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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5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평점 :
변방에서나마 그래도 책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사람이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데 대한 죄책감이 늘 마음 저 한 켠에서 나를 괴롭혀왔다. 요즘 일도 없고, 하릴 없이 노는 것도 지친 나머지 다시 독서와 독후감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드디어 실천에 옮긴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는데, 책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배가 살살 아파올 정도로 긴장된다. 결혼하고 이사 세 번에 책장 정리 포기는 좀 빠를 성 싶은데, 어쨌든 마지막 이사하면서 이삿짐 부리는 아저씨들이 꽂아준 대로 아무런 연고 없이 중구난방 이웃하게 된 책들은 여전히 서로가 낯설어하는 눈치다. 결국 책장 정리부터 해야겠다 싶었으나, 일단 가장 많이 보유한 출판사의 책들끼리 꽂아놓는 데 만족했다. 그리고 그냥 스르르 <보물섬>이 내 손에 들어왔다.
독서에도 징크스가 있다면 무슨 소린가 하겠지만 이상하게 해양소설(바다나 배, 항해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은 궁합이 좀 안 맞는다. 이런 책들은 거의 완독을 하지 못했다. 뱃멀미가 나서 그런가, 범선의 각 부분 명칭들이 도통 익숙해지질 않아서 결국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도 약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용케 그 징크스를 이겨내고 순항하다 못해 쾌속을 했으니, 그간 녹슬었던 책 읽기에 기름칠은 제대로 한 셈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프랑켄슈타인>, <보물섬> 등 기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접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어른이 되어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거 진짜 어린이 책 맞아?' 하는 거다. 어린이들이 읽기엔 자못 흉흉하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많은데 <보물섬>도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는 큰아이를 의식하고 고른 책이기도 해서, 간혹 정신이 들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혔다간 질문들이 마구 쏟아질 게 뻔하다.
‘보물섬’이 상징하는 돈과 욕망이란 또 얼마나 추악한 것인가. 추악함을 알면서도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목표를 점점 그곳에 두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결혼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냥 읽고 싶은 책 망설이지 않고 사볼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는 데 그쳤는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사는’ 데 쫓기다보니 돈이 주는 안정감과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점점 더 금전의 늪에 빠지게 되더라.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행히 천신만고 끝에 보물을 손에 넣지만, 솔직히 그것은 피로 물든 돈이다. 더구나 그들은 보물의 원래 주인도 아니다. 자기 게 아닌 걸 가지면서 도덕적 비난도 피해간다? 이것은 이 책의 시대적 한계일 것이지만, 한 편의 흥미진진한 모험소설을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바삭한 겉면에는 분명 흥분과 떨림 속에서 소설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보물섬>의 지도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악다구니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들뜨게 만들어주는 희망과 환상이기 때문이다. 당첨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로또 한 장의 기대감으로 한 주를 살아가듯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보물의 환상은 날선 마음을 무디게 만들고 혼자만의 비밀스런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 책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건, 초반 어느 부분인가를 읽다가 갑자기 네 잎 클로버 더미가 후드드 떨어져 놀란 일이다. 재작년 초여름, 제주의 정방폭포 올레길에서 네 잎 클로버를 거의 3~40개 딴 적이 있었다. 희귀한 네 잎 클로버가 돌아서면 하나씩 튀어나오는 바람에 마치 그것을 따 모으면 진짜 그만큼의 행운이 내 손에 들어오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따 모았다. 집에 와서는 백과사전 갈피마다 한두 개씩 끼워 말려놓고는, 다 마른 것을 아마도 이 책에 끼워놓았던 모양이다. 헌데 평소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기 힘든 네 잎 클로버가 뭉텅이로 쏟아지니 그 김빠진 느낌이란 참...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차고 넘치면 가치가 떨어지고, 간절히 원하던 것도 손에 들어오면 흥미가 떨어지는 욕망의 아이러니랄까. 그런 면에서 내 보물섬의 지도는 분명 진짜 존재하는 것이되, 그 보물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길 바란다면 나 역시 아이러니한 인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