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벨레 [Du Bellay, Jean, 1492~1560]

글라티니 출생. 1526년에 바욘, 1532년에 파리의 주교()를 지내고, 프랑수아 1세를 섬겨, 영국 ·이탈리아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 1535년에 추기경이 되어 1536∼1537년의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전란 중에는 육군 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541∼1544년 리모주 주교, 1544∼1553년 보르도 대주교가 되어, 1546∼1556년에는 르망 주교를 겸임했는데, 앙리 2세의 대관()과 동시에 신임을 잃고 1553년 이후에는 로마에서 살면서 오스티아의 주교를 역임했다. 라틴어로 쓴 《시집》 《서간집》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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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Francois I [1494.9.12~1547.3.31]

코냐크 출생.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앙드렘백작 샤를 드 바루아의 아들로서, 1514년 국왕 루이 12세의 공주 클로드와 결혼, 루이 12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천성이 명랑하고 활달하였으며, 낙천적이고 무인()의 호방함을 지닌 한편, 기지와 우아한 감각도 지녔다.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에 원정, 마리냥에서 승리를 거두어 밀라노를 손에 넣었다. 1519년, 독일 황제의 선거에 출마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에게 패배하였다. 이어서 카를 5세에게 도전, 1525년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싸움에 져, 포로가 되어 유폐되었다.

이듬해 1526년 석방되자 다시 카를과 전쟁을 벌여, 싸움은 1544년의 화의()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왕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고대의 학문과 예술에 심취, 루아르 강변에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세우고, 고전학자들을 초빙하여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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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론 [唯名論, nominalism]

명목론()이라고도 한다. 실재론()과 대립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간 것을 갖는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 명사를 주어진 근거로 하여 사물간의 유사성()이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실재론·개념론과 함께 유럽 중세()의 보편논쟁으로 일파()를 이루었다. 11세기 후반기에 로스켈리누스가 이 입장을 대표했으며, 14세기에는 W.오컴이 체계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17세기 때 영국의 경험론 속에서 부활하였는데 T.홉스가 그 대표자이다. 중세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결부하였던 정통신학()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위험사상시되었고, 명백히 유물론적 색채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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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福音主義, evangelicalism]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①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입장, 즉 종교개혁자 특히, M.루터가 말한,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주장, 즉 이신득의론()이 있다. ② 근대 자유주의신학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수태와 십자가 및 예수 그리스도부활을 믿는 신앙의 입장이다. 즉,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천국)’의 복음보다는 그것과 완전히 격리된 관계에서는 아니나 바울로가 주장하는 속죄()와 부활의 신앙을 강조하는 입장, ③ 성서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성서주의의 입장, ④ 성서를 중시함과 동시에 성령에 의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체험주의를 가리키는 입장, ⑤ 성서의 신학적 탐구 ·해명보다는 오히려 실제 전도를 중시하는 경우 등이다.

이상과 같이 복음주의는 그것을 주창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다소 그 의미가 다르지만 모두 성서에서 가르치는 복음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주의 입장에 있다고 자처하는 현대의 교파들에도 엄격히 따지고 보면 비()복음적 요소가 다분히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율법주의 ·정령숭배사상 등의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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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 [Ockham, William of, 1285?~1349]

 잉글랜드 오컴 출생.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

그의 입장은 유명론()으로서, 중세의 사변신학()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원천은 개체에 관한 직관표상(:notitia intuitiva)으로, 개체가 실재()이고,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보편자가 다수의 개()에 관하여 술어()가 되는 것은, 보편자가 다수의 개의 기호로서 이들을 대표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근세의 영국 경험론자가 답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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