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Mr. Know 세계문학 17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구판절판


그의 어머니는 언젠가 그에게 그를 밴 것은 결혼 첫날밤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그는 늘 그 사실에, 자기가 처음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을 꼭 집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려서 여러 해를 두고 그날을 자기의 생일로 은밀히 자축했었다. -17쪽

사물과 그 이름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아서 이름이 사물로부터 분리되고 말았다. 언어는 임의적인 기호의 집합체로 바뀌었고 언어는 신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낙원의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언어의 타락에 관한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54쪽

만일 인간의 타락이 언어의 타락을 수반하기도 한다면, 언어의 타락을 원상 복구함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쓰였을 언어를 재창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타락을 원상복구하고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을까?-58쪽

<이 상품은 농아를 위한 것입니다. 값은 되는 대로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꼬리표 다른 쪽은 <당신의 친구를 위해 수화를 배웁시다>라는 뜻의 수화 알파벳 그림 - 26개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손 모양을 보여주는 - 이었다. -63쪽

하지만 댁도 알다시피, 언어는 변할 수 있는 거요.[...]

우산은 사물일 뿐만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는 물건이오. [...]

어떤 물건이 더 이상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서 변화의 개념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길을 잃게 될 거요.-90-91쪽

"벌써 아는 사이가 된 모양이구나. 대니얼, 이 분은 대니얼 아저씨란다." 그리고 다음에는 퀸을 돌아다보면서 똑같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대니얼, 이 아이는 대니얼입니다."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다 대니얼이네!"
"그렇구나." 퀸이 말했다. "나는 너고 너는 나고."
"그러니까 빙글빙글 도는 거네요!"-119쪽

그는 언제나 보이는 대로의 세계에서, 거기에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즐거움을 얻어 왔다. 또 지금까지는 그것들이 밝은 햇살에 새긴 듯 선명히 부각되어 그 속성을 명확하게, 그처럼 완벽하게 드러냈으므로 그로서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걸음을 멈추고 두 번 다시 쳐다볼 필요가 없었다.-164쪽

고찰이라는 말은 거울, 또는 체경을 뜻하는 라틴어인 speculatus에서 온 말인데, 길 건너편에서 블랙을 염탐하는 일이 블루에게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고, 그래서 자기가 그저 남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165쪽

말이라는 것이 반드시 효과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말 때문에 오히려 실제로 말하려는 내용이 모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169쪽

그 죽은 남자는 아직 젊었다. 지금 그의 아들보다도 더 젊었다. 그리고 블루는 거기에서 뭔가 섬뜩한, 자기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가 들었다는데서 이상야릇하고도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끼고 그 기사를 읽는 동안 실제로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172쪽

작가에게는 자기의 삶이 없다고도 할 수 있어요. 설령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없는 거죠.
또 다른 유령이로군.
맞습니다.-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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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 '바람 구두'를 신은 당신, 카뮈와 지드의 나라로 가자!
김화영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5월
품절


그러나 이름은 바뀌어도 70년 전 카뮈의 글 속에 그려진 광장과 지금의 그것은 분위기에 있어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보인다.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나 학교나 캠퍼스가 자고 깨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나 고층빌딩이 대신 들어서 낯설기만 한 서울의 주민에게는 너무나 놀랍게 여겨지는 공간적 지속성과 정서적 안정감이 아닐 수 없다. -37쪽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결국 승리하는 것은 호모 파베르의 힘이나 이성이 아니라 끈질기게 기다리는 자연의 힘이다. -58쪽

모든 서 있는 것은 무너진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죽고 쓰러진다. 모든 것은 무너짐으로써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온다'.-60쪽

그것이 샐비어든 이름 모를 노란 꽃이든 죽음을 담는 그릇이 땅속에서 땅 위로 나와 햇빛을 받으면 그것은 이미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그릇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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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옥루몽 2 - 대한민국 대표 고전소설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6년 5월
절판


백설 같은 얼굴빛에 붉은 홍조를 살짝 띠어 마치 복숭아꽃이 반쯤 벌어진 듯하니 어린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먼 산 같은 아미(蛾眉)에 가을 물결 같은 눈빛이 아련하여 정기를 짙게 담고 있으니 총명하면서도 지혜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얀 치아에 붉은 입술을 한 최고의 자색이며, 검푸르고 구름 같은 머리카락에 화려한 기상이 서려서 절대로 남쪽 지방 풍토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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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옥루몽 1 - 대한민국 대표 고전소설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이 지어진 19세기는 서구에서는 사실주의가 태동하고 인간의 적나라한 삶 자체가 문학의 현실로 묘사되던 시기였다. 이런 사실에만 익숙해져, 부끄럽게도 우리의 고전문학에는 더더욱 문외한인 내게 같은 시기의 우리 소설『옥루몽』은 차갑고 신선한 우물물을 한 바가지 퍼 마신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의 별이 인간이 되어 지상의 온갖 희노애락을 경험한다는 얼개나,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우리의 삶은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는 설정은 정면에서 현실을 파고드는 서구의 방식과는 달리, 비유로 현실의 장막을 걷어내고 관조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큰 가지는 하늘의 문창성군이 인간으로 화한 양창곡이라는 남성인물의 삶이지만, 압권은 단연코 그가 만나는 곁가지 여성들의 활약상이다. 소설적 인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완벽한 여성성과 남성적 지략으로 양창곡을 돕는 강남홍은 말할 것도 없고, 물에 빠진 그녀를 살리도록 미리 계책을 쓴 윤소저와의 끈끈한 우정은, 벽성선을 시기하는 황소저와 위부인의 암투와 같이 흔히 질투와 계략을 일삼는 여성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긍정적 면모를 드러낸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외국문학 번역서에 길들여져 심지어『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서도 어색했던 내가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잘 읽어낼 수 있을까 약간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한 번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니 감칠맛 나는 문장들은 막힘없이 술술 잘 읽혀나갔다. 열 권, 스무 권이 넘는 무협지를 읽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빠른 줄거리 전개와 산문 문장이지만 묘하게 드러나는 리듬 덕분이 아닌가 싶다. 상황에 따라 한 인물이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려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한 문단이 멀다하고 튀어나오는 중국고사나 성어들 때문에 열심히 주석으로 눈을 돌려야 했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소설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게으른 독서를 방지하는 긍정적 측면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오히려 긴장감을 풀고 가볍게 꿈을 꾸듯 즐길 때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나는 그저 재미없는 나일 뿐이지만 꿈 속에서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소설 속의 강남홍이 되어 중국 땅 전역을 누벼보는 것도 건조한 일상을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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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품절


한 개의 적절한 주어가 얼마나 잠재력을 발휘하는가-9쪽

내 영혼에 마녀가 깃들어 있다는 걸 금방 깨달았어요.-11쪽

책들은 소리 없이 천연덕스럽게 늘어나 집안 곳곳을 점령했고,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종종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제 들춰볼지 알 수도 없는 책을 왜 그리 보관하고 있느냐고. 전에 한 번 읽었을 뿐 지금 내 독서 취향과는 동떨어진,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다시 펼칠 일이 없을 듯한, 아니 어쩌면 영영 읽지 않게 될 책들 말이다. -16쪽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축적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
책을 잃어버리는 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반지나 시계, 우산 따위를 잃는 편이, 다시는 읽지 않더라도 낯익은 제목만으로도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감정을 일깨워주는 책 한 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 -17쪽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책들은 어느 정도라고 분명치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해둔 한계선을 넘어 범람하는 순간에 이른다. 한때 우리의 자존심이었던 것이 이제는 짐이다. 무엇보다도 책을 둘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18쪽

매년 이곳에 들를 때마다 나는 유년기의 책을 들춰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22쪽

여기저기서 사들인 책들은 지금까지도 모두 다 기억할 수 있지요. 서가를 만드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결코 아무 계획 없이 모아놓은 책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 사실은 서가의 주인이 특정한 주제를 선택하고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가장 먼저, 가지고 있지 않은 책들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구하게 되면 그 책에서 다음 책에 대한 지시를 얻습니다. -38쪽

그런데 브라우어는 강박적인 독서가 타입이었습니다.-41쪽

책들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인식번호를 붙여 목록을 작성하는 고달픈 작업...-53쪽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진부한 시스템을 따랐네. 그러느라고 우리 자신의 감정이라는 진정한 질서는 아예 무시되어버렸어...-56쪽

또 우리는 독서의 즐거움을 촛불로 더욱 고상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물론 그때 읽은 책들은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 것들이어야 합니다. -61쪽

그러니까 본문의 모양, 글자의 크기, 좌우상하의 여백, 종이의 질, 양끝이나 가운데에 매겨지는 쪽번호처럼 전체를 이루는 자잘한 모양새들을 어느 누구도 무시해선 안됩니다.-61-62쪽

나는 몇 주 동안 내 연구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방랑자를 상찬하며, 그와 함께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오만한 책들을 향해 기상천외한 조롱을 퍼부었다. 그저 깨끗한 책상에서 간질이는 먼지떨이와 온갖 먼지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의 시중이나 받으며 느긋하게 잠에 취하다가 가끔씩 고자세로 자기 임무나 한 번 행사하는 주제에, 자연의 위력은 고사하고 폭력이 무엇인지, 비록 그 책들 안에 쓰여 있는 얘기일지라도, 꿈에도 알지 못한다고 비웃었다.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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