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Mr. Know 세계문학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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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번 '향수'에 이어 미용실에서 머리하면서 읽으려고 산 두 번째 책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날 좀 읽어주세요! 날 좀 읽어주세요'하며 끊임없이 유혹하는 책들이 있는데, 튕기는게 연애의 맛이라 했던가, 몇 번의 신경전과 실랑이 끝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1903년부터 구상한 소설은 1908년에 완성되었고,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1985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때 영화를 봤다. 그리곤 무조건 좋았었다. 책을 다시 읽어보니 줄거리가 영 새롭게 느껴지는데, 이렇게 아련한 이미지만 어렴풋이 남은 것은 배경에 잔잔히 흐르던 푸치니 오페라 '잔니스키키'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가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당시 언니와 나는 줄리안 샌즈(조지 에머슨 역)의 그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 고운 금발머리에 열광했는데, 책 속에서 조지는 검은 머리였다. 그렇지만 실망스럽지는 않다. 피렌체에서 만난 염세적이고 낭만적인 청년 조지에겐 금발보다는 검은 머리가 오히려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너무도 청순했던 헬레나 본햄 카터(루시 허니처치 역)가 늙은 마녀(!)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흠뻑 느끼게 해준다. 팀버튼의 '혹성탈출'에서 그녀의 눈매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빅피쉬'에서는 역시 괴기스러웠다. 새로운 캐릭터를 굳혀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강렬한 조연이었다. 그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몸가짐. 남들 다 즐겁게 노는 테니스장에서 우아한척 책을 읽던 세실 바이스를 너무도 잘 살려냈다. 

이런 경우 영화와 원작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장면들이 글자들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소설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장면으로 구성된다. 책을 읽다보면 으레 그렇긴 하지만, 이 소설은 활자의 이미지화가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조지를 처음 만난 프레디가 비브 목사와 함께 루시의 '신성한 연못'에서 목욕하는 장면과  조지와의 두 번의 키스와 세실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 장면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특유의 영국적 수다스러움과 호들갑을 통해 드러나는 반면 조지 에머슨은 극도로 말이 없다. 그것은 그가 루시를 만나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뱉은 말들은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잘 소통되지 않는 독백같다. 그렇지만 그는 루시를 만남으로써 '다시 살고 싶음'을 느낀다. 어린 시절 루시가 동생 프레디와 함께 몸을 담그고 장난을 쳤던 '신성한 연못'에서 소년처럼 천진하게 물장난을 치는 조지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갇혀 있었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한 '어둑어둑한 숲을 등지고 서서' 비로소 밝은 얼굴로 루시에게 인사한다. 분명 어딘가에 루시의 어린시절 체취가 남아 있고, 이 암울한 청년이 생의 에너지를 되찾는 연못은 바로 '젊음의 성배'이다.

"그날의 연못은 식은 피와 느슨해진 의지를 일깨운 외침이 되었다. 그것은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 축복이었고, 성스러움, 마법, 그리고 젊음을 위한 찰나의 성배(聖杯)였다."(164쪽)

이 소설에서 루시를 사랑하는 두 남자 조지와 세실은 극도로 대조적이다. 세실은 '중세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보호자와 피호자로 이루어지는 봉건적 관계가 전부였다."(189쪽) 세실은 모든 인간을 내려다보며 경멸하고, 루시에게 있어 자신은 항상 보호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루시는 항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9장의 제목은 '예술 작품 루시'인데, 여기서 예술 작품이란 말은 긍정적 의미보다는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la nature morte'이라는 뜻의 정물화에 가깝다. 그에게 루시는 부대끼며 느껴야 할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두껍고 값비싼 액자 속에 가두어놓고 먼발치서 눈과 입으로만 이렇다 저렇다 감상하는 박제된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세실이 어찌 감히 쉽게 키스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루시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신에게 키스하지 못했습니다."
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그의 표현이 섬세함과 거리가 멀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그보다도..."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부탁해요... 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세실. 진작 했어도 좋았을 거예요. 내가 먼저 나설 수는 없잖아요."
이 지고의 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어색함뿐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부적절했다. 그녀는 몹시 의무적인 태도로 베일을 들어올렸다. 그녀에게 다가갈 때 그에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금테 코안경이 떨어져서 두 사람 사이에 납작하게 끼였다.
포옹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실패한 포옹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134쪽)

예술적 섬세함과 감성을 그토록 중시하던 세실은 루시와의 첫키스를 너무도 김빠지고 밋밋하게 해버린다. 그는 구구절절 너무 말이 많고 불필요하게 예의바르다. 이런 남자와는 '생활'은 그럭저럭 함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랑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스터는 이 구제불능인 세실을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비록 루시와의 사랑은 이룰 수 없었지만 - 그가 진실로 루시를 사랑했을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 바로 루시를 잃어버린 그 순간에나마 그는 깨닫게 된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을. [...] 잔인한 아이러니였지만, 그녀는 관계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에게서 최상의 것들을 이끌어내고 있었다."(210-211쪽)

그에 비해 우리의 과묵한 조지는 충동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가 루시에게 한 키스는 두번 다 자신의 열정을 이기지 못한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루시에게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던 진실은 루시의 몸과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는다.

"그때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그녀는 덤불숲 밖으로 떨어졌다. 빛과 아름다움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넓은 하늘 아래 끝에서 끝까지 온통 제비꽃으로 뒤덮인 작은 단구였다. [...]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86쪽)

피렌체의 제비꽃밭에서의 첫 번째 키스에 이어, 루시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이웃에 이사온 조지 에머슨이 테니스를 치러 루시의 집으로 놀러왔다가 그들은 두 번째 키스를 하게 된다.

그녀가 앞장서자 세실이 그 뒤를 따르고, 조지가 맨 뒤에서 정원 길을 올라갔다. 그녀는 참사를 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사는 그들이 덤불 속에 들어갔을 때 일어났다. 엘리너 래비시의 책은 아직 의도한 장난이 모두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듯, 사람들에게서 잊혀 뒤에 남았다가 세실이 책을 찾으러 돌아가게끔 일을 꾸몄다. 그런 뒤 좁은 길에 들어서자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조지가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안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두 번째로 키스를 당했다. (197쪽)

이 두 장면은 모두 6장과 15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두 번의 도둑키스 뒤에 포스터는 그에 대한 설명이나 두 인물의 감정 교환 등을 생략하고 급속히 장면을 전환함으로써 키스를 당한 루시처럼 독자들 또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번개처럼 순식간에 빛을 발하고 곧 사라지지만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고, 천둥이 번개에 이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울리듯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린다. 조지는 말보다는 열정 가득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열정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의범절이라든가 심사숙고라든가 그 밖에 교양이라는 이름의 각종 족쇄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행권이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134쪽)

루시는 예의범절의 노예인 세실을 경멸하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조지의 열정이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같은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에 이끌리는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조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일관 좀 이상한 노인으로 오해를 받아왔던 에머슨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들키고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정말로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인가보다. 거기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샬럿 바틀릿은 조지와 루시의 사랑에 있어 그 꼭지점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진정한 의도가 숨겨진 그 미스테리한 개입들은 정말 이들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 보이지 않는 힘이었을까? 샬럿 바틀릿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반전의 묘미랄까, 아무튼 이 소설에서 예상치 못했던 복병같은 존재다. 

사랑과 진실. 너무도 많이 우려먹어서 진부하다고조차 할 수 없는 저 단어들이 결국 이 소설을 꿰뚫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도처에 있지만 누구도 정답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저 두 가지 사실로 돌아오게 되나보다. 성향에 따라 사랑과 진실은 우울하게도 발랄하게도 그려질 수 있고, 그 누구라도 자기 맘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유쾌하고 가볍게 그려진 사랑과 진실을 대할 때 나 역시 조지처럼 '다시 살고픈 욕망을 느낀다'. 비록 생명력이 짧은 열정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진실이 담겨있고, 세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망은 군중이다. 나무와 집들과 언덕의 군중이다. 이것들은 사람의 군중이 그렇듯이 서로를 닮게 된다. 그리고 바로 똑같은 연유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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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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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비운 사이 택배기사가 다녀갔나보다. 연락도 없이 좁다란 우편물함에 억지로 넣은 흔적이 역력한 누런 종이봉투만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쪽지만 덜렁 남겨두고 가버린 뒤의 쓸쓸함. 혹시라도 봉투 속 책에 흠이라도 났을까 이리저리 살펴본다. 다행히 책은 아주 멀쩡하다.

우선 책날개를 훑고 'from writer'를 살짝 건너뛴 뒤 contents로 넘어갔다. 인터뷰이들의 사진을 곁들인 목차를 펼치는 순간 뭔가가 목구멍으로 확 치미는 통에 소름이 돋고 울컥했다. 뭐냐 대체, 이 느낌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결심했을 때의 그 막막하고 설렜던 느낌일까, 또다시 떠나고 싶은 욕망일까, 지금 나의 불안감 때문일까, 이 여행자들의 용기에 대한 부러움일까.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바탕에는 '여행에 대한 에너지, 저마다 가득한 사연을 안고 있을 여행자들을 보며 느끼는 마음 찡한 그 무엇'이 분명 존재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내 자신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자꾸만 목이 멨다.

나를 가장 감동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미소였다. 햇볕에 그을리고 화장기 없는 그들의 얼굴에는 정말 순수하고, 만족감이 흘러넘치는 미소가 있었다. 가짜가 아닌 웃음, 자신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삶에 대한 긍정을 읽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여행을 통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부정적인 찌거기들을 비워낸 가볍고도 맑은 웃음 말이다. 특히 자메이카에서 온 트레이시아의 이야기와 조촐한 세면도구 사진(265쪽)은 여행이란 바로 그렇게 '무소유'를 배워가는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유와 재산의 개념이 정착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무소유는 여행자와 유목민의 생활방식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책 속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한다면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고 양극화는 잦아들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하는 자는 평화주의자이지만, 이 책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도발적이다. 최근에 본 이병률의 '끌림'은 잔잔하고 일기같은 여행기였는데, 이 책은 환경운동가나 노동운동가의 외침처럼 독자를 마구 선동하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이 책을 덮고 문득 얼마전에 가입한 연금보험 생각이 났다. 여행이야말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삶의 지반이 되어줄 보험같은 게 아닐까하고. 20년 후 그 돈은 삶에 물론 보탬이 되긴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정말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안주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여행이 내 삶을 전적으로 바꾸어줄 거라고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분명 그것이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며 그런 의구심과 두려움을 버리라고 심하게 나를 유혹한다. 

이 책을 읽고 한 번 떠나볼까하는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는 서울 시내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에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 문제는 언제 떠나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겐 아주 '위험한 책'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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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10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리뷰네요^^ 서평단에 뽑히셨던가요? 전 탈락 ㅠㅠ
떠나고 싶은데 그게 언제일런지.. 위험한 책으로~~

부엉이 2006-07-1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 요즘 통장 잔고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

2006-07-11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7-1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에서 적어도 한번은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해요, 그 기회를 잡아야지요 ㅎㅎ !
 
안녕 뉴욕 - 영화와 함께한 뉴욕에서의 408일
백은하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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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원제 : Kissing Jessica Stein)'에 삽입된 엘라 피츠제랄드의 '맨해튼'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려고 신청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는다. 꿩대신 닭이라고 스티브 티렐이 부르는 맨해튼을 들어봤는데, 나쁘지 않다. 엘라보다 질퍽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맨해튼의 어딘가를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싶게 만든다. '뉴욕 삼부작'을 읽고 있으려니, 솔직히 소설 속 뉴욕은 그야말로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 배경이고, 또 별로 가고싶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이 얼마나 지독한지 한번 가서 느껴보고 싶다.

이 책은 비싼 공연표를 공짜로 준 친구에게, 표값의 반의 반도 못미치지만 성의표시나마 하려고 선물하려던 책인데, 주기 전에 슬쩍 훑어 본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끝장을 보고 말았다. 접힌 자국, 넘긴 흔적 없이 본다고 애쓰긴 했는데, 어딘가 내 지문이라도 남아있을까 마음이 쓰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첫 발을 내디딜 누군가가 정해져 있는 그 눈을 몰래 밟아버린 머쓱함이랄까. 이렇게 된 건 이 책이 재미있고, 쉽게 읽히고, 매력적인 탓이다.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뉴요커의 사랑'이라는 그냥 그런 영화를 보다가 도대체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정말로 세어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 뒀는데 내가 그렇게 게으름을 피운 사이 백은하 같은 발빠른 주자는 이런 멋진 책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나는 저자의 영화에 대한 사랑도 느끼지만, 뉴요커가 아닌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으로서 뉴욕에 대해 느끼는 애정, 혹은 일말의 동경심이 짙게 느껴진다. 어쩌면 나 자신의 동경심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겠고. 뉴욕이나 파리 같은, 마치 모든 영화나 소설은 그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 같은 도시나 명소들은, 그 자체의 독특한 색채도 색채지만 그보다는 소위 뉴요커나 파리지엥들과 같은 도시민들이 그들 도시에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 각별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관광객들에게는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뉴욕 같은 곳은 어쩌면 너무나 많은 이방인들이 정착해서, 낯설고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 이것은 긍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활기'로 탈바꿈한다 - 바로 그것이 도시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영화 속 장소들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때로는 다리품을 팔아 짚어나가는 걸 보면서, 그 도시의 주민이 아니거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호들갑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보다는 그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온갖 불편함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도시의' 투박함과 거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별난 것으로 만드는 이 묘한 기운 때문에 작가, 영화쟁이,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가 보다.

우리의 서울도 분명 그런 맛이 넘치는 곳인데, 그곳에 사는 우리 서울시민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도 그만큼 넘칠까. 서울을 배경으로, 그 배경이 주인공인 영화나 소설이 나와서 꼭 그곳에 가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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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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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복잡하기 그지없고 평신도의 수준에서는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논쟁의 논리라 하더라도 개개인의 '믿음'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교적 믿음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 을 믿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규명하려는 자체가 모순적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약간의 진동을 경험하고, 내 안에서 신앙과 종교를 분리시키려는 의식적 행위를 하게 된다. 나는 분명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절망에서 끌어내며 타인들의 삶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신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내게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하느님이며, 인간으로 태어나 죽고 '부활'한 예수이다.

그런데 역사가 얘기하는 종교는 너무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단'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보편'의 종교 '가톨릭'의 모순이 아닐까. 그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붙일 수 없고, 종교라는 이름도 부적합한 피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란 생각이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의 창조주는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악마이며 인간의 정신은 육체(물질세계에 속한)에 갇혀있다는 그노시스파의 이원론 신화는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노시스파는 가톨릭의 폭력적 탄압을, 그들의 신이 악마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로 삼았고, 저자들의 논거에 따르면 그들이 탄압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은 예수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 논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마치 신이 선악과-인간을 앎의 세계로 이끄는-를 따먹은 인간을 벌하듯, "신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그노시스를 얻은 자들을 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 지식에 대한 탐구는 계속 이어졌고, 메디치 가문의 플라톤과 이집트 고전 연구가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었다는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파르미자니노와 같은 예술가들이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나 헤르메스 사상과 관련하여 소설화되는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가르는 이원론 사상을 통해 그노시스파와 헤르메스 사상이 연결되고, 이는 또 천국의 원형을 본따 지상의 신전을 건설하여 악의 허울에 갇힌 인간의 정신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고대 이집트의 사상과 만난다. 우주의 질서에 따르는 도시를 건설하는 신성한 임무는 표면적으로 석공, 건축가 조합으로 알려진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스런 입문단체와 연결되어 탤리즈먼의 도시를 탄생시킨다. 파리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라는 사실과, 콩코르드 광장에 서있는 오벨리스크를 보며 의아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도시 건설에 숨겨진 비밀들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책의 서두에서 프랑스 혁명의 숨겨진 목적이 탈기독교화에 있었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인데, 결론적으로 이단이란 무자비한 배타주의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종교라는 탈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단이라는 말이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으로 정의될 때 거기에는 힘의 논리가 개입된다. 즉 누가 이단이 될 것인가는 힘을 가진자에 의해서 수없이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가 헤르메스와, 성모 마리아가 고대의 여신들과 동일시되는 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주의 신은 진짜로 하나이거나, 하나이면서 여럿인 모순적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단을 논하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비교적 상세한 문헌 연구의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사실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문제로 남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련 서적들, 비슷한 주제들을 다룬 소설들을 읽는데는 좋은 참고서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그동안 미뤄둔 크리스티앙 자크의 『프리메이슨』을 읽어봐야겠고, 앨리슨 쿠더트의『연금술 이야기』와,  이단논쟁도 볼거리였던『장미의 이름』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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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옥루몽 1 - 대한민국 대표 고전소설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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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이 지어진 19세기는 서구에서는 사실주의가 태동하고 인간의 적나라한 삶 자체가 문학의 현실로 묘사되던 시기였다. 이런 사실에만 익숙해져, 부끄럽게도 우리의 고전문학에는 더더욱 문외한인 내게 같은 시기의 우리 소설『옥루몽』은 차갑고 신선한 우물물을 한 바가지 퍼 마신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의 별이 인간이 되어 지상의 온갖 희노애락을 경험한다는 얼개나,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우리의 삶은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는 설정은 정면에서 현실을 파고드는 서구의 방식과는 달리, 비유로 현실의 장막을 걷어내고 관조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큰 가지는 하늘의 문창성군이 인간으로 화한 양창곡이라는 남성인물의 삶이지만, 압권은 단연코 그가 만나는 곁가지 여성들의 활약상이다. 소설적 인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완벽한 여성성과 남성적 지략으로 양창곡을 돕는 강남홍은 말할 것도 없고, 물에 빠진 그녀를 살리도록 미리 계책을 쓴 윤소저와의 끈끈한 우정은, 벽성선을 시기하는 황소저와 위부인의 암투와 같이 흔히 질투와 계략을 일삼는 여성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긍정적 면모를 드러낸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외국문학 번역서에 길들여져 심지어『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서도 어색했던 내가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잘 읽어낼 수 있을까 약간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한 번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니 감칠맛 나는 문장들은 막힘없이 술술 잘 읽혀나갔다. 열 권, 스무 권이 넘는 무협지를 읽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빠른 줄거리 전개와 산문 문장이지만 묘하게 드러나는 리듬 덕분이 아닌가 싶다. 상황에 따라 한 인물이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려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한 문단이 멀다하고 튀어나오는 중국고사나 성어들 때문에 열심히 주석으로 눈을 돌려야 했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소설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게으른 독서를 방지하는 긍정적 측면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오히려 긴장감을 풀고 가볍게 꿈을 꾸듯 즐길 때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나는 그저 재미없는 나일 뿐이지만 꿈 속에서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소설 속의 강남홍이 되어 중국 땅 전역을 누벼보는 것도 건조한 일상을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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