 문화적 성장을 이루니 자존심은 더욱 상했다. ‘영국적’인 것에 대한 오랜 갈증은 1960년대 비틀즈를 비롯해 영국의 문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대전환점을 맡는다. 거물 디자이너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여전히 패션은 가정에서 부녀자들이 가족들의 것을 만들고 부띠끄에서 부유층의 주문을 받아 맞춤 제작하는 영역이었다. 최초로 산업혁명을 하며 근대산업사회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은 패션도 산업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중심엔 메리 퀀트가 있었다. 메리 퀀트처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아 정신적 피폐함이 없었던 새 세대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문화 트렌드를 이끌었다. 성경에서 최초의 여성인 이브는 남성의 갈비뼈로 만든다. <메리 퀀트>에서 메리 퀀트는 1960년대가 갈비뼈(종속적 존재)에 불과했던 여성이 부각되는 시대라 표현한다. 메리 퀀트는 여성뿐만 아니라 조국 영국의 갈비뼈 시대를 열었다. 1960년대 이후 런던 역시 주요 패션 메카가 된다.

 

미니스커트와 이념 없는 혁명

메리 퀀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델 트위기다. 비달사순의 보브컷, 빳빳한 속눈썹, 20대 초반 느낌의 발랄함과 가는 체구, 미니스커트, 다양한 스타킹 패션. 1960년대 패션 아이콘이었던 트위기는 실제로 메리 퀀트의 모델이기도 했고, 앞서 언급한 그녀의 전성기 때를 상징하는 지배적 이미지들이 메리 퀀트가 제시했던 룩이었다. 특히 메리 퀀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니스커트다. 흔히 그녀를 미니스커트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억울한 디자이너들이 있다. 엄밀히 따지면 앙드레 쿠레주가 최초이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스커트는 1960년대 프랑스와 영국에서 동시에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메리 퀀트>에서도 관련 얘기가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미니 스커트하면 대개 메리 퀀트만 떠올리는 것은 힙라인에 딱 붙고 파격적으로 짧은 오늘날의 미니스커트를 제시한 사람이 그녀여서일 것이다. 메리 퀀트는 미니스커트와 함께 핫팬츠도 제시했는데 둘 다 여성의복에 있어 혁명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재밌게도 메리 퀀트의 혁명엔 페미니즘이 없다. 그저 그녀 평생의 고민인 ‘어떻게 하면 여성이 더욱 예뻐 보일까’에서 나온 아이디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낯선 데이지 그녀

하이패션(디자이너패션)에 합성섬유를 마구 섞고 캐주얼스러운 옷을 많이 만드는 메리 퀀트는 당대 패션계의 이단아였다. 그러나 화려한 이력의 이 패션 거물이 우리에겐 낯설다. 국내에 진출하지 않은 브랜드라 매장도 없고, 전공자들도 수업 시간에 많이 배우는 디자이너가 아니다보니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꼽는 경우도 적다. 확인차 집에 있는 패션책과 전공책들을 찾아봤는데 기억이 맞았다. 단 몇 줄로 스쳐 배우고 넘어갔었다. 2006년 국내 화장품브랜드인 미샤의 BI 카피 사건 때문에 메리 퀀트의 데이지 마크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본 화장품브랜드로만 아는 사람도 있다(메리 퀀트는 후에 화장품 사업에도 손을 대는데 현재는 일본 기업에 경영권을 전부 넘겼다). 아무래도 메리 퀀트의 패션 스타일이 동양에선 우리나라보다 일본 취향(실제로 메리 퀀트의 옷과 화장품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였고 그녀 역시 일본을 주요 고객으로 생각했다)이기 때문에 국내엔 런칭이나 직접 진출이 없는 게 이해는 되지만 명성에 비해 너무 알려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메리 퀀트> 출간이 반갑고, 이번 기회로 메리 퀀트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할머니 일기장에서 찾는 보석 같은 영감과 자극

<메리 퀀트>는 올해 출간된 동명의 자서전을 번역한 책으로 메리 퀀트가 직접 쓴 책이다. 할머니 일기장처럼 주섬주섬 추억 보따리 꺼내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래서 사진 자료가 대단히 적다. 중간 중간 메리퀀트의 사진은 있지만 본문 속에서 얘기하는 상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으니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개성이니. 올해 메리 퀀트는 79세, 그래서인지 회고하는 과거들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지도 않고 부정적일 수 있는 것도 긍정적으로 승화된다. 예를 들면 바람둥이라던 남편에 대해선 소제목과 달리 본문엔 그런 면들이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동반자로 표현되는 부분이 훨씬 많다. <메리 퀀트>는 학생, 디자이너, 엄마, 아내 등 모습과 역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면모들이 물씬 묻어나는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직접적이고 일목요연한 브랜드 소개와 비즈니스나 디자인 팁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영감과 자극을 받은 책이었다.  노 디자이너가 현재 입거나 입으려는 옷이 지금 20대들보다 훨씬 혁신적이고 감각 있어 존경스럽다. 특히 그녀 책 전체가 보여 준, 어떤 거창한 기조 없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가슴에 깊이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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