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braism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그것은 BC 13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에서 비롯되며, 이어 야위스트(Yahwist: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나 엘로히스트(Elohist:엘로힘을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 등의 역사가와 《신명기()》 율법의 기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BC 6세기 초기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되고 다수의 선량()이 포로가 되면서, 그 종교사상은 한층 심화되고, 제2이사야의 '고난의 종복'에서의 구제사상()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구제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 ·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인격신()의 역사적 계시와 이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하고,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즉 헬레니즘우주를 신들로부터의 타락 또는 유출()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은 우주를 신이 만든 피조계()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서처럼 인간의 육체나 물질계는 그 자체가 악()으로 취급되지 않고 피조물의 하나로서 의의가 부여된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인격적 결단과 책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는 이 인간의 책임과 신의 인도에 의해 명확한 목표(종국)를 향하여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종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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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4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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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작품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범인(凡人)들을 감동시키지만,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탄생배경을 알고,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사상을 읽어내는 것은 작품의 심미적 측면을 넘어 또다른 흥미를 선사한다. 워낙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같은 불후의 회화작품을 남겨 미켈란젤로를 조각가보다는 화가로서 더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작품의 언급을 통해 그가 얼마나 조각가이기를 원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는 알레고리, 상징과 기호들을 그림 곳곳에 숨겨두고, 굴욕당한 자부심에 대해 악의적인 복수극을 펼친다.

『다빈치 코드』를 필두로 종교에 관한 심히 이단스러운 책들을 읽다보니,소설이긴 해도 약간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까'하는 의심에서부터 '만약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1+1=1인것처럼 자명한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라면'하는 불순한(?) 가정도 해보게 된다.
이 책은 비슷한 종류의 '종교적 폭로'를 소재로 한 소설들 중에서는 그 내용이 제일 충격적이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자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반이 없어지며, 교회가 설교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거대한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기만. 진실은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빛을 가져다주지만, 또 적잖은 혼란과 충격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기득권은 혼돈을 막기 위해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막거나 침묵한다.
사람들은 숨겨진 것에 자극받는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한 집단이 어느 한 집단에게 감추려하는 비밀만이 있을 뿐이다.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은 대부분 '권력'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그 비밀을 밝혀내려고 한다.

이 책이 쓰여졌을 당시의 파급효과를 4년이나 지난 다음에 이 책을 읽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흔히들 쓰는 방법으로 작가는 행여나 교황청의 비난을 살까봐 이중의 화자를 설정하여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듯 하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에 숨겨놓은 철자의 신비를 푸는 방법이라든가, 천지창조의 도상학적 분석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지만, 이 소설은 뭔가 엉성한 느낌을 준다. 누군가의 리뷰대로 완역이 아닌 편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 말하여지지 않고 다음장으로 넘어가버린 듯한 구석이 많다. 『발자크 평전』에서는 강인한 흡인력으로 작가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던 안인희씨의 번역도 뭔가 아쉬운 기분이 많이 든다. 『다빈치 코드』보다는 덜 헐리우드적이지만 역시 『장미의 이름』의 치밀함엔 역부족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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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사항*

1.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카플레세, 이탈리아)

2. 미켈란젤로 시대의 교황들
212대 식스토 4세 Sixtus IV 사보나 1471.8.9;8.25-1484.8.12
213대 인노첸시오 8세 Innocentius VIII 제노바 1484.8.29;9.12-1492.7.25
214대 알렉산데르 6세24) Alexander VI 발렌시아 1492.8.11;8.26-1503.8.18
215대 비오 3세 Pius III 시에나 1503.9.22;10.1;10.8-1503.10.18
216대 율리오 2세 Julius II 사보나 1503.10.31;11.26-1513.2.21
217대 레오 10세 Leo X 피렌체 1513.3.9;3.19-1521.12.1
218대 하드리아노 6세 Hadrianus VI 위트레흐트 1522.1.9;8.31-1523.9.14
219대 클레멘스 7세 Clemens VII 피렌체 1523.11.19;11.26-1534.9.25
220대 바오로 3세 Paulus III 로마 1534.10.13;11.3-1549.11.10
221대 율리오 3세 Julius III 로마 1550.2.7;2.22-1555.3.23
222대 마르첼로 2세 Marcellus II 몬테풀치아노 1555.4.9;4.10-1555.5.1
223대 바오로 4세 Paulus IV 나폴리 1555.5.23;5.26-1559.8.18
224대 비오 4세 Pius IV 밀라노 1559.12.25;1560.1.6-1565.12.9

3. 천지창조(1508-1512,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 바티칸) :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그림, 1989년 복원 완료. 원래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는 이 부탁을 여러 번 거절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4년에 걸쳐 작품을 완성한다. 율리우스 2세는 예배당 천장에 12사도가 그려지길 원했으나, 여러 번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야 할 사례비를 떼어먹은데 대한 복수로 그는 12사도 대신 창세기 장면(그것도 시간 순서를 거꾸로 하여)과 5명의 여자 예언자, 7명의 남자 예언자를 그려넣는다.

천지창조 이야기
1)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가르심
2) 해와 달과 식물을 창조하심
3) 불과 물을 가르심
4) 아담의 창조
5) 이브의 창조
6) 원죄와 낙원 추방
7) 노아의 감사제
8) 대홍수
9) 술취한 노아

남자 예언자들
18) 요나
19) 예레미야(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음)
20) 다니엘
21) 에제키엘
22) 이사야
23) 요엘
24) 즈가리야

여자 예언자들
25) 리비아의 예언자
26) 페르시아의 예언자
27) 쿠마이의 예언자
28) 에리트레아의 예언자
29) 델포이의 예언자

4. 최후의 심판(1534-1541,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 바티칸) : 1994년 복원 완료.

여기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근육질의 거인족, 강력한 모습. 그리스 신화의 아폴로와도 같은 힘을 가진 예수의 모습. 바르톨로메우스의 벗겨진 가죽에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5.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 : 바티칸 궁전에 부속된 교황의 개인 예배당. 식스투스(재위1471-1484) 4세의 개인 예배당으로 지어졌음. 시스티나라는 말을 '식스투스의' 라는 뜻.



6. 성 베드로 성당 : 바티칸 시국의 공식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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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 양장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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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대했던 것보다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생겨난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주진 않는다. 오히려 에코는 우리에게 해석의 자유로움을 보장해주려는 듯 하다. 다만 소설속 기나긴 묘사 장면에서 사진이라도 한장 있어줬음 하는 바람들이 조금은 충족되었다.

『장미의 이름』서문에서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자아내게 했던 다층위의 작가들에 대한 언급(멜크 수도원의 아드소가 쓴 수기[1380년대]를 베네딕트회의 마비용이 편집한 것을 프랑스 발레 수도원장이 불역한 것[1842년]을 에코가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는)도 그 트릭이 밝혀진다. 특히나 1인칭 화자 아드소에게 에코가 부여한 남다른 의무는 안도감까지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소설에서 아드소는 나름대로 자신의 의견을 펼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윌리엄 수도사의 이야기 및 사건의 정황을 전달하는 나레이터이다. 따라서 사건의 핵심으로부터 독자 만큼은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윌리엄 수도사만큼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다. 즉 에코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어'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어보고 이해가 잘 안되는 대목에서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 그건 정말 그렇다.

어쩌면 이 창작노트는 본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한 이해가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더욱더 유용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자신의 소설에 대한 해석을 넘어서 마치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의 요약판을 읽는 듯한 문학 개론서의 느낌마저든다.

이젠 용기를 얻어 처음 몇장을 넘기지 못하고 늘 포기해야만 했던 『푸코의 추』에도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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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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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고 근 10년 만에 다시 읽게된 것 같다. 메모를 해가며 꼼꼼히 읽다보니 첫번째 독서가 얼마나 어설픈 것이었나 반성하게 되었다. 영화를 먼저 접하고 이 소설의 추리소설적 면모에만 집중했던 첫번째 독서의 오류를 수정하고 나니, 그토록 지루하고 어렵기만 했던 신학적 논쟁 및 종교/역사적 측면도 재미를 더했다.
지식이 짧아서일지는 모르나 역사추리물이라는 장르에서는 『장미의 이름』만한 무게를 지닌 것이 없는 듯 하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동일 장르의 책들도 물론 흥미롭고 놀라운 개연성을 선사해주지만 이렇게 깊이, 이렇게 상세하고 정확하게 시대와 접목시키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책은 내게 진중권의『춤추는 죽음』에 이어 '중세'라는 시대와 '중세인'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우연히 이 책을 읽기 얼마전 진중권의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는데, 에코가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에서 밝힌 것 처럼 '책은 끊임없이 이미 세상에 유포된 다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체험할 수 있었다. 특히 아드소가 수도원 교회 입구에서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을 느끼게 되는 팀파늄 묘사와 근간을 이루는 중세인들의 사상이 『춤추는 죽음』에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의 골조를 이루는 것은 '지식을 감추려는 자와 알려는 자 사이의 죽음을 불러오는 싸움'과 '그리스도의 청빈'을 둘러싼 교황측과 황제측의 정치적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긴 하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는 금서를 규정하는 행위와 자신들의 '소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청빈을 물고 늘어지는 성직자들의 행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똑같은 종교적 넌센스다.
종교란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는가, 반대로 억압하는가?
적어도 중세의 종교는 후자에 가까웠다. '죄의식'을 통해 대중을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지배원리로서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증거로는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저 '이단심판'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종교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중세가 종교의 아집에 갇힌 성직자들로 인해 참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변질된 서글픈 시대임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저 로저 베이컨의 신봉자 바스커빌의 윌리엄은 인간의 '이성'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식하고 과감하게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고한다.

살인 사건과 종교적 논쟁들이 넘쳐나는 이 책에 에코는 왜 낭만적으로 들리는 '장미의 이름'이란 제목을 붙였을까. 에코는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에서 이것을 독자의 숙제로 남겨놓겠다고 밝힌바 있다. 대학교때 미술관련 교양수업에서 선생님도 이 책을 읽고나면 제목과 관련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씀을 하신적이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용된 시구가 약간의 실마리를 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베르나르,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이 그 이름만 남아있는 것처럼, 매우 회의적으로 수기를 끝맺고 있는 아드소 역시 자신의 이 수기가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운명을 배태하고 있음을 직시 그에 대한 집착을 버렸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적 허영심의 포기라고 할까.
반대로, 제 4일째 아드소가 여자와의 관계 후 여자의 환영을 쫓아버리지 못하고 번민하는 대목에서는 '한 송이 초라한 장미가 온갖 지상적 순행의 표징이 된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장미꽃 중에 하나이지만 그 한 송이에는 우주의 진리가 담겨 있듯, 온 우주 만물이 다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는 뜻이겠다. 어떻든 너무나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여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함 반 자유로움 반으로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이윤기씨의 자연스런 번역 또한 이 책의 읽기에 크나큰 도움을 준다. 읽기 만만치 않은 소설 축에 속하는 이 책이, 중간중간에 나오는 라틴어와 외국이름들만 아니라면 번역 소설이라는 것을 깜빡깜빡 잊게 해줄만큼 매끄럽다.

역시 첫번째 성의없는 독서 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도 이해에 있어 보탬이 되니 더불어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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