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절판


앉은 자세로 하는 독서는 학교, 일, 신체적인 제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즐거움의 일부가 증발해버린다. 지하철에서 하는 독서를 빼고는.-13쪽

나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경우는 도서전이다. 죽었거나 살아 있는 그 수천 명의 작가들, 내가 읽지 않은 그 수백만 권의 저작들.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소화불량에 시달린다.-56쪽

신문의 소란(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천둥소리처럼 침묵을 꿰뚫는)에 비해 책은 조용한 편이다. 그래도 들리기는 들린다. 검지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가며 급하게 원하는 페이지를 찾느냐, 아니면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페이지들을 훑어나가느냐에 따라 폭풍이 몰아치기도 하고, 콧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기도 한다.-71쪽

보기 싫은 겉표지를 벗겨버리기 쉬운 만큼, 띠지는 성가시긴 하지만 버리기가 영 찜찜하다. -79쪽

향수나 기저귀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 경우에도 바코드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포장지에 있다. 그런데 책에는 직접 새겨져 있다. 생살에, 낙인처럼.-85쪽

외부의 권유에 솔깃하는 얇은 귀가 내 독서의 논리적 혹은 무질서한 흐름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119쪽

책의 경우에는 수없이 많은 접근 방법과 선택 동기가 있다. 작가, 나라, 만남, 장르, 정황, 판형, 순간적인 기분, 계절, 집 증등. 수없이 많은 것들. 모든 것이 구실이 된다. 관계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21쪽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을 흘낏거리는 것을 참아내질 못한다.-160쪽

책의 성격이 남에게 보이기에 창피한 것이든 아니든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다.-161쪽

이 모든 게 사납고 새침한데다 히스테리만 늘어나는 노처녀나 하는 짓 같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162쪽

그런데, 날 소름 돋게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이 모든 행동들을 정작 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한다. 거리낌 없음에 완벽한 위선까지 더해서.-163쪽

그리고 백과사전도 하나 싣고 다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차를 타고 여행할 때 서로에게 엉뚱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잦으니까.-175-176쪽

차례를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미국식으로 차례를 서두에 위치시키는 최근의 관행이 날 돌아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184쪽

아름다움이란 사람이나 물건이 자신의 못난 부분마저 좋아하도록 만들 줄 알 때, 그것을 자신의 개성과 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91쪽

정상적인 두께로 분권한 책 두 권과 엄청나게 두꺼운 책 한 권은 다르다. 그것은 팔레르모에 가기 위해 밀라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과 같다. 감정적인 몰입에 단절이 생긴다.-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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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우 [dts-ES] - [할인행사]
제임스 완 감독, 리 웨널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영화에서 반전의 묘미는 상상과 예감의 허를 찌르는 쇼킹함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반전은 한 0.1초 동안 '헉' 소리를 낼 정도로 기막히지만 과도한 비약으로 허탈한 충격을 자아낸다. 오히려 무서운 건 어느 쪽을 택해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선택적 상황으로 희생자를 몰아넣는 부조리함이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면 낮동안에는 괜찮다가 밤이 되어야 영화의 잔상들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한번 공포가 밀려오면 영화 속에서 별로 무섭지 않았던 장면들조차도 너무나 실감나게 느껴진다. 며칠간 나로 하여금 이상한 꿈을 꾸게 만든 장면은 닥터 고든의 딸아이가 어둠을 응시하며 어떤 존재를 감지하는 장면이었다. 다른 잔인한 장면들이 말초를 쭈볏하게 만드는 시각적 공포에 불과하다면, 그 장면은 검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각적 공포다. 손에 잡힐 듯한 어둠 속에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고 있던 온갖 공포가 어지럽게 튀어나온다. 번득이는 두 눈만이 무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채.
가끔 늦은 시각 홀로 깨어있을 때 뒤가 저릿한 느낌이 요즘 들어 특히 잦다. 뭔가 훅 하고 스치는 듯한 기분 나쁜 인기척. 영화로 인해 내가 꾸며낸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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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었던 고해성사를 드디어 드렸다. 드물긴 하지만 형식적으로 성사를 주시는 신부님들이 계신데 오늘 신부님은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말씀해 주시곤 "여기까지 오는 것이 힘드셨습니까?"하고 물으셨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신부님의 의도를 알았기에 그렇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그렇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오면 되는 것이라고,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미사 중에 가만가만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내 죄가 무엇일까. 고해소 안에 들어서면 늘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죄 말고 말이다. 결국 죄는 죄책감을 부르고 그로 인해 무거워진 마음은 나를 부정적인 상태로 만든다. 나의 그런 상태는 타인과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든다. 대부분 그 피해자는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해야 할 가까운 가족이다. 

화를 냈던 경우를 되돌아보면 대부분 그 대상은 희생자가 된다. 그러니까 나를 화나게 만든 대상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애먼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이유로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풀이'다. 이렇게 엉뚱한 데 퍼붓고 있으니 아무리 퍼부어도 화는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그 대상이란 결국 돌아돌아보면 나 자신이기 일쑤다. 우습다. 이렇게 생각하면 살면서 화낼 일은 정말 별로 없을 것 같다.

신부님께선 미사 기도 지향으로 인도네시아 지진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억하자고 하셨다. 뉴스에서 기사를 보면서도 그냥 또 지진이 났구나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이렇게 마음이 무뎌지며 살면 안되는데. 가끔 너무 무섭다. 정작 놀라고 슬퍼해야 할 일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벌써 월드컵 때문에 그야말로 신경이 마비될 정도다. 벌써 4년이 흘렀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그때의 감동이 다시 밀려오겠지만 또 어떤 부모들에겐 두 딸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슬픔이 밀려올 것이다. 기쁨과 흥분이 마땅히 애도해야 할 슬픔을 가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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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an Jazz Trio - Mona Lisa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 (European Jazz Trio) 연주 / 스톰프뮤직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다빈치 코드의 흥행에 편승한 타이틀인가 싶지만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연주를 거쳐 감미로운 선율로 재탄생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익숙한 팝의 명곡들을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로 연주하는 최고의 이지 리스닝 장르가 아닐까 한다. 너무 요란스럽지 않고, 콘트라베이스의 둥둥거림도 적당히 가슴을 울린다. 넷킹 콜의 모나리자를 리메이크한 곡은 도입부의 클래식 현악 선율이 아름답고, 뒤이어 낮게 깔리는 콘트라베이스의 멜로디가 애절하다.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운 빌리 조엘의 어니스티는 반전되는 부분의 연주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하게 만든다. 마지막 곡 대니 보이는 고된 하루를 어둑한 바bar에 앉아 술한잔 기울이며 들으면 그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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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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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하늘은 이사야를 위해 울고 있으며, 눈물은 서리로 바뀌어 그 애를 덮어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주는 이사야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애가 다시는 춥지 않도록.-15쪽

내가 옆으로 물러서자 그 애는 내 아파트, 내 삶으로 걸어들어 오더니 결코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27쪽

그렇지만 나는 삶에서 일정한 무언가를 닻처럼 내리고 있다. 그걸 방향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자의 직관이라고 해도 된다. 뭐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기초 위에 서 있고, 더 이상 나아가 떨어지지 않는다. -67쪽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 가죽을 가져도 돼?"-70쪽

아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사람은 없으며, 아이보다 더 절실하게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도 없다.-74쪽

사람들은 시계를 도구로 삼아 서로의 삶을 묶는다. 약간의 변화라도 일으키면, 거의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85쪽

내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 -180쪽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뇌 속에서 공포와 호기심은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순록은 가까이 와요. 위험하다는 걸 알죠. 그래도 그처럼 움직이는 게 뭔지 와서 봐야 하는 거예요.-193쪽

그린란드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물질적 부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결코 부를 추구할 수는 없었다. 아니 진지하게 존중할 수가 없었다. 아니, 목적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225쪽

징징대는 것은 바이러스로,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높아 쉽게 감염되는 질병이다.-251쪽

가장 발달한 문화가 뭔지 결정하려는 의도로 문화를 비교하려 한다면 무엇이 되었든 자기 그림자를 혐오하는 서구 문화를 반영하는 허튼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 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258쪽

행복만큼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 행복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 또한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현재의 나를 만날 수 있을 만큼 강인하기 때문에 나의 유년 시절도 마찬가지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259쪽

탁자 너머로 나는 그의 턱 옆을 어루만지며 삶이 갑자기 우리에게 완벽한 타인과 함께 행복과 희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에 대해서 경탄했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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