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함정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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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 문학동네, 2020


이 소설을 읽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소녀와 어머니.



'순정의 영역'에서 계단에 앉아 있는 아이, '해운대'에서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으로 건너온 '호아'

는 이곳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다.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고 말을 걸어주지 않는 존재들,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호아'처럼 스스로 내 이름은 호아, 라고 말하는 정도. 이들은 비단 화자나 독자들의 바깥에 있는 인물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곧 우리들의 어린 시절 혹은 내가 누구보다

비참하다고 생각되어졌던 그 시절의 나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소설이 고마웠다.



그리고 엄마.

'스페인 여행'은 엄마의 부음 때문에 결국 스페인으로 가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그의 애도가 특별한 것은 엄마의 부음 이전부터 이미 애도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의 애도가 부음을 예감하는 애도라면, 내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애도는 살아 있는 자의 애도다.



2011년 췌장암 3기 발병으로 엄마의 부음이 코앞까지 닥쳤을 때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다행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지 않은 상태라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항암과 방사선 치료까지 경과가 좋아 지금까지 지방에서 잘 관리하고 계신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고, 안부전화나 영상통화를 제외하면 일 년에 몇 번 뵙지 못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나에게 엄마는 이미 돌아가신 존재다.



돌아가신 분의 안부를 묻고 생신을 축하하고 손을 잡아드리고 어깨를 안마해드리는 것

이처럼 사소한, 살아있는 엄마에 대한 애도. 나는 지금도 애도 중이므로 '스페인 여행'의 '나'처럼

부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을 수 있을까. 엄마의 죽음에 대한 대비는 연습과 준비로 가능한 것인가.



함정임 소설가의 등단 삼십 주년을 축하드린다.



* 순정의 영역



- 계단과 아이

그의 조부모 집에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계단 꿈을 꾸기 시작했다. 50쪽 (···) 꿈은 한동안 비슷한 장면들로 계속되었다. 그녀의 분당 옛집의 계단인지, 그의 조부모 집 계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곳이 어디든 계단에는 언제나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51쪽


-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같은 꿈이 거듭될수록 아이의 형상이나 장면이 생생해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스미듯 사라졌다. 그녀는 침대 맡으로 손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쥐었다. 자취가 묘연해지기 전에 메모 창에 썼다.


계단이 비어 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벽의 넓이가 달라진다. 아이는 감나무에 기대어 서있거나, 계단 맨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가 거기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주위의 온도가 달라진다. 가로등은 저물기만큼 어둠을 잠식하고, 아이는 어둠과 빛의 경계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51쪽)다. 계단은 빛의 테두리가 끝나는 시점에서 시작되고 나는 아이를 지나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52쪽


* 용인



- “쿵, 하고 봉분이 내려앉을 때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거요, 순전히.” 봉분이 내려앉는다, 쿵! K는 귀를 의심했다. 78쪽

- “십오 년쯤 되면, 관짝이 풀썩 주저앉고 그 바람에 봉분이 쑥 꺼져 버린다오. 그래서 온 거 아니유?” 79쪽


- 네 살짜리 꼬마는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잠든 너를 위에서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84쪽) 있음을. 귓불을 스치며 속삭이고 있음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임을. 너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시선이라든지 신기루라든지 속삭임이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느끼는 대로 잡거나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을 알지 못했다. 85쪽


- 기억의 내용들이 많아질수록 K는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묻어두었거나 몰랐던 사실들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지 기억 행위에 그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복원하거나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 K는 가장 먼 기억, 그러니까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지점을 생각했다. 그것은 잠든 사이 기분좋게 어루만져주던 달빛의 어른거림, 또는 K가 모르는 세상 하나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내 것인 듯 내 것(86쪽) 아닌, 기억이 배제된 시절의 행복, 또는 불행. 87쪽


* 스페인 여행


- 문제는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난 몇 년간 매일 엄마의 부음을 생각했다. 최초로 엄마의 부음을 생각해야 했을 때, 눈물의 둑이 터진 듯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날 이후, 엄마의 부음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일상이 되었다. 엄마의 부음을 생각하며 엄마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뺨에 입을 맞추고, 편안히 잠드시라 귀에 노래를 속삭여주었다. 몇 번은 진짜 부음을 준비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까지 갔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엄마의 부음이 내 가슴을 지나갔고, 나는 어느 경우에도 눈물 따위 흘리지 않게 되었다. 109쪽


- 그리고 일 년이 자났다.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내가 없는 그곳에는 오동나무 꽃이 피고, 또 졌을 것이다. 스페인 여행은 예정에 없었다. 110쪽


* 해운대


- G: 죽은 형을 위해 페루 방문, 3년 거주, 사진사, 카페 루카 운영

- 소녀(나): 호아, 베트남 할머니, 한국인 할아버지, 호아가 베트남계??


- 해수욕장의 분위기와 실루엣을 전하는 비슷비슷한 장면들을 훑어보다가 G는 메모지 아래에 있는 사진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진에는 한 남자가 한 소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해변을 달리는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 자전거의 속도에 실려 움직이는 피시체로 인하여 흐릿하게 흔들린 블러 상태였지만, G는 남자의 허리를 꽉 잡은 채 뺨을 그의 등에 대고 눈을 살포시 감고 있는 소녀를 알아보았다. 141쪽

* 영도



- 바닷가 절벽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서 실루엣만으로 보아 여인은 흡사 인어 소녀 같았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인은 해질녘이면 그 자리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도 바다도 어둠으로 수평선이 분간이 안 될 때까지 앉아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새벽이 오고, 수평선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는데, 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배였다. 그 배는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했다. 재인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조아나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산책로 끝자락 바위 위에 조아나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아나가 바라보고 있는 수평선에는 하나 아닌 여러 척의 배들이 떠 있었다. 재인은 섬에 조아나를 두고 다리를 건넜다. 때로 엉뚱한 곳에 뜻밖의 삶이 깃들기도 했다. 어쩌다 사람을, 아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처럼.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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