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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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의 위악이 좋다. 시 속의 찡그린 표정의 낱말들, 그것들의 눈동자 안에 담긴 미처 숨기지 못하는 두려움, 슬픔이 좋다. 왜 아프고 무섭고 슬플수록 안 그런척, 센 척, 쿨 한 척 하지 않나.

그 낌새를, 기척을, 미묘한 떨림을 알아챌 수 있었을 때, 너도 그렇구나, 눈빛으로 머리와 이마를 쓸어줄 수 있다.



시인들 중에 청탁을 받는 사람은 소수다. 그 청탁을 받는 사람 중에 고료를 받는 사람은 극소수다. 내가 가입된 시 동인 잡지 발행인의 소개로 잡지에 시를 싣게 되어 타지의 발행인 아무개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시단을 몰랐고,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던 등단 초 였기에, 그 아무개가 자신을 이름을 대면서 '나 몰라요?' 말했을 때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그 아무개는 '시단에서 나 모르는 사람 별로 없는데. 신인이라 그런가. 우리 잡지 정기구독 안하죠?' 하고 물었다. 결국 여차저차 그 문예지에 시를 싣는 일은 취소되었고, 곱씹을수록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시집의 시들을 읽으면서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내 몸 속에 침잠해 있던 것들을 길어올릴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시나 시 비슷한 무엇이라도 될 지는 모르겠자만, 그래서 '아름답고 쓸모 없는' 것들.





시인의 말)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 1월 1일 일요일(-곡두 1) 9쪽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제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곡두 3)


나 알죠? 내 시 몰라요? 모르는데요. 나를? 내 시를 모른다고? 죽은 시인은 따로 있는데 장례식장에서 제가 죽은 것도 아니면서 저를 묻고 제 시를 말하는 좆같고 엿같은 사이들. 13쪽





- 수경의 점 점 점(- 곡두 22)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중략)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52쪽


- 철규의 감자(-곡두 25)


철규가 거창에서 감자를 보냈다 했고/ 내가 인천에서 감자를 받았다 했다/ 그 감자의 신묘함이라 하면/ 철규가 보냈다는 그 감자를/ 처륙도 본 적이 없고/ 내가 받았다는 그 감자를/ 나도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서로 그 감자를 두고/ 별거 아니에요/ 별거 맞던데 뭐/ 아는 척을 마구마구 한 일// (후략) 58쪽


- 저녁녘(- 곡두 34)


1

파미르고원 배후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돌이 왔다./ 그 돌을 씻었다./ 얼마나 씻어야 돌은/ 다 씻었다 할 얼굴이 되는가.// 칫솔로 돌의 얼굴을 솔질한다./ 진한 흙탕이/ 그리 진하지 않은 흙탕이기까지/ 돌은 물을 먹는다/ 물은 돌로 달아난다.


2

마른 수건으로 닦은 돌을/ 새 수건 위에 올려놓는다./ 돌 씻을 때 끼고 있던/ 일곱 개쯤 되는 실반지를/ 그 돌 위에 올려보기도 하였는데/ (중략)


3

돌이 움켜쥔 물의 무게라 할 때/ 물이 뱉어낸 돌의 온도라 할 때/ 저울을 사고 온도계를 수리하는 부지런함/ 그 바지런함은 왜 쉽사리 부질없어지나.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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