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표지가 검은 바탕이었을 때 양장본으로 구입했던 책을 참 오래도 묵혔다. 그리고 어느 핸가 이 책의 페이퍼백이 사은품(?)으로 딸려와 책장에는 이 책이 두 권 있다. 
어떤 책이 양장본과 페이퍼백 두 종류로 나와 있을 땐 단연코 페이퍼백을 고르게 된다. 가볍기도 하고 손에 잘 들리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은 술술 읽히고 마음에 메다꽂지 않는 구절을 찾기 힘들 정도였는데, 어쩐지 이 책만은 예외였던 것 같다. 다행히 올해에는 이 책과 잠시 소홀했던 인연이 다시 닿았는지 이제 중반을 넘어 후반을 향해 가는 중이다.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국적인' 세계의 안내자인 플로베르다. 과거 19세기 소설 시간에 배웠고 작품도 읽었지만, 난 정말 플로베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구나.. 그가 평생 이집트를 동경했고, 그곳에 직접 방문했으며, 콧수염의 아버지 '아부 차나브'라는 이름을 가졌었다는 것. 프랑스를 경멸했고 부르주아를 혐오했으며, 사춘기 이후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는 것. 플로베르는 자신이 실은 여자이며, 낙타이고, 곰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역시 책장에서 이제나 저제나 내 손길을 기다리는 <통상관념사전>이 저열한 부르주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음도 부끄럽지만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은 늘 그 깔끔한 목차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일상적인 주제에 문학과 철학을 잘 버무리는 재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이사를 이유로 새로운 책을 많이 들이지 못하고 있어, 지금 책장에 있는 책들은 어느새 연수가 10년을 넘겨가고 있다. 그래도 책장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는 책들. 어쩐지 기쁘고 고마운 마음이다.  

아. 그렇지만 알랭 드 보통 책의 흑백 도판들은 정말 곤란하다...  



사실 목적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욕망은 떠나는 것이었다. 그가 결론을 내린 대로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로라도 떠나는 것.

"너희는 언제 행복을 향해 돛을 올릴 것이냐?"

어떤 장소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사랑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사랑할 때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는 빠져 있는 가치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거의 환멸을 느끼지 않았다네. 환상이 없었기 때문이지.."

외로웠다. 그러나 부드러운, 심지어 유쾌하다고 할 만한 외로움이었다. 웃음소리와 동료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외로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외로움은 모두가 나그네인 곳,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사랑을 향한 좌절된 갈망이 건축과 조명에 의해 인정을 받고 또 잔인하게 기념되는 곳.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줄을 그을 수 있다. 우리 경험에서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넓은 영역 위를 날아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일 속에서는 이르지 못했던 높이로부터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일을 할 때 우리는 주의의 낯선 세계로부터 은근한 도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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