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Erasmus, Desiderius, 1469.10.27~1536.7.12]

 

로테르담 출생. 사생아로 태어나 9세경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20세경에 정식으로 수도사()로서의 서원()을 하였다. 1493년부터 캄브레의 주교 베르고프 존(Berg-op-Zoon)의 비서가 되고, 그의 원조를 받아 1495년부터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였으나, 이 시절부터 경화()된 가톨릭 교회 제도에 대하여 서서히 비판적인 경향을 띠었다. 주로 고전 라틴문예연구에 몰두하고, 생활을 위하여 영국 귀족의 아들에게 라틴어의 개인교수를 하며, 1499년에는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T.모어, J.콜렛 등의 인문학자와 알게 되었다.

특히 콜렛의 <바오로 서한> 연구에 자극을 받아 이듬해 파리로 돌아오자 그리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성과는 《그리스도교 전사필휴()》에 제시되었다. 1506년에는 이탈리아의 각 도시를 역방()하였으며, 1509년에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던 중에 착상하였고, 런던의 모어의 집에서 단숨에 써낸 것이 유명한 희문() 《우신예찬() Encomium Moriae(Laus Stultitae)》(1511)이다. 이 내용은 ‘어리석음의 여신()’이 세상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많은가를 열거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형식을 취하여, 철학자 ·신학자의 공허한 논의,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서술되었다. 1461년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평화가 체결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 《그리스도교 군주의 교육》을 간행하였다. 또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최초의 인쇄 교정본()을 간행하고, 《히에로니무스 저작집》을 간행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여 인문주의자의 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은 고국에 돌아가서 바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 정신으로의 복귀를 역설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나왔다. 휴머니즘()이란 ‘보다 인간적인 학예’를 초래하려는 운동인데,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의 복위·복원’을 원하여 가톨릭 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의 교정을 하고, 고대학예를 소개함으로써 경화된 사고방식 ·견해를 시정하려고 한 것은 바로 휴머니즘의 정도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17년부터 M.루터종교개혁운동이 격화하는데,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할지언정 이것에 반역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루터의 지나치게 정열적인 실천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며 여러 차례 루터로부터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를 거부하였다. 중년 이후부터 만년의 에라스무스는 그에게서 비판을 받은 가톨릭 교회 내의 광신자들과 그가 추파를 던지면서도 좀처럼 한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신교도 중의 광신도들 사이에 끼어 곤경에 처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은 전유럽에 미쳤는데, 세계주의적 정신의 소유자로서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이며, 특히 프랑스의 16세기의 문화사상사에 미친 영향은 뚜렷하다. 저서에는 주로 라틴어로 쓴 신학적인 것이 많으나 문학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유럽의 사려깊은 사람들의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격언집() Adagia》(1500) 《우신예찬》(1511) 《대화집() Colloquia》(1518)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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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Luther, Martin, 1483.11.10~1546.2.18]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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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부터 유래하며 1540년에 로마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그나티우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을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여 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었다. 제수이트 교단이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중국식 음사() 그대로 야소회()로 써왔다.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이 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특히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어 1547년 처음으로 예수회 대학을 개설한 이래, 세계 100여 개 국가에 진출하여 226개의 단과대학종합대학을 설립하였으며, 4,000여 개의 중·고교와 기타 교육기관 등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이 수도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4년이며 1960년에 서강대학교, 1962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1974년 수원에 ‘말씀의 집’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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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르 [Xavier, Francisco, 1506.4.7~1552.12.2]

한자명은 방제각(). 에스파냐 북부에 있던 나바라 왕국 귀족가문 출생으로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동양의 사도'로 불린다. 1534년 27세 때에 이그나티우스데로욜라와 함께 예수회(Jesuit)를 창설하였고, 1540년 로욜라를 초대 총장에 추대, 교황의 공인을 받았다. 일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전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회의 동인도 관구장(), 교황특사로서 동양 일대의 선교책임을 맡아 일하였는데, 1545∼1547년에는 주로 말라카제도 포교에 전념하였다. 1552년 다시 중국에 선교하려고 광둥항[]에 도착하였으나 열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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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

 성인(축일은 7월 31일). F.사비에르와 함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북()에스파냐의 바스코 지방 로욜라 성주()의 아들로 출생,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팜플로나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리스도전()》과 《성인전》을 읽고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만레사의 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면서 내적 싸움과 신비적 조명을 경험하고 《심령수업 Exercitia spiritualia》을 썼으며, 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려면 학문이 필요함을 깨닫고 32세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그가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 F.사비에르, P.파베르 등 6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1540년 그는 예수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회원을 양성하고 회헌()을 만듦으로써 그 기반을 다졌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던 가톨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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