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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13.67"의 작가 찬호께이의 데뷔 시절부터 최근까지 쓴 단편과 중편을 모았다.
작가 후기에서 밝히는 것처럼 "여러 편의 단편을 한 권의 책에 밀어 넣는 허술한 방식이 아니라, 모음곡 형식으로" 매 단편마다 클래식 음악을 배경음악처럼 붙여 놓았다. 직접 선곡한 음악을 들으면서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고 작가가 추천한다.
장르적으로는 SF, 카프카적인 단편, 풍자소설, 메타 추리소설, 판타지, 단순 습작까지 다양하고 특히 작가가 직접 쓴 창작동기와 영업비밀을 후기 형식으로 덧붙여 놓아 소설창작에 관심이 있는 작가지망생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변주곡처럼 여러 소설에서 발견되는 공통되는 패턴이 있었는데,
화자가 범죄가 예상되는 상황을 사전에 인지하고 예방적 혹은 사후적으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가 있다. 스토킹이나 부부관계, 가족 간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화자가 정의감에 불탔거나 도덕적인 동기로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인 동기로 끔찍한 행위를 하고 사후 은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타인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화자의 행위가 법적,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 그 행위는 용인될 수 있는가라는 가치의 충돌문제가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물론 추리소설의 설정이 항상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한편 다분히 우화적인 설정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도 있었다. "커피와 담배"에서 작가가 밝힌 것처럼 담배의 유해성과 대마초의 합법화의 문제, "가라 행성 제9호 사건"에서 우주 개발에 대한 발전파와 보수파의 대립과 외계에 대한 오염문제는 토론 주제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추리소설의 작법을 정면으로 다룬 중편 "숨어 있는 X"를 읽는다면 작가 특유의 반전과 엔딩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을 수 있다. 한 권으로 여러 가지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 그가 이스턴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저우메이란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스턴 살인마가 저우메이란을 노렸다는 사실과 그 시발점도 세상에 공개된다. 블로그 때문에 살인마의 표적이 될 뻔했다는 걸 알게 되면 샤오란은 더 이상 블로그에 일기를 올리지 않을 것이다. 불 보듯 뻔한 결말이다. ‘심람소옥’이 사라지면 란유웨이는 모르핀을 맞지 못하게 된 암 환자처럼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턴 살인마를 그냥 내버려두면 샤오란이 살해될 테니 역시 블로그에는 더 이상 새 일기가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54쪽
- 막 대답하려는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눈앞의 정신과 의사는 내 정수리 쪽을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다. 처음 진료를 받았던 의사도 그랬다. 내 머리 위에 이상한 물체가 있다고 말했는데도 내 정수리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샤오쉐도 그랬다. 머리 위에 뭔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고 내 눈만 똑바로 쳐다보았다. (···) 그들이 머리 위를 보지 않는 것은 그들도 예전부터 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다. 거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도, 지하철과 버스에서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것도 다 그래서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들도 모두 정수리 위의 역겨운 것들을 보고 있다. 다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척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척하면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 89쪽
“시간을 샀다고?” 리원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판 게 아니라 샀어?” “그럼!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데 누가 그걸 팔아!” 아리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과적으로 그 5분은 정말 요긴하게 쓰였지. 자네도 그날 화재가 난 것 기억하지? 그때 나는 구입한 5분을 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네. 노래방에서 나온 뒤에 메이얼이 보이지 않아서 아직 화장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 급히 찻으러 갔지만 어쩐 일인지 문이 잠긴 채 고장이 났더라고. 메이얼은 살려달라고 마구 외치고 있었어. 그때 이 기계의 스위치를 눌렀고, 나는 시간을 길게 느끼게 되었네. 시간 감각이 느려지자 침착하게 문을 열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지.(···).” 121쪽
- “언니가 현실에서 살해되면 동생은 더 이상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전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어요? 이러나저러나 독자 한 명을 잃는 꼴이죠. 그렇다면 동생을 죽이는 게 추리소설을 무시한 언니에게 주는 최고의 교훈이 될 겁니다. 어린애들이나 꾀는 멍청한 ‘밀실 트릭’이 자기 동생의 목숨을 앗아갈 줄은 몰랐겠죠. 어쩌면 추리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걸 후회할지도 모르죠. (···).” 171쪽
- 그는 나를 불러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게 했습니다. 내가 실패해서 모모코 사령관이 누명을 써도 보수파는 잃을 게 없죠. 247쪽
“하지만 지금처럼 당신이 진실을 추리해낸다면요?”
“그러면 모모코 사령관은 나처럼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부랑자’ 덕분에 혐의를 벗게 됩니다.” 두핀핀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게 총독의 계략이죠. 만약 내가 그를 원흉이라고 지목하면 발전파는 ‘보수파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미지를 얻습니다. 모모코 역시 나에게 은혜를 입은 셈이니 대중 앞에서 보수파의 공정함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같은 보수파라고 무조건 감싸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총독이 한 일을 밝히든 밝히지 못하든 보수파는 이익입니다.” 247쪽
발전파가 경멸했던 ‘탐정’이 눈의 기능으로도 밝히지 못한 진(247쪽)실을 알아냈으니 발전파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두핀핀은 멕켄넨 총독이 끌려가면서 발전파의 모순을 제대로 폭로하게 된 지금의 결과에 무척 만족스러웠으리라고 짐작했다. 248쪽
“다들 미쳤어! 이 세계는 미쳤다고! 어린애들도 커피를 마시고, 흡연은 범죄가 아니고! 그런데 마약 복용은 불법이라고? 도대체 이유가 뭐야? 지난주에 분명히 대마초를 피우고, 암페타민을 주사했는데! 식당에서는 전부 코카인을 팔았다고! 며칠 만에 마약이 범죄가 된다고? 빌어먹을! 난 집에 갈 거야! 나갈 거라고!”
“자네는 커피를 담배로, 담배를 마약으로, 마약을 커피로 인지했어. 게다가 말할 때는 반대가 되어서 커피를 마약으로, 마약을 담배로, 담배는 커피로 말한 거야. 어쩌면 자네는 케타민을 카푸치노로 인식하고, 코카인을 멘톨 담배라 말했을지도 몰라. (···).”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