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키케로의 <우정론>

어느 날, 절친한 친구가 중한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다가 내게 찾아와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다른 친구는 내게 국가 반란 음모에 가담할 것을 간청한다.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정치적 동지였으나 어떤 계기로 각기 다른 정치 세력으로 나누어 섰을 때, 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결코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럴 가치도 없는 자에게 간청하고 애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로마 공화정 때 정치인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기원 전 44년에 쓴 <우정론>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 물론 우정의 문제들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키케로도 우정에 관한 담론을 시작하면서,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집정관 폼페이우스가 서로 가장 아끼던 친구였지만 어느 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고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를 먼저 예로 든다. 그만큼 진정한 우정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전 역사를 통해 우정의 범례로서 지속적으로 기억되는 친구들은 기껏해야 서너 쌍밖에 안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먼저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그가 여기서 ‘선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행동에서 “성실과 정직 그리고 공정성과 아량을 보여주는 사람들, 탐욕과 방종 그리고 파렴치한 행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굳건하게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을 주로 의미한다. 이런 미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 것이다. “미덕이 우정을 낳고 지켜주니, 미덕 없이 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우정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우정은 친구 사이에서 서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그렇다고 우의가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미덕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미덕을 볼 줄 알고 그것에 끌리는 법이다. <우정론>에 화자로 등장하는 라일리우스와 그의 평생지기 스키피오의 우정도 서로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니다. 서로의 미덕을 찬탄한 까닭에 서로 좋아했고 서로를 더 잘 알게 될수록 우의도 깊어갔다. 이익은 그에 따라온 것이다.

그러면 미덕과 선행을 전제로 할 때, 친구를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해주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키케로는 우정의 제1법칙으로서 “도의에 어긋나는 것은 요구해서도 안 되고, 요구받더라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친구에게 옳지 못한 것은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친구에게는 옳은 것만 행해야 하고 이 때에는 굳이 친구가 간청하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친구를 위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불한당들 사이의 의리와 협력은 우정이란 미명으로 비호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케로도 설명하듯이, 라틴어로 우정(amicitia)과 사랑(amor)은 모두 사랑하다(amare)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매우 감성적인 것이다. 우정이라는 말도 ‘정(情)’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키케로는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을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 높은 수준의 이성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윤리적 형태’라는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정은 감성과 이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윤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인간관계의 이상형이다. 키케로는 우정에서 인간관계의 최고 이상형을 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우정을 이룬 사람들은 역사에서 몇 쌍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선하고 복된 삶을 위해서 지향해야 할 인간의 과제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우정을 논하면서, 사실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거래하는 '친구'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발췌)

'도반'은 불가 용어로 깨달음을 향해 같은 길을 가는 구도자로서 정신적 친구를 뜻하고, '교유'는 도덕이 있는 선비를 사귐으로써 자기 몸도 아울러 닦는다는 뜻의 유가 용어이다.

친교, 교유 개념의 내면적 논리는 어디까지나 친구에게서 본받을 것을 본받아 자신의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공통적 윤리적 이상을 같이 지향하며 몸으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서로 이끌어주고 편달해 주는 것이 전통 사회에서 바라본 친구의 이상형이었다.

그러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친구'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 이 말은 원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양반'이란 말과 같이 삼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친구'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친한 사람'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동급생'이라는 의미, 음담패설과 술 강권으로 후배들을 괴롭히는 직장 선배도 '직장 친구', 약한 죄밖에 다른 죄가 없는 여학생에게 정신이상을 초래한 청소년 범죄자도 '학교 친구'다. 한 단어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변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교'와 '친분'의 개념도 본질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잘 먹고 잘살겠다'는 드높은 이상을 과감히 지향하는 패기 찬 젊은이들에게는 옛 선조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친교와 친분이 일종의 'give-and-take(도움 주고받기)'나 동업관계로 변해버렸다. 선조들이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모범을 보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현대인들은 대부분 수없이 많은 '친구'로부터 단순한 물질적인 도움을 받고 싶어할 뿐이다.

(56-59쪽)


2006년 3월 13일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신나는 학교 -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이상대/서울 신월중 교사

[...]

3학년 7반 담임을 통보받고 명단을 건네받아 돌아가는 길에, 마침 방송 일을 돕느라고 학교에 나와 있던 3학년 경문(가명)이란 놈을 만났다. 3학년 담임이 되었다고 하니, 녀석이 대뜸 명단을 보여 달라며 달라붙었다. (우리반 명단에 그 녀석 이름이 있었다) 속으로 저 녀석이 담임을 알고 싶어 그런가보다 하며, 내가 제 담임이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슬쩍 어떤 담임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는 나중 문제”라며 한 마디로 잘랐다. 헉,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그럼 뭐가 궁금한 건데?”

“영희하고 승호 걔네들 몇 반인지 알고 싶어서요. 반도 갈라졌는데, 교실까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만나기 힘들잖아요.”

영희는 제 여자 친구요, 승호는 그런 둘 사이를 잘 보좌해주는 단짝친구이다. 역시 그거였다. 아이들의 최고 관심사는 바로 친구인 것이다. 아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반에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해주며 격려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두서넛만 되어도, 까짓 거 공부를 좀 못한다 해도, 담임이 아무리 구박을 한다 해도 웬만한 역경은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는 거다. 반대로 친구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소외되는 경우에는, 설령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여간해서 견뎌내기 어렵다. 이 차이는 참으로 큰 것이어서, 말하자면 열대여섯 청춘의 건강한 성장은 무엇보다 친구 관계 회복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학급을 이끌면서 담임으로서 바로 이 지점(이른바 관계 개선을 돕는 학급운영!)에 각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은 담임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전면에 나서서 내 말을 잘 들으라고, 다른 것보다 나를 따르라고 다그치고 질책하면서 일 년을 싸웠다. 얼마나 우둔했는가. 진정 담임이라면, 한 발 물러나 친구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또한 교과 담임(교과 담임과의 관계도 친구 못지않게 중요하다)과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뒤에서 애쓰고 배려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뛰어난 교사는 힘 있는 교사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정 힘이 있다. 보통 교사는 힘을 지니려고 한다. 그런데 넉넉한 힘을 지니지 못한다. 슬기로운 교사는 뒤에서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도우니, 가르침의 도와 힘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노자가 설파한 ‘배움의 도’는 언제 읽어도 나를 부끄럽고 또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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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7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도 디오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에 비하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은 만물의 실체와 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들 모두 세상을 관장하는 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염려하고, 얼마나 많은 것의 노예였던가?”

로마 제국의 다섯 훌륭한 황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그는 이 작품에 담긴 철학적 명상으로 인해 이른바 ‘철인-왕’ 또는 ‘철학자-황제’의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철학자들이 왕으로서 다스리던가, 아니면 왕이나 최고 권력자들이 진지하게 철학을 하든가 해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합쳐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악으로부터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한 이래, 철인왕은 통치의 이상형이 되어 왔다.

플라톤의 철인왕 개념은 단순히 철학 정신과 통치술의 결합이라는 것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심도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아우렐리우스도 <명상록>에서 이 점을 반복적으로 성찰한다. 다른 한편 황제가 되어 정치의 현실에 뛰어든 그는 “철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도 허튼 명예욕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인정한다. 세속에 물든 자신이 철학자라는 명성을 얻기는 이미 쉽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렐리우스의 삶과 정신은 철학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이는 그가 어릴 때부터 최적의 교육 환경에서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진지하고 치열한 자세 때문이다.

그의 선대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평화롭고 번영의 절정에 있었다. 반면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자연 재해를 비롯한 온갖 재난에 시달렸다. 황제는 명민했지만 제국이 그 번영의 정점에서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북부 국경에서는 게르마니 인들의 침입이 잦았고,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 군단에선 폭동 사태가 있었으며, 제국의 동방에서는 정치·군사적 불안 상태가 계속되었다. 황제 자신도 재위 마지막 10년을 로마 밖의 원정지에서 보냈다. 바로 이 시기에 틈틈이 개인적 성찰을 기록한 결과가 <명상록>인 것이다.

일종의 일기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저술은 당대에는 그 측근들조차 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후대에 와서야 알려졌는데, 그 중 일부는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상록’이라는 제목은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으로, 필사본들에는 ‘자기 자신에게’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통치의 어려움 속에서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제목은 저술의 의도와 내용을 잘 반영한다.

그래서 고전 연구가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기>에서 전투와 전술의 세세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그와 2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역시 전장에서 집필한 <명상록>에서 아우렐리우스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자못 흥미롭게 본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은신처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늘 그런 은신의 기회를 가져 너 자신을 새롭게 하라!”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서 오는 온갖 문제 앞에서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라는 작은 영역으로 은신할” 생각을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철인왕의 의미와 그 실천이 있다. 왕의 철학자적 자세란 바로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며, 항상 기본 원칙을 성찰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용기 있게 그것에 충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도 잘 드러나 있다. “네 기본 원칙들을 적용할 때는 판크라티온(온 몸으로 싸우는 격투기) 선수처럼 해야지, 검투사처럼 해서는 안 된다. 검투사는 사용하던 칼을 잃으면 죽지만, 판크라티온 선수는 주먹을 항상 갖고 있어 그것을 꽉 쥐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진실과 원칙을 위해 주먹을 꽉 쥔 철학자, 그가 철인왕인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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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4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말로 살지 말고, 일로 살라

볼테르의 <캉디드>

원제 : Candide, ou l'Optimisme

 

볼테르의 <캉디드>(1759년)는 순진한 낙천주의를 풍자한 철학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순박한 청년 캉디드는, 낙천주의를 설파하고 그를 위해 논쟁하기 바쁜 스승 팡글로스의 가르침대로,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한 최선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남작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성에서 쫓겨난 캉디드는 세상을 방랑하며 난파, 지진, 질병, 약탈, 전쟁, 광신과 종교재판 등 온갖 재해와 불행을 경험한다. 그런 가운데 비관주의자 마르탱을 만나 논쟁하고 혼란에 빠진다. 천신만고 끝에 콘스탄티노플에 이른 캉디드는 그 근교에서 농원을 가꾸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끝나는 소설에서 우리는 많은 평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낙천주의와 비관주의를 벗어나 인간의 운명은 오직 밭을 일구어가듯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라는 볼테르의 계몽적 메시지를 엿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철학적 입장에서 이 작품을 좀 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볼테르의 경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극단의 낙천주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은 최선을 향해 갈 것이라고 믿을 것이고, 극단의 비관주의자는 어떤 경우라도 세상은 최악을 향해 갈 것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에, 행위의 반성과 삶의 개선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맹신은 사람들을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캉디드 일행이 콘스탄티노플 근교에서 만난 노인은 가족과 함께 작은 농원을 가꾸면서 살고 있다. 손님에게 신선한 과일과 향내나는 커피를 대접하며 그는 삶의 보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 가지 악,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이 작품이 진정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낙천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맹신 때문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볼테르는, 그릇된 믿음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논쟁의 과열을 불러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볼테르는 그의 저서 <철학 사전>에서 ‘미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미신은 온 세상을 불 위에 올려놓지만, 철학은 그것을 끄는 일을 한다.” 즉 미신은 사람들을 불필요한 논쟁으로 달아오르게 하지만, 철학의 역할은 사람들을 냉철한 생각으로 초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진정한 철학은 사람들을 ‘말의 삶’에서 ‘일의 삶’으로 인도할 때 그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캉디드>에서 가장 혹독한 풍자의 대상은 성직자와 법관이다. 그들은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축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말로 착취하지 말고, 일로 베풀라! 말로 살지 말고, 일로 살라!
물론 볼테르를 포함하여 철학자들도 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른 가능성이 있다.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우선 자신의 말을 실천할 때 철학자는 일로 베푸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볼테르가 철학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그 자신이 바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또한 중요한 것은, 철학은 말과 글이 일이 되고 놀이가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화적 창조자로서 철학자의 역할이 있다. 이는 왕성한 문예 활동으로써 볼테르 자신이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자, <캉디드>의 대단원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이다.
못 말리는 팡글로스의 낙천주의 설명 앞에서 캉디드는 말한다. “정말 멋진 말이군요. 하지만 이제 우리의 정원을 경작해야지요(Il faut cultiver notre jardin).” 여기서 볼테르가 쓴 ‘경작하다(cultiver)’는 말은 복합적이다. 철학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는 철학자의 문화적 창조를 내포한다. 철학은 말과 글이 일과 놀이가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유용함’과 ‘즐거움’ 두 가지가 다 충족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캉디드가 돌아다닌 곳 중에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도록 꾸며진 장소”는 한 곳밖에 없었다. 이상향인 엘도라도뿐이었다. 유용함과 즐거움이 함께 충족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볼테르의 철학이 이상으로 설정하고 지향했던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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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절판


적어도 나에게는 사람만큼 흥미로운 텍스트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변질되는 건 언제나 언어 때문이다.-9쪽

'김인수는 3학년이다' [...]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쓴 그의 몇몇 글들은 문체에 관하여 그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작가인지 말해주었다. -김훈-16쪽

우리는 아마 누구도 절대적인 진실을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욕망을 버려야죠. -김훈-18쪽

그런데 건축이란 것이 다른 사람의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것이거든요.-승효상-122쪽

즐기면서도 저급하다고 욕하는 게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중요한 속성 아닌가?-신동엽-142쪽

별, 별, 그렇게 많은 별, 난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 별을 보는 순간 내 이 썩어 있는 가슴 덩어리가 느껴지면서 차라리 피라도 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상일-177쪽

요즘은 어디 나가는 것도 싫고 방구석의 찌뿌드드한 따분함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이우일-192쪽

무대 위에 배우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시선이 가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정해주니까 어떤 면에서 배우의 카리스마를 운운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아니죠.-장동건-210쪽

진정한 신유목민이란 지리적인 이동보다는 정신적인 이동이 잦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정신적인 영토를 찾아 끊임없이 떠나는 과정이야말로 신 유목민의 중심적인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양혜규-221쪽

건축이라는 건 단순히 집짓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조직해주는 거라고요.-조성룡-237쪽

아직도 호기심이 많은 편인데, 뭐든 경계 짓지 않고 보고 느끼려고 해요. 존재하는 건 뭐든 의미가 있잖아요.-조성룡-240쪽

술을 먹는다고 쳐. 술을 이렇게 먹는 거랑, 술이 너무 고픈 인간이 이렇게 먹는 거랑 다르잖아. 성격이 다 나오는 거지. 술 한 잔 마시는 것에도 캐릭터가 담겨 있는 거야. -주현-264쪽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건 한두 명의 좋은 친구다. 완벽한 신뢰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한대수-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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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6쪽, 210쪽 추천합니다.^^

부엉이 2006-06-0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보고 장동건과 DJDOC를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구판절판


나는 근대성이란 한마디로 사람들을 '고향'에 묶어두는 인식론적 기제라고 생각한다. 신분 질서에서 해방된 '인민(人民)'들에게 민족과 학연, 지연, 가족, 순결, 원죄 등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을 부여해주는 표상의 장치, 그것이 근대성의 기본 원리가 아닐까. -10쪽

무엇보다 속도에 대한 신앙체계를 전복해야 한다. 먼저 속도는 빠르지 않다! 속도와 빠르기를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균질화와 선분화에 포획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83쪽

느림의 또 다른 표상은 자기속도를 지니는 것이다. -84쪽

느림 또는 느리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조급증(또는 협심증)과 결별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들)을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중심이나 체계로 환원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능력에 따라 고유한 질을 표현할 수 있는 '자기속도'.-85쪽

요컨대 역사는 결코 연속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중세 후기와 근대는 불연속적 지대라는 것이다. 욕망이 억압되었다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각기 다른 욕망의 배치가 있다. -165쪽

자기의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고, 욕망에 충실하며, 관습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점에서 말이다.-286쪽

그런 점에서 유머야말로 주체와 객체,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무기이자 전략이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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