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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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게 약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죽음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두려운 세계이지만 그러하기에 삶을 지탱해주는, 우리가 살아가도록 해주는 그리고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베르베르의 이 가상현실을 통해 느꼈다. 이 책을 통해 소개되는 고대 신화, 전설을 보고 있으면 과연 현대인들이 이룩한 이 과학문명을 '진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고대인들은 기계와 기술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지닌 '내적성찰'을 통하여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의 실체를 꼭 밝혀내야지만이 죽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통해서 본 인간은 진실의 엄청난 위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얼마나 피곤할까.

웰즈, 쥘 베른, 필립 딕 같은 작가들을 언급했으니 올더스 헉슬리도 읽었을 게 분명한 베르베르의 글에서 <멋진 신세계>의 냄새가 난다. 솔직히 나는 과학적 문명(그것의 진보를 찬미하든 경고를 내포하든)을 다룬 책들이 싫다. <멋진 신세계>를 중반까지 읽고서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어서 덮어버렸다. 베르베르의 책은 물론 많은 지식을 주고, 흥미롭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책이라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그가 드러내주는 현실이, 그가 제시하는 미래가 유혈이 낭자한 공포영화보다도 나를 두렵게 만들어서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두려움 이상의 혐오감이다. 2000년에 이 책을 읽으려다 실패하고 얼마전 베르베르가 내한한 것을 기념으로 다시 한번 시도를 결심, 고른 것이 이 책이다.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 책이지만 영계에 대한 그토록 세부적인 묘사를 이루어낼 수 있는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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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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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만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 <데미안> 서문 中에서-

헤세의 이 서문을 읽고 있으면 초라해 보이는 나 자신이 문득 뿌듯해진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는 헤세의 위안이다. 집단속에서 뭉뚱그려져 ’나, 너, 누구’가 아닌 이내 ’사람들’ 속에 묶여버리는 현대인. 나는 사실 <데미안>의 내용보다는 서문이 더 좋다. 위에 인용한 단락뿐만 아니라 이 서문은 어느 한 구절도 놓치기 아까울 만큼 아름답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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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예문 / 199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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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확실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입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진정한 평등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인간해방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 책을 읽고 내 자신이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살아가는 여성임에 자랑스러움과 함께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면이 풍족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보듬어안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참으로 섬세한 여성입니다. 동시에 씩씩한 여성이기도 하구요. 이 책을 읽고 난 후 계속 '엄마만의 방'이라는 단어가 머리속에 맴돌았습니다. 우리들의 엄마들에겐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아빠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지만, 그 공간의 부재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방이 가지는 의미는 독립되고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자아실현의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여성으로써, 스스로도 사회속의 많은 편견과 금기속에 길들여져 있던 사고방식을 바꿔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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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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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년을 함께 살았던 언니가 곧 출가외인이 됩니다.유학비자 문제로 며칠전 식도 올리기 전에 혼인신고를 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벌써 조씨집안 사람은 아니지요. 어제 책꽂이가 있는 방엘 가봤더니 얼마전 도서배열을 바꿔놓은 책꽂이가 헝클어져 있고, 박스가 하나 놓여있더군요. 시집간다더니 자기가 산 책은 다 가져갈 모양입니다.

우리집은 속옷에는 이름 안써놔도 책에는 누가, 언제, 어디서 샀는지 다 적혀있거든요.아싸 잘됐다, 방이 너무 작아서 책꽂이를 더 놓을 순 없고 보기 싫은 책들 처분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내가 보기 싫은 책들의 대부분은 언니가 산 책들이거든요.어허.. 근데 이거 문제가 생겼습니다.가끔 사이좋게도 1권은 언니가, 2권은 제가 산 책들이 있지 뭡니까. 거 뭐 정떨어지게 반 딱 갈라 가질 수도 없고, 지금 협상중인데 아무래도 상황이 저에게 유리할 것 같습니다.

작년까지만해도 별 문제없던 책들이 생이별을 해야할 판에 놓이고 보니 얼마전 동생이 빌려온 책이 한 권 생각나는군요. 라틴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원제 <EX Libris>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번역서 제목은 아주 그럴듯합니다. 서재 결혼시키기.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취향의 두 사람이 만나고보니 서로 소유하고 있는 책들의 종류도 다양하고, 책을 배열하는 방법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려 합니다.(저만해도 제가 좋아하는 책들은 더 좋은 책꽂이에, 언니가 산 책들은 구석탱이에 처박아 놓습니다.) 결국 둘은 합의를 하게되는데요. 그 과정이 아주 재밌습니다.

저처럼 책이 닳을까봐 급기야는 흰 장갑이라도 끼고 책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궁정풍 연애가, 제 동생처럼 책을 이리굴리고 저리굴리고 다 읽고나면 결국엔 한장 한장 뜯어 먹기까지 하는 사람을 육체파 연애가라고 한답니다. 궁정풍 연애가들은 사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보는 걸 좋아합니다.가끔은 들고 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구요. 맨손의 허전함을 매우거나, 지적으로 보이고 싶을 때 소품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책을 가까이하고, 애착을 가지신 분이라면 많이 공감하실거예요.저는 내일도 언니와 협상을 할겁니다.서재랄것도 없는 세 개의 책꽂이를 이혼시킬 순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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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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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권이 이렇게 사람 진을 빼 놓다니. 책에 나오는 체스의 행보를 놓치지 않고 완벽히 이해하고자 체스판을 옆에 놓고, 책에 나온 체스의 행보를 복사해서 차례대로 배열했다. 체스는 수학의 정수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역시 나로서는 다른 사람보다 두배의 시간이 걸렸다.이 책을 읽기전에 갖추어야 할 준비사항은 체스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것이라도 익혀두는 것이다. 내 동생은 체스를 어떻게 두는지도 모르면서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고 하는데 그거 다 뻥인거 같다.

책이 쓰여진지 12년후에야 읽고, 재밌네 뭐네 얘기하는게 뒷북치는 거 같아 씁슬하지만, <장미의 이름>을 재밌게 읽은 사람이라면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사실상 책을 권하면서 내용을 알려주는 것 만큼 김빠지게 만드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텔미섬딩> 조조를 보고 나오면서 다음회를 보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범인은 심은한데~'하고 일러주는 것과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내 친구는 그림 감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괜한 시간 낭비라 생각하는 것이다. 난 항상 그에 항변할 만한 멋진 대답을 찾곤 했는데, 그때마다 실패했다. 세상에는 '말'이 아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수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거장의 그림이건, 어린 아이의 낙서건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에게 말을 거는 또다른 언어이다. 거기서 어떤 메세지를 보건, 한 상황의 함축적 표현법을 보건,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처럼 다소 강박적이고 과도한 집착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예술이나 혹은 체스는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이자 자체로 그 결과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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