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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ㅣ Mr. Know 세계문학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지난번 '향수'에 이어 미용실에서 머리하면서 읽으려고 산 두 번째 책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날 좀 읽어주세요! 날 좀 읽어주세요'하며 끊임없이 유혹하는 책들이 있는데, 튕기는게 연애의 맛이라 했던가, 몇 번의 신경전과 실랑이 끝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1903년부터 구상한 소설은 1908년에 완성되었고,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1985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때 영화를 봤다. 그리곤 무조건 좋았었다. 책을 다시 읽어보니 줄거리가 영 새롭게 느껴지는데, 이렇게 아련한 이미지만 어렴풋이 남은 것은 배경에 잔잔히 흐르던 푸치니 오페라 '잔니스키키'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가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당시 언니와 나는 줄리안 샌즈(조지 에머슨 역)의 그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 고운 금발머리에 열광했는데, 책 속에서 조지는 검은 머리였다. 그렇지만 실망스럽지는 않다. 피렌체에서 만난 염세적이고 낭만적인 청년 조지에겐 금발보다는 검은 머리가 오히려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너무도 청순했던 헬레나 본햄 카터(루시 허니처치 역)가 늙은 마녀(!)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흠뻑 느끼게 해준다. 팀버튼의 '혹성탈출'에서 그녀의 눈매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빅피쉬'에서는 역시 괴기스러웠다. 새로운 캐릭터를 굳혀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강렬한 조연이었다. 그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몸가짐. 남들 다 즐겁게 노는 테니스장에서 우아한척 책을 읽던 세실 바이스를 너무도 잘 살려냈다.
이런 경우 영화와 원작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장면들이 글자들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소설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장면으로 구성된다. 책을 읽다보면 으레 그렇긴 하지만, 이 소설은 활자의 이미지화가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조지를 처음 만난 프레디가 비브 목사와 함께 루시의 '신성한 연못'에서 목욕하는 장면과 조지와의 두 번의 키스와 세실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 장면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특유의 영국적 수다스러움과 호들갑을 통해 드러나는 반면 조지 에머슨은 극도로 말이 없다. 그것은 그가 루시를 만나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뱉은 말들은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잘 소통되지 않는 독백같다. 그렇지만 그는 루시를 만남으로써 '다시 살고 싶음'을 느낀다. 어린 시절 루시가 동생 프레디와 함께 몸을 담그고 장난을 쳤던 '신성한 연못'에서 소년처럼 천진하게 물장난을 치는 조지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기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갇혀 있었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한 '어둑어둑한 숲을 등지고 서서' 비로소 밝은 얼굴로 루시에게 인사한다. 분명 어딘가에 루시의 어린시절 체취가 남아 있고, 이 암울한 청년이 생의 에너지를 되찾는 연못은 바로 '젊음의 성배'이다.
"그날의 연못은 식은 피와 느슨해진 의지를 일깨운 외침이 되었다. 그것은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 축복이었고, 성스러움, 마법, 그리고 젊음을 위한 찰나의 성배(聖杯)였다."(164쪽)
이 소설에서 루시를 사랑하는 두 남자 조지와 세실은 극도로 대조적이다. 세실은 '중세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보호자와 피호자로 이루어지는 봉건적 관계가 전부였다."(189쪽) 세실은 모든 인간을 내려다보며 경멸하고, 루시에게 있어 자신은 항상 보호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루시는 항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9장의 제목은 '예술 작품 루시'인데, 여기서 예술 작품이란 말은 긍정적 의미보다는 프랑스어로 '죽은 자연la nature morte'이라는 뜻의 정물화에 가깝다. 그에게 루시는 부대끼며 느껴야 할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두껍고 값비싼 액자 속에 가두어놓고 먼발치서 눈과 입으로만 이렇다 저렇다 감상하는 박제된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세실이 어찌 감히 쉽게 키스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루시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신에게 키스하지 못했습니다."
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은 그의 표현이 섬세함과 거리가 멀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그보다도..."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부탁해요... 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세실. 진작 했어도 좋았을 거예요. 내가 먼저 나설 수는 없잖아요."
이 지고의 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어색함뿐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부적절했다. 그녀는 몹시 의무적인 태도로 베일을 들어올렸다. 그녀에게 다가갈 때 그에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금테 코안경이 떨어져서 두 사람 사이에 납작하게 끼였다.
포옹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실패한 포옹이라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134쪽)
예술적 섬세함과 감성을 그토록 중시하던 세실은 루시와의 첫키스를 너무도 김빠지고 밋밋하게 해버린다. 그는 구구절절 너무 말이 많고 불필요하게 예의바르다. 이런 남자와는 '생활'은 그럭저럭 함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랑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스터는 이 구제불능인 세실을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비록 루시와의 사랑은 이룰 수 없었지만 - 그가 진실로 루시를 사랑했을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 바로 루시를 잃어버린 그 순간에나마 그는 깨닫게 된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그녀 자신을. [...] 잔인한 아이러니였지만, 그녀는 관계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에게서 최상의 것들을 이끌어내고 있었다."(210-211쪽)
그에 비해 우리의 과묵한 조지는 충동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가 루시에게 한 키스는 두번 다 자신의 열정을 이기지 못한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루시에게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던 진실은 루시의 몸과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는다.
"그때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그녀는 덤불숲 밖으로 떨어졌다. 빛과 아름다움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넓은 하늘 아래 끝에서 끝까지 온통 제비꽃으로 뒤덮인 작은 단구였다. [...]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86쪽)
피렌체의 제비꽃밭에서의 첫 번째 키스에 이어, 루시가 영국으로 돌아오고, 이웃에 이사온 조지 에머슨이 테니스를 치러 루시의 집으로 놀러왔다가 그들은 두 번째 키스를 하게 된다.
그녀가 앞장서자 세실이 그 뒤를 따르고, 조지가 맨 뒤에서 정원 길을 올라갔다. 그녀는 참사를 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사는 그들이 덤불 속에 들어갔을 때 일어났다. 엘리너 래비시의 책은 아직 의도한 장난이 모두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듯, 사람들에게서 잊혀 뒤에 남았다가 세실이 책을 찾으러 돌아가게끔 일을 꾸몄다. 그런 뒤 좁은 길에 들어서자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조지가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안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두 번째로 키스를 당했다. (197쪽)
이 두 장면은 모두 6장과 15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두 번의 도둑키스 뒤에 포스터는 그에 대한 설명이나 두 인물의 감정 교환 등을 생략하고 급속히 장면을 전환함으로써 키스를 당한 루시처럼 독자들 또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번개처럼 순식간에 빛을 발하고 곧 사라지지만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고, 천둥이 번개에 이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울리듯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린다. 조지는 말보다는 열정 가득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열정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의범절이라든가 심사숙고라든가 그 밖에 교양이라는 이름의 각종 족쇄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행권이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134쪽)
루시는 예의범절의 노예인 세실을 경멸하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조지의 열정이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같은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에 이끌리는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조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일관 좀 이상한 노인으로 오해를 받아왔던 에머슨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들키고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정말로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인가보다. 거기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샬럿 바틀릿은 조지와 루시의 사랑에 있어 그 꼭지점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진정한 의도가 숨겨진 그 미스테리한 개입들은 정말 이들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 보이지 않는 힘이었을까? 샬럿 바틀릿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반전의 묘미랄까, 아무튼 이 소설에서 예상치 못했던 복병같은 존재다.
사랑과 진실. 너무도 많이 우려먹어서 진부하다고조차 할 수 없는 저 단어들이 결국 이 소설을 꿰뚫는 주제가 아닐까 한다. 도처에 있지만 누구도 정답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저 두 가지 사실로 돌아오게 되나보다. 성향에 따라 사랑과 진실은 우울하게도 발랄하게도 그려질 수 있고, 그 누구라도 자기 맘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유쾌하고 가볍게 그려진 사랑과 진실을 대할 때 나 역시 조지처럼 '다시 살고픈 욕망을 느낀다'. 비록 생명력이 짧은 열정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진실이 담겨있고, 세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망은 군중이다. 나무와 집들과 언덕의 군중이다. 이것들은 사람의 군중이 그렇듯이 서로를 닮게 된다. 그리고 바로 똑같은 연유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다." (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