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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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한국인 이야기(탄생·너 어디에서 왔니), 파람북, 2020


네 살배기 딸이랑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자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재밌는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놀라는 이야기 뭘로 해 줄까? 대답은 늘 무서운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동화나 짧은 콩트를 딸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고 압축된 일상어로 바꾸어 들려준다. 이내 밑천은 바닥나고.


아빠랑 엄마랑 지윤이랑 한 집에서 살고 있었어. 아빠랑 엄마가 많이 아~야~ 하고, 배도 고팠어. 그래서 지윤이가 산에 빵이랑 과자를 찾으러 갔어. 캄캄한 굴 앞에 도착했는데 굴 속에는 초콜릿이랑 사랑이랑 빵이랑 과자랑 잔뜩 쌓여 있었어. 그런데 굴 안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어. 지윤이가 들어갔을 때 호랑이가 있을지도 몰라. 지윤이는 아빠랑 엄마를 위해서 무서운 호랑이가 사는 동굴에 들어가서 빵이랑 과자랑 가져올 거야?


딸의 눈빛이 흔들린다. 고민하는 눈빛. 그리고는 고개를 흔든다.

호랑이 무서워~


아이들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왜 조를까.

무서워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러니.


이어령 선생의 “한국인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니 뱃속에서부터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타 문화권에는 없는 ‘태명’을 호명하는 것을 듣고,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꼬부랑 꼬부랑 지팡이를 짚으며 고개를 넘어가는’ 한국인 고유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책의 형식도 특이하다. 챕터의 하위를 구성하는 문단마다 아라비아 숫자가 매겨져 있고 어떤 문장에는 클릭문양의 하이퍼텍스트가 있어 미로를 찾아가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책의 구성과 상관없이 앞에서부터 쭉 읽어나가도 무리 없다.


- 혈연관계냐 사회관계냐의 한중일 성명 시스템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여자가 출가할 경우다. 이름은 없어도 성은 분명히 챙겨 결혼해서 출가외인이 되어도 성은 그대로다. 그러나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는 결혼할 경우 남편 성을 따른다. 일본 사람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데, 누구의 딸인줄 어떻게 알지요?” 36쪽에서 고선윤, 《토끼가 새라고?》, 안목, 2016 재인용


- 그중에서 내 눈을 끌고 가슴을 친 이야기가 ‘까꿍이’라는 태명이다. “절박유산으로 아기를 보냈는데, 큰애가 배에다가 “까꿍 까꿍∼”했어요. 동생은 이제 좋은 곳으로 갔다고 설명해주니 “아냐, 있어. 까꿍 까꿍∼”해주더라고요. 근데 얼마 안 있어 자궁 상태를 보러 갔더니 진짜 새 생명이 이쁘게 집을 지어놨더라고요.” 48쪽


- 사람들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보면, ‘흙에서 흙으로’다. 사회복지적으로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며 자연생물학적으로 살피면 ‘자궁에서 무덤까지’다. 그리고 우리의 탄생 이야기를 쓰는 나의 입장에서 문화 문명적으로 보면 사람의 일생은 ‘천에서 천으로’다. 새 생명이 ‘그 세상’의 자궁에서 산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온 뒤에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바로 베틀로 짠 ‘천’이다.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입는 수의 역시 ‘천’이다. (···) 태어나면서 배내옷을 입거나 혹은 강보로 감싸거나 또는 스와들링을 하고, 죽어서는 ‘수의’를 입는 인간의 일생이야말로 ‘기저귀에서 수의까지’ 즉, ‘천에서 천으로’다. 198쪽



목차)


이야기 속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1. 태명 고개 -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쑥쑥이 말문을 열다/ 태명 또 하나의 한류/ 이름으로 영혼을 춤추게 하라/ 이야기로 시작하는 생명

2. 배내 고개 -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나는 한 살 때에 났다/ 어머니의 바다 이야기/ 화이트 하트, 초음파의 발견/ 태동, 발의 반란

3. 출산 고개 - 이 황홀한 고통

어머니와 미역국/ 산고의 의미, 호모 파티엔스/ 왜 귀빠진 날인가?/ 나를 지켜준 시간의 네 기둥

4. 삼신 고개 -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삼신할미의 은가위/ 지워진 초원, 몽고반점/ 삼가르고 배꼽 떼기/‘맘마’와 ‘지지’와 젖떼기/ ‘쉬쉬’‘응가’와 기저귀 떼기

5. 기저귀 고개 - 하나의 천이 만들어낸 두 문명

기저귀를 모르는 한국인/ 냉전의 깃발, 서양 기저귀/ 기저귀 없는 세상

6. 어부바 고개 - 업고 업히는 세상 이야기

스와들과 배내옷/ 포대기는 한류다/ 어깨너머로 본 세상

7. 옹알이 고개 - 배냇말을 하는 우주인

환한 밥 깜깜한 밥/ 공당과 아리랑/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8. 돌잡이 고개 - 돌잡이는 꿈잡이

보행기에 갇힌 아이/ 네 손으로 운명을 잡아라/ 달라지는 돌상 삼국지

9. 세 살 고개 - 공자님의 삼 년 이야기

숫자 셋의 마법/ 우리 아기 몇 살/ 세 살마을로 가는 길

10. 나들이 고개 - 집을 나가야 크는 아이

자장가의 끝, 일어나거라/ 외갓집으로 가는 길/ 달래마늘의 향기

11. 호미 고개 - 호미냐 도끼냐 어디로 가나

빼앗긴 들에도/ 격물치지의 호미/ 호미보다 도끼/ 아버지 없는 사회

12. 이야기 고개 -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옛날 옛적 갓날 갓적에/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길 찾기/ 직선과 곡선/ 이야기의 힘

이야기 밖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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