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키케로의 <우정론>
어느 날, 절친한 친구가 중한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에 쫓기다가 내게 찾아와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다른 친구는 내게 국가 반란 음모에 가담할 것을 간청한다.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정치적 동지였으나 어떤 계기로 각기 다른 정치 세력으로 나누어 섰을 때, 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나 자신을 위해서라면 결코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럴 가치도 없는 자에게 간청하고 애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로마 공화정 때 정치인이자 뛰어난 문필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기원 전 44년에 쓴 <우정론>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다. 물론 우정의 문제들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키케로도 우정에 관한 담론을 시작하면서,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집정관 폼페이우스가 서로 가장 아끼던 친구였지만 어느 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고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를 먼저 예로 든다. 그만큼 진정한 우정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전 역사를 통해 우정의 범례로서 지속적으로 기억되는 친구들은 기껏해야 서너 쌍밖에 안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먼저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그가 여기서 ‘선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행동에서 “성실과 정직 그리고 공정성과 아량을 보여주는 사람들, 탐욕과 방종 그리고 파렴치한 행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굳건하게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을 주로 의미한다. 이런 미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 것이다. “미덕이 우정을 낳고 지켜주니, 미덕 없이 우정은 어떤 경우에도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우정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우정은 친구 사이에서 서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그렇다고 우의가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미덕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미덕을 볼 줄 알고 그것에 끌리는 법이다. <우정론>에 화자로 등장하는 라일리우스와 그의 평생지기 스키피오의 우정도 서로 필요해서 시작된 게 아니다. 서로의 미덕을 찬탄한 까닭에 서로 좋아했고 서로를 더 잘 알게 될수록 우의도 깊어갔다. 이익은 그에 따라온 것이다.
그러면 미덕과 선행을 전제로 할 때, 친구를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해주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키케로는 우정의 제1법칙으로서 “도의에 어긋나는 것은 요구해서도 안 되고, 요구받더라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친구에게 옳지 못한 것은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친구에게는 옳은 것만 행해야 하고 이 때에는 굳이 친구가 간청하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친구를 위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불한당들 사이의 의리와 협력은 우정이란 미명으로 비호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키케로도 설명하듯이, 라틴어로 우정(amicitia)과 사랑(amor)은 모두 사랑하다(amare)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매우 감성적인 것이다. 우정이라는 말도 ‘정(情)’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키케로는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혜로운 판단을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 높은 수준의 이성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윤리적 형태’라는 정의를 끌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정은 감성과 이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윤리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인간관계의 이상형이다. 키케로는 우정에서 인간관계의 최고 이상형을 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우정을 이룬 사람들은 역사에서 몇 쌍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선하고 복된 삶을 위해서 지향해야 할 인간의 과제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우정을 논하면서, 사실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거래하는 '친구'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발췌)
'도반'은 불가 용어로 깨달음을 향해 같은 길을 가는 구도자로서 정신적 친구를 뜻하고, '교유'는 도덕이 있는 선비를 사귐으로써 자기 몸도 아울러 닦는다는 뜻의 유가 용어이다.
친교, 교유 개념의 내면적 논리는 어디까지나 친구에게서 본받을 것을 본받아 자신의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공통적 윤리적 이상을 같이 지향하며 몸으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서로 이끌어주고 편달해 주는 것이 전통 사회에서 바라본 친구의 이상형이었다.
그러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친구'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 이 말은 원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양반'이란 말과 같이 삼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친구'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친한 사람'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동급생'이라는 의미, 음담패설과 술 강권으로 후배들을 괴롭히는 직장 선배도 '직장 친구', 약한 죄밖에 다른 죄가 없는 여학생에게 정신이상을 초래한 청소년 범죄자도 '학교 친구'다. 한 단어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변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교'와 '친분'의 개념도 본질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잘 먹고 잘살겠다'는 드높은 이상을 과감히 지향하는 패기 찬 젊은이들에게는 옛 선조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친교와 친분이 일종의 'give-and-take(도움 주고받기)'나 동업관계로 변해버렸다. 선조들이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모범을 보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현대인들은 대부분 수없이 많은 '친구'로부터 단순한 물질적인 도움을 받고 싶어할 뿐이다.
(56-59쪽)
2006년 3월 13일 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신나는 학교 -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이상대/서울 신월중 교사
[...]
3학년 7반 담임을 통보받고 명단을 건네받아 돌아가는 길에, 마침 방송 일을 돕느라고 학교에 나와 있던 3학년 경문(가명)이란 놈을 만났다. 3학년 담임이 되었다고 하니, 녀석이 대뜸 명단을 보여 달라며 달라붙었다. (우리반 명단에 그 녀석 이름이 있었다) 속으로 저 녀석이 담임을 알고 싶어 그런가보다 하며, 내가 제 담임이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슬쩍 어떤 담임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는 나중 문제”라며 한 마디로 잘랐다. 헉,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그럼 뭐가 궁금한 건데?”
“영희하고 승호 걔네들 몇 반인지 알고 싶어서요. 반도 갈라졌는데, 교실까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만나기 힘들잖아요.”
영희는 제 여자 친구요, 승호는 그런 둘 사이를 잘 보좌해주는 단짝친구이다. 역시 그거였다. 아이들의 최고 관심사는 바로 친구인 것이다. 아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반에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해주며 격려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두서넛만 되어도, 까짓 거 공부를 좀 못한다 해도, 담임이 아무리 구박을 한다 해도 웬만한 역경은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는 거다. 반대로 친구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소외되는 경우에는, 설령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여간해서 견뎌내기 어렵다. 이 차이는 참으로 큰 것이어서, 말하자면 열대여섯 청춘의 건강한 성장은 무엇보다 친구 관계 회복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학급을 이끌면서 담임으로서 바로 이 지점(이른바 관계 개선을 돕는 학급운영!)에 각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은 담임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전면에 나서서 내 말을 잘 들으라고, 다른 것보다 나를 따르라고 다그치고 질책하면서 일 년을 싸웠다. 얼마나 우둔했는가. 진정 담임이라면, 한 발 물러나 친구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또한 교과 담임(교과 담임과의 관계도 친구 못지않게 중요하다)과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뒤에서 애쓰고 배려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뛰어난 교사는 힘 있는 교사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정 힘이 있다. 보통 교사는 힘을 지니려고 한다. 그런데 넉넉한 힘을 지니지 못한다. 슬기로운 교사는 뒤에서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도우니, 가르침의 도와 힘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노자가 설파한 ‘배움의 도’는 언제 읽어도 나를 부끄럽고 또 부끄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