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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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3.67"의 작가 찬호께이의 데뷔 시절부터 최근까지 쓴 단편과 중편을 모았다.

작가 후기에서 밝히는 것처럼 "여러 편의 단편을 한 권의 책에 밀어 넣는 허술한 방식이 아니라, 모음곡 형식으로" 매 단편마다 클래식 음악을 배경음악처럼 붙여 놓았다. 직접 선곡한 음악을 들으면서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고 작가가 추천한다.

장르적으로는 SF, 카프카적인 단편, 풍자소설, 메타 추리소설, 판타지, 단순 습작까지 다양하고 특히 작가가 직접 쓴 창작동기와 영업비밀을 후기 형식으로 덧붙여 놓아 소설창작에 관심이 있는 작가지망생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변주곡처럼 여러 소설에서 발견되는 공통되는 패턴이 있었는데,
화자가 범죄가 예상되는 상황을 사전에 인지하고 예방적 혹은 사후적으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가 있다. 스토킹이나 부부관계, 가족 간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화자가 정의감에 불탔거나 도덕적인 동기로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동기로 끔찍한 행위를 하고 사후 은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타인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화자의 행위가 법적,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 그 행위는 용인될 수 있는가라는 가치의 충돌문제가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물론 추리소설의 설정이 항상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한편 다분히 우화적인 설정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도 있었다. "커피와 담배"에서 작가가 밝힌 것처럼 담배의 유해성과 대마초의 합법화의 문제, "가라 행성 제9호 사건"에서 우주 개발에 대한 발전파와 보수파의 대립과 외계에 대한 오염문제는 토론 주제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추리소설의 작법을 정면으로 다룬 중편 "숨어 있는 X"를 읽는다면 작가 특유의 반전과 엔딩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을 수 있다. 한 권으로 여러 가지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 파랑을 엿보는 파랑

- 그가 이스턴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저우메이란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스턴 살인마가 저우메이란을 노렸다는 사실과 그 시발점도 세상에 공개된다. 블로그 때문에 살인마의 표적이 될 뻔했다는 걸 알게 되면 샤오란은 더 이상 블로그에 일기를 올리지 않을 것이다. 불 보듯 뻔한 결말이다. ‘심람소옥’이 사라지면 란유웨이는 모르핀을 맞지 못하게 된 암 환자처럼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턴 살인마를 그냥 내버려두면 샤오란이 살해될 테니 역시 블로그에는 더 이상 새 일기가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54쪽

* 정수리

- 막 대답하려는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눈앞의 정신과 의사는 내 정수리 쪽을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다. 처음 진료를 받았던 의사도 그랬다. 내 머리 위에 이상한 물체가 있다고 말했는데도 내 정수리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샤오쉐도 그랬다. 머리 위에 뭔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고 내 눈만 똑바로 쳐다보았다. (···) 그들이 머리 위를 보지 않는 것은 그들도 예전부터 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다. 거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도, 지하철과 버스에서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것도 다 그래서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들도 모두 정수리 위의 역겨운 것들을 보고 있다. 다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척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척하면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 89쪽

* 시간이 곧 금

“시간을 샀다고?” 리원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판 게 아니라 샀어?” “그럼!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데 누가 그걸 팔아!” 아리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과적으로 그 5분은 정말 요긴하게 쓰였지. 자네도 그날 화재가 난 것 기억하지? 그때 나는 구입한 5분을 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네. 노래방에서 나온 뒤에 메이얼이 보이지 않아서 아직 화장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 급히 찻으러 갔지만 어쩐 일인지 문이 잠긴 채 고장이 났더라고. 메이얼은 살려달라고 마구 외치고 있었어. 그때 이 기계의 스위치를 눌렀고, 나는 시간을 길게 느끼게 되었네. 시간 감각이 느려지자 침착하게 문을 열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지.(···).” 121쪽


*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

- “언니가 현실에서 살해되면 동생은 더 이상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전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어요? 이러나저러나 독자 한 명을 잃는 꼴이죠. 그렇다면 동생을 죽이는 게 추리소설을 무시한 언니에게 주는 최고의 교훈이 될 겁니다. 어린애들이나 꾀는 멍청한 ‘밀실 트릭’이 자기 동생의 목숨을 앗아갈 줄은 몰랐겠죠. 어쩌면 추리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걸 후회할지도 모르죠. (···).” 171쪽


* 가라 행성 제9호 사건

- 그는 나를 불러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게 했습니다. 내가 실패해서 모모코 사령관이 누명을 써도 보수파는 잃을 게 없죠. 247쪽

“하지만 지금처럼 당신이 진실을 추리해낸다면요?”

“그러면 모모코 사령관은 나처럼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부랑자’ 덕분에 혐의를 벗게 됩니다.” 두핀핀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게 총독의 계략이죠. 만약 내가 그를 원흉이라고 지목하면 발전파는 ‘보수파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미지를 얻습니다. 모모코 역시 나에게 은혜를 입은 셈이니 대중 앞에서 보수파의 공정함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같은 보수파라고 무조건 감싸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총독이 한 일을 밝히든 밝히지 못하든 보수파는 이익입니다.” 247쪽

발전파가 경멸했던 ‘탐정’이 눈의 기능으로도 밝히지 못한 진(247쪽)실을 알아냈으니 발전파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두핀핀은 멕켄넨 총독이 끌려가면서 발전파의 모순을 제대로 폭로하게 된 지금의 결과에 무척 만족스러웠으리라고 짐작했다. 248쪽

* 커피와 담배

“다들 미쳤어! 이 세계는 미쳤다고! 어린애들도 커피를 마시고, 흡연은 범죄가 아니고! 그런데 마약 복용은 불법이라고? 도대체 이유가 뭐야? 지난주에 분명히 대마초를 피우고, 암페타민을 주사했는데! 식당에서는 전부 코카인을 팔았다고! 며칠 만에 마약이 범죄가 된다고? 빌어먹을! 난 집에 갈 거야! 나갈 거라고!”
“자네는 커피를 담배로, 담배를 마약으로, 마약을 커피로 인지했어. 게다가 말할 때는 반대가 되어서 커피를 마약으로, 마약을 담배로, 담배는 커피로 말한 거야. 어쩌면 자네는 케타민을 카푸치노로 인식하고, 코카인을 멘톨 담배라 말했을지도 몰라. (···).”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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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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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결: 거침에 대하여(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한겨레출판, 2020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나에서 출발해 가정과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사회(국가)로 나아가는 방식의 전개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성(생각)에 앞서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 라틴어로 “당신은 몸을 소유한다”는 인신보호령(1679년, 영국)'을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제시하고, '생각하다'와 '생각하지 않은 생각'을 구분해 인간은 이미 완성 단계의 존재가 아닌 부족하고 보충되어야 할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강조점이다.


다음으로 '20:80'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양분화 된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개선하고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사회적 연대, 공감과 연민, 위와 앞이 아닌 옆과 뒤에 있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머릿속에 든 생각만으로 사회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명확한 인식이 중요하다. 특히 상징폭력과 자발적 복종 등 사회학적 개념을 빌려 와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관한 논란을 고찰한 부분은 내가 지금까지 가진 일방적인 피해자 프레임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부분에 동의할 수 없지만 프랑스 대입시험 바칼로레아처럼 나에게 몇 가지 무거운 숙제를 안긴 책이다.




-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충반하고 그것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것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태다. 85쪽


-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기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개념화) 134쪽


- 정확히 자각하지 못한 채 은밀한 방식으로 복종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과 흡사하지만,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의식과 욕망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135쪽


- 우선 계급배반의 문제가 심각하다. 중산층보다 서민층이나 빈곤층이 더 배반한다. 처지(존재)는 ‘80’에 속하지만 ‘20’편을 열심히 들어준다. 또 ‘80’에 속하는 사람들의 분열이 작용한다. 영남패권주의가 작동하고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열되어 있다. 여혐/남혐으로도 분열되어 있다. 또 ‘20’의 적극성에 비하여 ‘80’의 소극성도 문제다. ‘20’은 이미 좋은 자신의 처지를 더 좋게 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치지만, ‘80’은 정치에 소극적이거나 탈정치화되어 무관심하다. 또 ‘80’은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미래의 기대치로 오늘의 나를 배반한다. 지금은 ‘80’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20’에 속하게 되리라는 욕망을 갖고 있어서 미리부터 ‘20’편을 드는 것이다.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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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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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 2020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시편보다는 그의 등단작(2014년 세계일보신춘문예 '주방장은 쓴다')3부(상대성)에 실린 시들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개인적인 취향이다. 특히 3부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단어)가 나를 멈추게 했다.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일, 자연스러움'. 인위적인 개입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작동된다는 문언적 의미다. 그런데 찜찜하다. 자연스러움이 내겐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은 역사적 기록처럼 대개 승자와 강자 같은 기득권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한 번의 실수가 실패로 한 번의 실패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 당신은 가진 게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든든한 배경은커녕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으므로 당신이 당신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라는 말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라면 과연 그 사회는 자연스러운가?



나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돌부리에 걸리고 신발 밑창에 진흙이 달라붙고 어깨가 축축하게 젖는 궂은 날씨의 부자연스러움을 그 끈덕진 다짐을 포기할 수 없다.





- 흰검정 11쪽


검정에 고인 열에 손을 대본다/ 평소에는 꽃들이 웃자라 있고 언덕이 높아지거나 모난 바위가 자연스럽다/ 개미들이 평소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두었다/ 평소였던 자리에서 불에 덴 것 같은 샤먼과 볼을 맞댄다/ 적절한 소문이 무성해서/ 불편한 나비들이 몰려와 아름다워졌다/ 나는 계단 깎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땅의 깊은 온기,/ 흰검정



- 생각되되 생각될 것


공이 던져지고// 나는 관객 된 도리로, 연기되는 나를 잘 지켜보는 편이다 지루함을 견디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독백하며 저쪽의 내가/ 떨어지는 공을 받는다// 놀라운가, 아니다/ 박수가 터지기 전에 다음 독백을 시작할 것이다 던져진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공을 던지기로 약속되었다// 생각이 가해지는 공과/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생각이 가해지는 공 사이에// 나는/ 온갖 예상되는 나를 해할 수 있지 죽되, 죽지 않는 선에서 칼을 쥐는 법을 알고 있으니 칼은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밀어 넣는 것이지 비틀며, 약속된 곳으로 반복 없이도 또다시 나(69쪽)로서 생각될 수 있다면 그렇지, 비틀며// (···)// 괜찮다 기대된 박수를 참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 저 시체가 왜 나인지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공은 공으로 충분해진다 현재의 공은 아무런 힘도 가해지지 않은 생각에/ 멈춰 있다(가능하냐고? 내가 연민마저 참으며 모두라고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므로)// 생각되되/ 생각될 것이다 우연 없이도 던져진 공은 떨어지는 공으로 약속되었으므로, 건너의 내가 건너의 내 역할을 독백할 필요조차 없으니/ 어떤 자학도 기만하지 말 것// 보라, 던져질 공은 이제 내 손 위에 있다




제3부 상대성


- 검은 돌의 촉감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이 돌은 당위성을 따져볼 것도 없이 이 위치입니다 나의 선택도 돌의 선택도 아닙니다 돌은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을 뿐입니다 패배가 자연스레 이 위치에 놓여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레라니,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압니다 실패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현명한 의자에 앉아 패배보다 실패를 실패보다 실수를 실수보다 검은 돌을 검은 돌보다 흰 돌을 흰 돌보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오래 연민합니다//(···)// 실수를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돌은 그저 만져지길 원할 뿐입니다 나와 다르게 나와 같습니다// 돌은 변명합니다 죽고 싶어서일 겁니다/ 돌은 변명합니다 살고 싶어서일 겁니다// (···)// 나조차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만져질 수 없고 돌조차 만져질 수 없습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자꾸 만져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반복하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 청사진 104-106쪽


건물을 올리며 네명이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은 보편적 각도와 높이의 계단을 구축하고 밟으며/ 차근차근/ 벽돌을 소모한다 삽과 젓가락을 소모한다 함바집 할머니를 소모하고 간이화장실과 병실 침대를, 시간을, 짱돌을 무더기로 소모하고// (···)//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을 올리며 세명이 더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는/ 일곱이면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7은 모나미 볼펜을 한번(104쪽)도 안 떼고 그릴 수 있는 형태다// 청사진처럼/ 벽돌일 짊어진 젊은이는 아직/ 젊다/ (···)// 회복의 반대편으로, 계단이 될 허공을 오르는 저 젊은이는 차근차근/ 젊어서,/ 젊음이 소모되지 않아서 오랜 교육으로 축조된 희망과 기대가 아직 소모되지 않아서// 견고한,/ 저 크레인은 휘어지지 않아야 한다 새롭게 태어난 연골이 피동적으로 단단해진다 저 크레인은 휘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 불행해야 해서/ 일곱을 인유한 젊은이가 7의 균형을 휘청, // 건물은 위보다 위를 오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 먼 밭 111쪽


마을에서 멀리까지 나가야 밭이 있다 돌과 나무뿌리가 뒤엉킨 밭이 있다 돌과 나무뿌리는 자라지 않는데 자라지 않는 걸 키우기 위해 나는 멀리를 걸어왔다 (···) 밭에서 멀리까지 걸어야만 집이 있다 오래 기른 돌을 가져와 커다란 불 위에서 뜨겁게 굽는다 뜨거움을 보다가 그들에게 뜨거움을 보러 오라고 붉어지지 않고도 뜨거운 나의 돌을 보러 오라고, 휘적휘적 걸어와 불에 들어가지 않는 그들과 함께 웃는다 나도 불에 들어가지 않는다 불이 불에 들어갔다가 불에서 나왔다가, 내일은 더 먼 밭에 다녀와도 되겠느냐고 그들에게 조용히 묻는다 나는 괜찮은데 그들이 나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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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함정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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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 문학동네, 2020


이 소설을 읽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소녀와 어머니.



'순정의 영역'에서 계단에 앉아 있는 아이, '해운대'에서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으로 건너온 '호아'

는 이곳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다.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고 말을 걸어주지 않는 존재들,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호아'처럼 스스로 내 이름은 호아, 라고 말하는 정도. 이들은 비단 화자나 독자들의 바깥에 있는 인물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곧 우리들의 어린 시절 혹은 내가 누구보다

비참하다고 생각되어졌던 그 시절의 나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소설이 고마웠다.



그리고 엄마.

'스페인 여행'은 엄마의 부음 때문에 결국 스페인으로 가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그의 애도가 특별한 것은 엄마의 부음 이전부터 이미 애도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의 애도가 부음을 예감하는 애도라면, 내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애도는 살아 있는 자의 애도다.



2011년 췌장암 3기 발병으로 엄마의 부음이 코앞까지 닥쳤을 때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다행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지 않은 상태라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항암과 방사선 치료까지 경과가 좋아 지금까지 지방에서 잘 관리하고 계신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고, 안부전화나 영상통화를 제외하면 일 년에 몇 번 뵙지 못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나에게 엄마는 이미 돌아가신 존재다.



돌아가신 분의 안부를 묻고 생신을 축하하고 손을 잡아드리고 어깨를 안마해드리는 것

이처럼 사소한, 살아있는 엄마에 대한 애도. 나는 지금도 애도 중이므로 '스페인 여행'의 '나'처럼

부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을 수 있을까. 엄마의 죽음에 대한 대비는 연습과 준비로 가능한 것인가.



함정임 소설가의 등단 삼십 주년을 축하드린다.



* 순정의 영역



- 계단과 아이

그의 조부모 집에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계단 꿈을 꾸기 시작했다. 50쪽 (···) 꿈은 한동안 비슷한 장면들로 계속되었다. 그녀의 분당 옛집의 계단인지, 그의 조부모 집 계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계단에는 언제나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51쪽


-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같은 꿈이 거듭될수록 아이의 형상이나 장면이 생생해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스미듯 사라졌다. 그녀는 침대 맡으로 손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쥐었다. 자취가 묘연해지기 전에 메모 창에 썼다.


계단이 비어 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벽의 넓이가 달라진다. 아이는 감나무에 기대어 서있거나, 계단 맨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가 거기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주위의 온도가 달라진다. 가로등은 저물기만큼 어둠을 잠식하고, 아이는 어둠과 빛의 경계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51쪽)다. 계단은 빛의 테두리가 끝나는 시점에서 시작되고 나는 아이를 지나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52쪽


* 용인



- “쿵, 하고 봉분이 내려앉을 때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거요, 순전히.” 봉분이 내려앉는다, 쿵! K는 귀를 의심했다. 78쪽

- “십오 년쯤 되면, 관짝이 풀썩 주저앉고 그 바람에 봉분이 쑥 꺼져 버린다오. 그래서 온 거 아니유?” 79쪽


- 네 살짜리 꼬마는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잠든 너를 위에서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84쪽) 있음을. 귓불을 스치며 속삭이고 있음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임을. 너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시선이라든지 신기루라든지 속삭임이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느끼는 대로 잡거나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을 알지 못했다. 85쪽


- 기억의 내용들이 많아질수록 K는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묻어두었거나 몰랐던 사실들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지 기억 행위에 그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복원하거나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 K는 가장 먼 기억, 그러니까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지점을 생각했다. 그것은 잠든 사이 기분좋게 어루만져주던 달빛의 어른거림, 또는 K가 모르는 세상 하나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내 것인 듯 내 것(86쪽) 아닌, 기억이 배제된 시절의 행복, 또는 불행. 87쪽


* 스페인 여행


- 문제는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난 몇 년간 매일 엄마의 부음을 생각했다. 최초로 엄마의 부음을 생각해야 했을 때, 눈물의 둑이 터진 듯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날 이후, 엄마의 부음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일상이 되었다. 엄마의 부음을 생각하며 엄마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뺨에 입을 맞추고, 편안히 잠드시라 귀에 노래를 속삭여주었다. 몇 번은 진짜 부음을 준비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까지 갔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엄마의 부음이 내 가슴을 지나갔고, 나는 어느 경우에도 눈물 따위 흘리지 않게 되었다. 109쪽


- 그리고 일 년이 자났다.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내가 없는 그곳에는 오동나무 꽃이 피고, 또 졌을 것이다. 스페인 여행은 예정에 없었다. 110쪽


* 해운대


- G: 죽은 형을 위해 페루 방문, 3년 거주, 사진사, 카페 루카 운영

- 소녀(나): 호아, 베트남 할머니, 한국인 할아버지, 호아가 베트남계??


- 해수욕장의 분위기와 실루엣을 전하는 비슷비슷한 장면들을 훑어보다가 G는 메모지 아래에 있는 사진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진에는 한 남자가 한 소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해변을 달리는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 자전거의 속도에 실려 움직이는 피시체로 인하여 흐릿하게 흔들린 블러 상태였지만, G는 남자의 허리를 꽉 잡은 채 뺨을 그의 등에 대고 눈을 살포시 감고 있는 소녀를 알아보았다. 141쪽

* 영도



- 바닷가 절벽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서 실루엣만으로 보아 여인은 흡사 인어 소녀 같았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인은 해질녘이면 그 자리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도 바다도 어둠으로 수평선이 분간이 안 될 때까지 앉아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새벽이 오고, 수평선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는데, 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배였다. 그 배는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했다. 재인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조아나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산책로 끝자락 바위 위에 조아나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아나가 바라보고 있는 수평선에는 하나 아닌 여러 척의 배들이 떠 있었다. 재인은 섬에 조아나를 두고 다리를 건넜다. 때로 엉뚱한 곳에 뜻밖의 삶이 깃들기도 했다. 어쩌다 사람을, 아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처럼.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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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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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한국인 이야기(탄생·너 어디에서 왔니), 파람북, 2020


네 살배기 딸이랑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자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재밌는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놀라는 이야기 뭘로 해 줄까? 대답은 늘 무서운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동화나 짧은 콩트를 딸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고 압축된 일상어로 바꾸어 들려준다. 이내 밑천은 바닥나고.


아빠랑 엄마랑 지윤이랑 한 집에서 살고 있었어. 아빠랑 엄마가 많이 아~야~ 하고, 배도 고팠어. 그래서 지윤이가 산에 빵이랑 과자를 찾으러 갔어. 캄캄한 굴 앞에 도착했는데 굴 속에는 초콜릿이랑 사랑이랑 빵이랑 과자랑 잔뜩 쌓여 있었어. 그런데 굴 안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어. 지윤이가 들어갔을 때 호랑이가 있을지도 몰라. 지윤이는 아빠랑 엄마를 위해서 무서운 호랑이가 사는 동굴에 들어가서 빵이랑 과자랑 가져올 거야?


딸의 눈빛이 흔들린다. 고민하는 눈빛. 그리고는 고개를 흔든다.

호랑이 무서워~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왜 조를까.

무서워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러니.


이어령 선생의 “한국인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니 뱃속에서부터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타 문화권에는 없는 ‘태명’을 호명하는 것을 듣고,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꼬부랑 지팡이를 짚으며 고개를 넘어가는’ 한국인 고유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책의 형식도 특이하다. 챕터의 하위를 구성하는 문단마다 아라비아 숫자가 매겨져 있고 어떤 문장에는 클릭문양의 하이퍼텍스트가 있어 미로를 찾아가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책의 구성과 상관없이 앞에서부터 쭉 읽어나가도 무리 없다.


- 혈연관계냐 사회관계냐의 한중일 성명 시스템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여자가 출가할 경우다. 이름은 없어도 성은 분명히 챙겨 결혼해서 출가외인이 되어도 성은 그대로다. 그러나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는 결혼할 경우 남편 성을 따른다. 일본 사람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데, 누구의 딸인줄 어떻게 알지요?” 36쪽에서 고선윤, 《토끼가 새라고?》, 안목, 2016 재인용


- 그중에서 내 눈을 끌고 가슴을 친 이야기가 ‘까꿍이’라는 태명이다. “절박유산으로 아기를 보냈는데, 큰애가 배에다가 “까꿍 까꿍∼”했어요. 동생은 이제 좋은 곳으로 갔다고 설명해주니 “아냐, 있어. 까꿍 까꿍∼”해주더라고요. 근데 얼마 안 있어 자궁 상태를 보러 갔더니 진짜 새 생명이 이쁘게 집을 지어놨더라고요.” 48쪽


- 사람들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보면, ‘흙에서 흙으로’다. 사회복지적으로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며 자연생물학적으로 살피면 ‘자궁에서 무덤까지’다. 그리고 우리의 탄생 이야기를 쓰는 나의 입장에서 문화 문명적으로 보면 사람의 일생은 ‘천에서 천으로’다. 새 생명이 ‘그 세상’의 자궁에서 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온 뒤에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바로 베틀로 짠 ‘천’이다.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입는 수의 역시 ‘천’이다. (···) 태어나면서 배내옷을 입거나 혹은 강보로 감싸거나 또는 스와들링을 하고, 죽어서는 ‘수의’를 입는 인간의 일생이야말로 ‘기저귀에서 수의까지’ 즉, ‘천에서 천으로’다. 198쪽



목차)


이야기 속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1. 태명 고개 -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쑥쑥이 말문을 열다/ 태명 또 하나의 한류/ 이름으로 영혼을 춤추게 하라/ 이야기로 시작하는 생명

2. 배내 고개 -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나는 한 살 때에 났다/ 어머니의 바다 이야기/ 화이트 하트, 초음파의 발견/ 태동, 발의 반란

3. 출산 고개 - 이 황홀한 고통

어머니와 미역국/ 산고의 의미, 호모 파티엔스/ 왜 귀빠진 날인가?/ 나를 지켜준 시간의 네 기둥

4. 삼신 고개 -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삼신할미의 은가위/ 지워진 초원, 몽고반점/ 삼가르고 배꼽 떼기/‘맘마’와 ‘지지’와 젖떼기/ ‘쉬쉬’‘응가’와 기저귀 떼기

5. 기저귀 고개 - 하나의 천이 만들어낸 두 문명

기저귀를 모르는 한국인/ 냉전의 깃발, 서양 기저귀/ 기저귀 없는 세상

6. 어부바 고개 - 업고 업히는 세상 이야기

스와들과 배내옷/ 포대기는 한류다/ 어깨너머로 본 세상

7. 옹알이 고개 - 배냇말을 하는 우주인

환한 밥 깜깜한 밥/ 공당과 아리랑/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8. 돌잡이 고개 - 돌잡이는 꿈잡이

보행기에 갇힌 아이/ 네 손으로 운명을 잡아라/ 달라지는 돌상 삼국지

9. 세 살 고개 - 공자님의 삼 년 이야기

숫자 셋의 마법/ 우리 아기 몇 살/ 세 살마을로 가는 길

10. 나들이 고개 - 집을 나가야 크는 아이

자장가의 끝, 일어나거라/ 외갓집으로 가는 길/ 달래마늘의 향기

11. 호미 고개 - 호미냐 도끼냐 어디로 가나

빼앗긴 들에도/ 격물치지의 호미/ 호미보다 도끼/ 아버지 없는 사회

12. 이야기 고개 -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옛날 옛적 갓날 갓적에/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길 찾기/ 직선과 곡선/ 이야기의 힘

이야기 밖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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