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시선 439
이영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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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 2020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시편보다는 그의 등단작(2014년 세계일보신춘문예 '주방장은 쓴다')3부(상대성)에 실린 시들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개인적인 취향이다. 특히 3부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단어)가 나를 멈추게 했다.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일, 자연스러움'. 인위적인 개입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작동된다는 문언적 의미다. 그런데 찜찜하다. 자연스러움이 내겐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은 역사적 기록처럼 대개 승자와 강자 같은 기득권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한 번의 실수가 실패로 한 번의 실패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 당신은 가진 게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든든한 배경은커녕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으므로 당신이 당신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라는 말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라면 과연 그 사회는 자연스러운가?



나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돌부리에 걸리고 신발 밑창에 진흙이 달라붙고 어깨가 축축하게 젖는 궂은 날씨의 부자연스러움을 그 끈덕진 다짐을 포기할 수 없다.





- 흰검정 11쪽


검정에 고인 열에 손을 대본다/ 평소에는 꽃들이 웃자라 있고 언덕이 높아지거나 모난 바위가 자연스럽다/ 개미들이 평소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두었다/ 평소였던 자리에서 불에 덴 것 같은 샤먼과 볼을 맞댄다/ 적절한 소문이 무성해서/ 불편한 나비들이 몰려와 아름다워졌다/ 나는 계단 깎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땅의 깊은 온기,/ 흰검정



- 생각되되 생각될 것


공이 던져지고// 나는 관객 된 도리로, 연기되는 나를 잘 지켜보는 편이다 지루함을 견디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독백하며 저쪽의 내가/ 떨어지는 공을 받는다// 놀라운가, 아니다/ 박수가 터지기 전에 다음 독백을 시작할 것이다 던져진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공을 던지기로 약속되었다// 생각이 가해지는 공과/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생각이 가해지는 공 사이에// 나는/ 온갖 예상되는 나를 해할 수 있지 죽되, 죽지 않는 선에서 칼을 쥐는 법을 알고 있으니 칼은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밀어 넣는 것이지 비틀며, 약속된 곳으로 반복 없이도 또다시 나(69쪽)로서 생각될 수 있다면 그렇지, 비틀며// (···)// 괜찮다 기대된 박수를 참는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 저 시체가 왜 나인지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공은 공으로 충분해진다 현재의 공은 아무런 힘도 가해지지 않은 생각에/ 멈춰 있다(가능하냐고? 내가 연민마저 참으며 모두라고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므로)// 생각되되/ 생각될 것이다 우연 없이도 던져진 공은 떨어지는 공으로 약속되었으므로, 건너의 내가 건너의 내 역할을 독백할 필요조차 없으니/ 어떤 자학도 기만하지 말 것// 보라, 던져질 공은 이제 내 손 위에 있다




제3부 상대성


- 검은 돌의 촉감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이 돌은 당위성을 따져볼 것도 없이 이 위치입니다 나의 선택도 돌의 선택도 아닙니다 돌은 자연스레 자리를 찾아갔을 뿐입니다 패배가 자연스레 이 위치에 놓여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연스레라니,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압니다 실패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현명한 의자에 앉아 패배보다 실패를 실패보다 실수를 실수보다 검은 돌을 검은 돌보다 흰 돌을 흰 돌보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오래 연민합니다//(···)// 실수를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돌은 그저 만져지길 원할 뿐입니다 나와 다르게 나와 같습니다// 돌은 변명합니다 죽고 싶어서일 겁니다/ 돌은 변명합니다 살고 싶어서일 겁니다// (···)// 나조차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만져질 수 없고 돌조차 만져질 수 없습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 자꾸 만져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반복하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실수 없는 실패는 정당합니까 과연,


- 청사진 104-106쪽


건물을 올리며 네명이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은 보편적 각도와 높이의 계단을 구축하고 밟으며/ 차근차근/ 벽돌을 소모한다 삽과 젓가락을 소모한다 함바집 할머니를 소모하고 간이화장실과 병실 침대를, 시간을, 짱돌을 무더기로 소모하고// (···)//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을 올리며 세명이 더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는/ 일곱이면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7은 모나미 볼펜을 한번(104쪽)도 안 떼고 그릴 수 있는 형태다// 청사진처럼/ 벽돌일 짊어진 젊은이는 아직/ 젊다/ (···)// 회복의 반대편으로, 계단이 될 허공을 오르는 저 젊은이는 차근차근/ 젊어서,/ 젊음이 소모되지 않아서 오랜 교육으로 축조된 희망과 기대가 아직 소모되지 않아서// 견고한,/ 저 크레인은 휘어지지 않아야 한다 새롭게 태어난 연골이 피동적으로 단단해진다 저 크레인은 휘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 불행해야 해서/ 일곱을 인유한 젊은이가 7의 균형을 휘청, // 건물은 위보다 위를 오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 먼 밭 111쪽


마을에서 멀리까지 나가야 밭이 있다 돌과 나무뿌리가 뒤엉킨 밭이 있다 돌과 나무뿌리는 자라지 않는데 자라지 않는 걸 키우기 위해 나는 멀리를 걸어왔다 (···) 밭에서 멀리까지 걸어야만 집이 있다 오래 기른 돌을 가져와 커다란 불 위에서 뜨겁게 굽는다 뜨거움을 보다가 그들에게 뜨거움을 보러 오라고 붉어지지 않고도 뜨거운 나의 돌을 보러 오라고, 휘적휘적 걸어와 불에 들어가지 않는 그들과 함께 웃는다 나도 불에 들어가지 않는다 불이 불에 들어갔다가 불에서 나왔다가, 내일은 더 먼 밭에 다녀와도 되겠느냐고 그들에게 조용히 묻는다 나는 괜찮은데 그들이 나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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