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큰아이가 아더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그리고 나는 책장에서 두 줄로 꽂아둔 칸의 뒷부분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이 책을 다시 소환했다. 다시 읽어도 '참 좋다'라는 탄성이 나왔다. 2005년에 나왔으니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전혀 빛바래지 않는 책이다.
그리고 <데미안> 이후 가장 멋진 서문도 볼 수 있다.
인간 존재들이, 다른 문화, 때로는 정반대로 충돌하는 논리,
다른 피부 빛깔, 역사적 불화에도 불구하고,
인류란 하나이며 분할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존재와 사물들을
경계 없는 형제애 안에서 이어주는
보편적 사랑의 부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아발론 연대기> 1권은 처음에 '아더왕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다가, 2권까지 나온 뒤 <아발론 연대기>로 멋지게 타이틀을 바꾸어 출간된 걸로 기억이 난다. 수많은 인,지명을 나름대로 정리해가며 읽느라 여러 군데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데, 바로 전 장에서 읽었던 인물 이름도 가물가물하니 이 몹쓸 기억력을 어이할꼬.
1권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자면 멀린의 탄생과 아더왕의 출현이겠다. 멀린은 인간이나 인간이 아니며, 악마이나 악마가 아닌 중간계의 존재다. 멀린의 아비는 악마일지 모르나, 그 어미는 한없이 순수한 인간이며 그의 누이와 아내 역시 비슷한 속성을 지님으로써 멀린의 악마성을 계속해서 정화시키고 있다. 그는 인간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지혜를 지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약점과 본분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자신이 왜 이런 존재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오묘한 신의 뜻은 무엇인지, 신의 도구로서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으며 단 한순간도 흔들림이 없다.
이 책은 부록이 부록이 아닌 듯하다. 줄을 안 칠 문장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신화에 대한 해박하고 핵심적인 해설이 읽는 내내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 신화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느껴진다고 할까. 특히 김정란 선생님의 해제는 원래 시인이셔서 그런지 시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 이분께 글쓰는 법을 배워보고픈 소망이 생길 정도로 유려하다. 김정란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이 정신없는 연대기가 이렇게 술술 읽히지는 못했을 거다. 10년이 넘은 책인데 전혀 낡은 느낌이 없다. 그냥 어제 출간된 책을 읽는 듯한 신선함이 느껴진다.
무협지는 어쩐지 늘 1권을 넘지 못하는데, 사람마다 궁합이 맞는 책이 있기는 한가 보다. 이 책을 구입했을 당시 3권인가 4권까지 읽고 말았는데, 올해는 종횡무진 세상을 누비는 켈트 신화와 함께 용감하게 살 수 있기를. 나는 인디언 이름으로 '용감한 불꽃의 왕'이니 말이다.
"...게다가 악은 무엇이고 선은 무엇인가? 우리는 때로 선을 위해 행동하지만 결과는 악이 되기도 하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악한 것처럼 여겨지는 행동을 해야 할 때도 있지. 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왜냐하면 나는 악령에 의해 잉태되었으니까. 만일 신께서 나를 근원에서 뽑아내지 않으셨다면, 나는 땅 전체에 죽음과 한탄을 뿌리고 돌아다녔을 것이네."
"... 탈리에신, 우리는 죽음에 대항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네. 죽음이란 생명이라는 긴 여행에서 잠깐 들르는 곳에 불과하기 때문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