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로쟈의 문학 읽기 2012-2020
이현우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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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책에 빠져 죽지 않기(로쟈의 책읽기 2012-2018), 교유서가, 2018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책을 사랑한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왼쪽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려놓고 계단을 올라가듯 머릿속의 각인된 악보를 짚어가듯, 책의 문을 두드리고, 활자로 가득찬 아무도 없는 집을 방문하는 일, 그러므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



책과 독서를 추종하거나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강가에서 주워온 작은 조약돌을 생각의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보는 일, 보드랍게 나의 체온을 내가 느끼게 해주는 그 촉감. 나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약한 '디지로그'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다.


유명 '서평꾼' 로쟈의 책은 '비독서'를 위해서 선택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서평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책을 안 읽어도 그 책의 메시지를 알게 하거나, 책을 읽은 척 하게 하거나, 그 책을 읽지 않도록 판단하게끔 하는 것. 이 서평집을 읽으면서 독서의 편식으로 인해 소흘했던 고전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여러 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성일의 "한 권의 책"과 "책으로 만난 사상가들"을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2012-2108년 기간의 여러 매체에 실은 비문학의 서평을 분야별로 담았는데,2016-2018년의 비교적 신간에 대한 서평은 드물고 주로 2010년대 초반의 책들이 많다. 최근에 출간된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와 짝을 이룬다.



로쟈의 서평집은 독자들에게는 험난한 책의 바다에서 독서의 방향을 잡아주는 종이로 만든 덫이다.




-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일종의 광기이고 도박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울 첼란의 시구를 제목으로 가져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책과 혁명’이라고 했지만 둘은 접속과 ‘과’ 보다는 ‘또는’을 통해 만난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에 관한 책’이나 ‘책’을 통한 혁명이 아니라 ‘혁명으로서의 책’ 또는 ‘책이 된 혁명’이기 때문이다. 33쪽 (···) 특히 그가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혁명, 12세기 해석자 혁명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그는 “과거의 혁명이 아무리 피로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3쪽


- 서평은 어떤 책을 한번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자료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즉 비평이 재독의 권유라면 서평은 일독의 제안이다. 90쪽

- 서평의 기능은 이런 필요에 의해 도출된다. 어떤 책을 읽고 싶게 하거나, 읽은 척하게 하거나, 안 읽어도 되게 해주는 것이다. 91쪽

- 읽은 척하게 해주는 용도라면 몇 가지 요건은 생각해볼 수 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서평자가 책을 제대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서평의 몫은 그것을 다른 독자에게 요렁껏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책이 어떤 주제의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다루고 있으며, 주요한 메시지는 무엇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또 무엇인가를 짚어주어야 한다. 92쪽


- 올바름이란 무엇인가(국가·정체(政體),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5)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올바람에 대한 정의다. (···) 특이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취한 절차다. 올바름에는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 두 가지가 있을 터인데, (···)

그런데도 먼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따라가면 그는 국가를 구성 (177쪽)하는 세 계층이 각자의 역할과 직분에 충실할 때 국가가 올바른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생산자와 전사, 통치지가 그 세 계층이며 절제와 용기, 지혜가 그들이 가져야 할 각각의 미덕이다. (···) 국가의 올바름이 그렇게 가능하다면 개인의 경우는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혼 또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욕구와 격정, 이성이 그 세 부분이며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대응한다. (···) 결국 올바름은 훌륭한 상태로서 혼의 건강을 뜻하며 올바르지 못함은 나쁜 상태로서 혼의 질병을 가리킨다. 178쪽


- 철인통치론이 남녀평등론이나 처자공유론보다도 더 파격적인 주장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180쪽


- 신들은 어떻게 죽었나(‘니체와 철학’, 질 들뢰즈 지음, 민음사, 2012)

이 복수주의가 들뢰즈가 강조하는 니체 철학의 본질이다. 더 나아가 그는 복수주의가 철학의 고유한 사유방식이자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모든 사건과 현상, 말과 사유는 다수의 의미를 갖는다. 185쪽


- 바우만에게서 배우는 희망(‘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궁리, 2014)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라고 해보자. (···) 그렇지만 바우만은 그런 상상보다 더 중요하면서도 힘든 일은 누가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다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 때문이라고 바우만은 말한다. 그의 예리한 통찰에 따르면 권력이란 ‘뭔가를 행하는 능력’이고, 정치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흔히 이 둘은 결합되어 있었지만 세계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따로 분리되었다. 권력은 초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공간으로 확산된 반면에 정치는 지역적 경(205쪽)계 안에 머물게 되면서부터다. 206쪽


- 정치적 진보주의와 지능의 역설(지능의 사생활, 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2)

“지능이 높은 개인들은 진화가 우리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선호와 가치관을 갖고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 349쪽

지능의 역설에 따르면 이런 경우 지능이 높은 개인과 집단이 반대 경우보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와 수용력이 더 크다. 달리 말하면 인구의 평균 지능이 높을수록 그 정부는 더 민주적이다.

정치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도 지능의 역설은 적용된다. “유전자적으로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들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진보주의를 정의한다면 이것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 351쪽


- 국민 통합은 어떻게 가능한가(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마스 프랭크 지음, 갈라파고스, 2012)



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는가? 프랭크에 따르면 그들의 정치적 판단 기준이 경제가 아니라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보다도 보수적 가치가 더 우선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그 결과 선거는 ‘계급전쟁’이 아닌 ‘문화전쟁’의 장이 된다. 378쪽


-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맞서는 국가와 개인의 연대(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지음, 동아시아, 2017)



“가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이 가족주의는 가족 안팎에서 폭력을 생산한다. 저자의 구분법은 아니지만 ‘안에서의 폭력’과 ‘바깥으로의 폭력’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가족 안에서 가족주의는 자식을 소유물로 보게끔 한다. 그 결과 체벌과 폭력을 ‘사랑의 매’로 미화한다. (···)

다른 한편으로 가족주의는 가족 바깥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이른바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나누고 가부장적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비정상’과 ‘부도덕’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한국 가족주의의 양태다. 465쪽


저자는 스웨덴 모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부모의 체벌 금지와 아동 수당 지급, 아동 인권에 대한 강조를 통해 아이들도 부모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부모 자산에 대한 조사가 없는 학생 대출을 통해 청년들이 가족에서 독립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다. 부부의 개인별 분리과세, 보편화된 공공보육 시스템으로 여성의 배우자에 대한 의존과 종속의 여지를 없앴다.” 469쪽


- 새로운 사랑,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망(폴리아모리, 후카미 기쿠에 지음, 해피북미디어, 2018)


폴리아모리란 무엇인가. ‘자신의 교제를 공개하고 합의한 후에 만들어가는 복수의 사랑’이다. 요점은 공개와 합의다. 모노가미에서라면 “당신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라는 고백은 관계의 파국으로 이어지지만 폴리아모리에서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된다. 폴리아모리는 단지 섹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유대를 강조하기에 스와핑과 구별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특정 사람들과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471쪽


- 무성애를 말하다(무성애를 말하다, 앤서니 보게트 지음, 레디셋고, 2013)


먼저 무성애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이나 여성, 혹은 양성 모두에 대해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무성애다. 478쪽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니 모호하다. 무성애라고 해서 로맨스가 결여된 것은 아니며 성적 매력과 로맨틱한 매력은 다르다고 하기 때문이다. 섹스와 로맨스는 서로 관계가 있지만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신체적 흥분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성 경험 자체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없다. 무성애를 결정하는 것은 성행위의 결핍이 아니라 욕망의 결핍이다. 479쪽


무성애자는 대략 70퍼센트가 여성이라고 한다.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여성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낮아서 자위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타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적 매력을 느끼는 빈도도 낮다. 479쪽 또 성애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하기 때문에 남성보다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발기는 명확한 반면에 질의 반응은 미묘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남성이 성애에 목표 지향적인 데 비해, 여성의 욕망은 좀더 모호한 것도 관계가 있다. 480쪽


-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즈 지즈코 지음, 은행나무, 2012)


우에노 지즈코의 정리를 따라가보면 세지윅은 먼저 ‘호모섹슈얼’과 ‘호모소셜’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한다. 호모섹슈얼이 남성 간 성애를 뜻한다면 호모소셜은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를 가리킨다.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호모소셜에는 호모섹슈얼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기에 호모소셜리티(동성 간 유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모섹슈얼리티(동성애)를 엄격하게 배제할 필요가 생긴다. 즉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는 호모소셜리티의 필수적 구성요소다. 그리고 이런 남자들끼리의 연대로서 호모소셜리티(동성 사회성)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

남자들끼리의 연대가 성립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지속적으로 배제하고 차별화해야 한다. 이것이 여성 혐오의 작동 원리다. 세지윅에 따르면 남성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성적 주체가 된다. 491쪽


- 모든 책은 여행서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책세상, 2005)


“세계는 책이고 여행은 독서이며 모든 책은 여행서다.” 그러니 애초에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앉아서 여행하는 사람’이고, ‘여행 가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다니며 책을 읽는 사람’이다. 594쪽


- 중년 이후의 삶(남자 나이 45세, 우에다 오사무 지음, 더난출판사, 2012)


저자는 46세에 법학전문대학원에 다시 입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딴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공부에서도 목표를 명확히 하고 최단 경로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독서의 경우에도 다양한 독서 대신에 그가 권장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기 위한 독서다. 목적의식을 갖고 책을 선택하되, 한 권을 읽고 나면 첫 번째 책과 다른 관점에서 쓰인 책을 읽어서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618쪽


- 프로이트의 원인론 vs 아들러의 목적론(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인플루엔셜, 2014)


프로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현재의 나를 지배한다고 보는 ‘원인론’의 입장이라면, 아들러는 정반대로 개인은 각자가 설정한 목적에 따른다는 ‘목적론’을 주창했다. 663쪽 또한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663쪽 고 주장하며 타인과의 인정 투쟁에서 탈피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과제분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 그런 분리를 통해서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대인관계에 대한 아들러의 처방이다. 6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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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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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의 전 작품에 대한 서문(발문)집으로 소장가치가 있다.

대체로 짧은 글이지만
겸손과 겸양의 글 속에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느껴지고
오롯한 자존감 속에서도 주변에 감사와 헌사를 잊지 않는 살뜰함까지
그가 쓴 글 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지만
작가가 쓴 글 속에는 분명 작가가 투영되어 있고, 박완서 선생의 작품에는
그 농도가 짙다.



"종교가 절대적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주술적 의존을 가져와 창조적인 능력을

무능화시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어머니의 현재 진행 중인 고통과 고투에 대해 여유를 둘 수 있었고 객관적일 수 있었고 냉담할 수 있었다는, 좋게 말하면 작가적 근성, 나쁘게 말하면 말 못할 독종에 대한 혐오" 를 고백하고 성찰하는 그 진정성이 작가의 글이고, 그 글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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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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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십년을 단위로 그 시대를 대변할 만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내용을 문학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부제가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이지만 이론서처럼 세계문학의 전반적 흐름을 나열식으로 서술하지는 않고, 개별 작품 안에서 문학사조와 작가들을 언급하는 정도다.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세계문학의 흐름을 소개했다면 오히려 지루해졌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적절한 분량이다. 장점은 시대별로 작품을 골라 부랑자 문학, 노동문학, 계급문학, 교양문학, 리얼리즘 소설, 모더니즘 소설 등으로 나아가는 문학의 흐름 안에서 각 작가와 작품들을 대입해서 내용과 한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다는 점이다. 단점은 평자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다 보니 단정적으로 씌어진 부분도 발견된다는 것. 나처럼 소설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충분히 길라잡이가 될 만한 책이다.




1장 1950년대: 손창섭《비 오는 날》: 한국전쟁의 폐허가 낳은 ‘너절한 인간’들의 한계와 가능성


- 손창섭 문학은 인간 사회를 동물원 수준으로 본다. 여성의 인격이나 성격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뱃가죽이 좀 달라’ 이런 식이다. (···) 전쟁의 사후 효과이기도 한데 모든 이념이나 고상한 정신적 가치가 다 무너지고 파괴된다. 25쪽


2장 1960년대 1: 최인훈 《광장》 : 남한과 북한 체제 모두를 거부하는 ‘회색인간’의 의미와 한계


-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법, 이념, 사회적 질서 등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단순한 생물학적 아버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인정하고 이름을 부여해줘야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주체를 보증해주는 존재를 다른 말로 ‘대타자’라 부른다. 대타자 부재의 문학, 결손의 문학이 바로 손창섭 문학이다. 그렇다면 손창섭 이후 문학의 과제는 ‘대타자의 설립’인 동시에 ‘주체로서의 자기 정립’이어야 한다. 70쪽


- 1960년대 문학은 두 단계 출발점을 갖게 된다. 첫 번째는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타난 ‘비어 있는 주체’이고, 그다음 단계는 김승옥이 탄생시킨 ‘속물’이라는 주체다. 72쪽


3장 1960년대 2: 이병주 《관부연락선》: 전혀 다른 문학의 길을 제시한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의 세계


- 이병주가 쓰는 표현인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할 때의 ‘산하’야말로 이병주 문학의 핵심이다. 이병주가 내거는 ‘산하의 허무주의’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100쪽


4장 1960년대 3: 김승옥 《무진기행》: 순수에서 세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포착한 현대인의 증상


- 윤희중이 무진과 함께 연상하는 것이 세 여자다. 광주역에서 만난 미친 여자, 미쳐가는 여자인 음악교사 하인숙, 자살한 술집 여자.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인데 윤희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부분은 그동안 상당히 과소평가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한다. 윤희중은 남자이지만 무진에서의 세 여자와 마찬가지로 ‘여성화’되어 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결정의 주체는 아내고 (134쪽) 윤희중은 아무런 힘이 없다. (···) 윤희중이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체로 그려지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문제성이다. 134쪽


5장 1970년대 1: 황석영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은 ‘방랑자문학’을 넘어 ‘비판적 리얼리즘’에 도달했는가


6장 1970년대 2: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살아 있는 권력을 겨냥했던 가장 비판적인 소설로 다시 읽기


7장 1970년대 3: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


8장 1980년대 1: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중산층이 되려는 독자들의 열망을 자극한 이문열의 교양주의


9장 1980년대 2 :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아버지의 그늘을 넘어 ‘탈주’를 모색하는 실험적 소설의 탄생


- 이인성의 문학이 탄생하기까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이인성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베케트파 중에는 번역자들이 많다. 정영문, 배수아, 한유주 등 이 계보에 선 작가들이 있다. 이들의 작품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일단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대중(298쪽)적인 작품을 쓰면 그들의 리그에서 쫓겨난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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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인 타임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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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 소설, 차일드 인 타임(The Child in Time), 한겨레출판, 2020


제목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영문 원제는 ‘The Child in Time’. 직역하면 ‘시간 속의 아이’. 아동소설 작가인 스티븐과 그의 아내 줄리에겐 세 살 배기 딸 케이트가 있었다. 스티븐은 마트의 계산대 주변에서 케이트를 잃어버린다. 유괴 되었는지, 사고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게 케이트는 갑자기 사라졌다. 이 핵폭탄 같은 사건이 스티븐과 줄리의 결혼생활을 부셔버렸다.


또 한 커플이 있다. 스티븐이 첫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사장이자 총리와도 가까운 고위관료 찰스와 이론 물리학자인 찰스의 아내 셀마. 찰스 부부는 갑자기 모든 지위를 버리고 런던의 다우닝가를 떠나 스코틀랜드 시골로 이주해버렸고, 찰스는 병적인 유아적 행동을 보인다. 스티븐의 케이트를 잃고 줄리와도 멀어진 채 찰스 부부, 그 중에서도 셀마와 관계를 이어나간다(성적인 관계가 아닌).


1차적으로 이 소설은 스티븐이 케이트와 줄리를 잃고 그 둘을 찾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거리에서 구걸행위를 하는 어린 소녀나 총리와의 면담을 어기고 불현 듯 쫓아간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아이를 케이트과 혼동하는 장면들, 간헐적으로 줄리와 만남(섹스를 포함한)을 가지다가도 끝끝내 조금씩 멀어져가는 기미들을 느낄 수 있다.


제목으로 돌아가 이제 ‘시간 속의 그 아이’가 누구인지 생각한다. 실종된 케이트, 어린시절로 돌아간 찰스 그리고 종반부에 탄생하는 스티븐과 줄리의 새 생명.


나는 이 셋과 더불어 제목을 다르게 해석해본다.

‘The Child in Time’은 ‘시간 속의 그 아이’ 대신 ‘제 시간에 도착한 그 아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에서 그 아이는 줄리의 임박한 출산 소식을 예감하고 제 시간에 줄리에게 도달하고자 필사적으로 기관차에 오르는 등 노력을 다한 스티븐이다.


소설의 중반부에서 스티븐이 그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참전군인인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어머니가 낙태를 고민했지만 결국은 출산을 결심한 사정, 스티븐이 우연히 그의 부모가 자주 가던 주점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장면을 환각처럼 목격한 순간, 그의 어머니도 창문 밖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스티븐임을 확신했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뭉클했다. 이 또한 ‘시간 속의 그 아이’는 스티븐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시간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다. 셀마를 이론물리학자로 설정했고, 찰스를 어린 시절로 회귀 시킨 설정, 케이트와 새 생명과 스티븐과 줄리, 스티븐의 부모에 관한 에피소드까지 과거, 현재, 미래는 중첩되고 뒤섞이고 무화되어 독특한 미장센을 느끼게 한다.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닌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과거와 미래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0년 영국이 브렉시트로 유럽연합을 탈퇴했고, 미국의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그 기저에는 1980년대의 대처와 레이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메모




- 그 장은 제 나름의 생명을 얻었고, 그런 연유로 스티븐은 열한 살에 사촌 누이 둘과 함께 보낸 여름휴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게 되었다. 짧은 머리에 반바지를 입은 소년들과 머리띠를 하고 원피스 자락을 속바지에 끼워 넣은 소녀들이 등장하고, 광란의 섹스 대신 말하지 않은 갈망과 수줍게 맞잡아 깍지 낀 손이, 형광색으로 칠한 폭스바겐 버스 대신 바구니 달린 자전거가 묘사되는, 잘랄라바드가 아니라 레딩 외곽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석 달 만에 원고를 끝냈고 제목은 《레모네이드》라고 붙였다. 48-49쪽


- 그의 말을 여전히 흘려들으며 버티고 있던 클레어는 주점 건너편의 출입문 바로 옆 창문을 흘낏 쳐다보았다. “지금도 그 모습이 여기 네 모습만큼이나 또렷이 떠오르는구나. 창문에 웬 얼굴이 보였어. 어떤 아이의 얼굴이 둥실 떠 있는 것처럼. 주점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더라. 어쩐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얼굴이 어찌나 하얗던지 백지장 같더구나. 그 얼굴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지. 그 뒤로 그 생각이 떠오르면 주점 주인의 아들이나 주변 논장의 아이였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확신했다, 그냥 알았어, 내가 보고 있는 게 내 아이라는 걸. 이렇게 말해도 될까 모르겠다만, 난 널 보고 있었던 거야.” 328쪽


- 셀마는 감정적인 중립 상태에 들어선 듯했다. “조화를 이 (375쪽)룰 수가 없었던 거야.”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유명해지고 싶고 언젠가 총리가 될 거라는 말도 듣고 싶은데, 세상 근심 없는 어린아이, 책임도 없고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기도 했던 거야. 그건 즉흥적인 괴벽이 아니었어. 그이의 사적인 시간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환상이었지. 그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이 섹스를 원하듯이 그걸 원했어. 사실, 거기에는 성적인 측면도 있었지. 반바지를 입고 가정교사로 분장한 성매매 여성에게 엉덩이를 때려달라고도 했고. (후략).”

“하지만 거기엔 그이가 스스로 이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더 중요한 정서적 측면이 있었어. 유년기의 안전, 무력함,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유, 돈이나 결정이나 계획이나 요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원한 거지. 그이는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약속과 일정과 시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어. 그이에게 유년기란 시간과 무관했어. (중략)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어(376쪽)른들의 세상에서 수백 가지 의무를 만들어내면서 자기 생각으로부터 달아난 거야. 당신 책 《레모네이드》가 그에게는 정말로 중요했어. 자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말을 거는 책이라고 말했지. 자기 욕망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기회를 앗아가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말했어. (후략).” 377쪽


- “하지만 진전은 있었어. 케이트가 생각나도 피하지 않으려고 했어. 케이트에 대해, 그 아이를 잃은 일에 대해 우울하게 곱씹기보다는 명상하려고 했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니까 새로운 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생각은 점점 커지긴 했지만, 너무 느렸어, 스티븐. (중략) 403쪽 그런데 이젠 곡 자체를 위해 연주했고,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기를 고대했고, 당신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지 진정으로 느끼기 시작했어. (후략)”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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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0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달에 나오자마자 산 책인데
아직 펴 보지도 못하고 있네요.

사춘기의배꼽 2020-02-07 17:08   좋아요 0 | URL
중반까지는 약간 지루하다는 느낌도 있는데, 중후반 넘어가면서 앞뒤가 연결되면서 엄청 흡입력이 있네요. 강추드립니다. 영화도 개봉 중이고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네요.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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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의 위악이 좋다. 시 속의 찡그린 표정의 낱말들, 그것들의 눈동자 안에 담긴 미처 숨기지 못하는 두려움, 슬픔이 좋다. 왜 아프고 무섭고 슬플수록 안 그런척, 센 척, 쿨 한 척 하지 않나.

그 낌새를, 기척을, 미묘한 떨림을 알아챌 수 있었을 때, 너도 그렇구나, 눈빛으로 머리와 이마를 쓸어줄 수 있다.



시인들 중에 청탁을 받는 사람은 소수다. 그 청탁을 받는 사람 중에 고료를 받는 사람은 극소수다. 내가 가입된 시 동인 잡지 발행인의 소개로 잡지에 시를 싣게 되어 타지의 발행인 아무개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시단을 몰랐고,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던 등단 초 였기에, 그 아무개가 자신을 이름을 대면서 '나 몰라요?' 말했을 때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그 아무개는 '시단에서 나 모르는 사람 별로 없는데. 신인이라 그런가. 우리 잡지 정기구독 안하죠?' 하고 물었다. 결국 여차저차 그 문예지에 시를 싣는 일은 취소되었고, 곱씹을수록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시집의 시들을 읽으면서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내 몸 속에 침잠해 있던 것들을 길어올릴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시나 시 비슷한 무엇이라도 될 지는 모르겠자만, 그래서 '아름답고 쓸모 없는' 것들.





시인의 말)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 1월 1일 일요일(-곡두 1) 9쪽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제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곡두 3)


나 알죠? 내 시 몰라요? 모르는데요. 나를? 내 시를 모른다고? 죽은 시인은 따로 있는데 장례식장에서 제가 죽은 것도 아니면서 저를 묻고 제 시를 말하는 좆같고 엿같은 사이들. 13쪽





- 수경의 점 점 점(- 곡두 22)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중략)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52쪽


- 철규의 감자(-곡두 25)


철규가 거창에서 감자를 보냈다 했고/ 내가 인천에서 감자를 받았다 했다/ 그 감자의 신묘함이라 하면/ 철규가 보냈다는 그 감자를/ 처륙도 본 적이 없고/ 내가 받았다는 그 감자를/ 나도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서로 그 감자를 두고/ 별거 아니에요/ 별거 맞던데 뭐/ 아는 척을 마구마구 한 일// (후략) 58쪽


- 저녁녘(- 곡두 34)


1

파미르고원 배후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돌이 왔다./ 그 돌을 씻었다./ 얼마나 씻어야 돌은/ 다 씻었다 할 얼굴이 되는가.// 칫솔로 돌의 얼굴을 솔질한다./ 진한 흙탕이/ 그리 진하지 않은 흙탕이기까지/ 돌은 물을 먹는다/ 물은 돌로 달아난다.


2

마른 수건으로 닦은 돌을/ 새 수건 위에 올려놓는다./ 돌 씻을 때 끼고 있던/ 일곱 개쯤 되는 실반지를/ 그 돌 위에 올려보기도 하였는데/ (중략)


3

돌이 움켜쥔 물의 무게라 할 때/ 물이 뱉어낸 돌의 온도라 할 때/ 저울을 사고 온도계를 수리하는 부지런함/ 그 바지런함은 왜 쉽사리 부질없어지나.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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