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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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진짜가 나타났다. 현실과 소설이나 영화의 가상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조르바는 역대 급 상 남자다. 마른 체구에 곱슬머리 60대는 모티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다. 그의 어록들을 보자.





-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거라고요.(54쪽)

-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159쪽)






크레타 섬의 갈탄광 사업을 위해 동행하는 조르바의 고용주이자 화자인 '나'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소위 먹물인간이다. 손발보다는 머리가 앞서고, 흙냄새보다 종이냄새가 친숙하다. '나'는 조르바와 시종일관 조르바를 흠모하고 동경한다. 후반에 약간 조르바의 의견에 반박하기도 하지만 거의 신도수준이다. 서방을 얻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꿈인 한물간 카바레 가수인 오르탕스 부인을 희롱하고 애타게 하는 지켜보고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기도 한다.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이자 실존인물 조르바를 모델로 한 이 책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의 모순 개념을 조르바와 나를 통해 뚜렷이 대비시키면서 이야기를 펼쳐간다. 화자가 그토록 추앙하는 육체파 조르바의 삶이 옳은 것일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론을 정립하고 확장하는 과정은 현장과 현실세계에서 얻는 경험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근무하는 법원을 포함해 여러 조직에는 관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법령에 규정은 없지만 내 선배가, 선배의 선배로부터 구전이나 족보로 내려오는 매뉴얼이 있다. 가끔씩 민원인과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바로 규정의 틈이 있는 애매한 부분이다. 담당자의 재량에 의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데, 대개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한다. 우선 관련규정과 선례가 있는지 찾아보고 없다면 해석이 개입하는데, 담당자의 재량에 의해 결론이 달라지는 것보다는 이론가와 실무가가 연구해서 계속해서 흠을 메워나가는 선례를 만들고 규정을 정립해 나간다면 민원인과 일반 국민들도 쉽게 수긍할 것이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교과서나 이론서를 수회 정독한 후 실제 문제를 풀거나 다음단계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의 틀을 가지고 문제집을 풀거나 직접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오답을 정리해 나가는 스타일도 있다. 





 축구경기를 보면 나라마다 클럽마다 스타일을 가진다. 메시가 뛰는 바르셀로나처럼 티키타카라 불리는 짧은 패스와 높은 공 점유율을 바탕으로 경기를 지배해나가는 팀이 있고, 아틀레티고 마드리드처럼 튼튼한 수비를 기본으로 역습을 노리는 팀도 있다. 어느 스타일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육체와 영혼, 연역과 귀납처럼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둘은 하나라는 메시지를 조르바와 나의 대비를 통해 느끼게 해준 감동적인 소설이다. 여성 독자들은 조르바의 거친 말투와 여성비하적인 멘트에 약간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조르바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면 될 듯.


#그리스인조르바 #니코스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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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1 - 생명연습 외 김승옥 소설전집 5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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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단편 '생명연습'




1. 소설은 여고생 딸을 둔 '한교수'와 화자인 '나'의 문답으로 시작한다. 한 교수는 대화를 이어가다가 30년전 연인이었던 '정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해외유학을 떠나는 자신의 처지로 같이 가자고 할 수도, 1963년 즈음의 사회분위기상 여자의 집에서 기다리게 하지도 않을게 뻔했다. 이야기의 말미에 한교수는 정순이 어제 죽었다고 말했다. 실은 그녀는 사회학과 박교수의 부인이었다.




2. 소설 속 나의 가족은 엄마, 형, 누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형은 하루종일 다락방에서 나오지 않는 22살 청년으로 폐병을 앓고 있다. 누나는 야간상업중학교를 다니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어머니는 사별후 밀수선 선장, 세관관리, 헌벙문관 등 남자를 만나고 이따금 집안에 들이기도 한다. 형은 그런 엄마가 마뜩찮다. 형은 자신의 건강상태 때문인지, 어머니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엄마를 때리고 만다. 누나는 엄마에 대해 글을 쓴다. 물론 허구다. 엄마가 만났던 남자들의 용모에는 공통점이 있다. 눈에 쌍꺼풀이 있고, 콧날은 오똑하고 얼굴은 창백하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얼굴과 거의 일치된다. 형은 누나의 작문으로 보고 픽 웃는다. 남매는 결정을 해야 한다. 엄마냐 형이냐? 남매는 등대가 있는 낭떠러지에서 형을 밀어 바다로 빠뜨렸다. 엄마를 선택한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은 돌아온다. 그리고 자살한다. 




3. 정순과 엄마는 닮았다. 한 사람은 생이별을, 한 사람은 사별했다. 이별 후 각기 다른 인연을 만나 보낸 사람을 지워나갔다. 어쩌면 정순이 만났던 사회학과 박교수는 '한교수'의 외모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한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나'는 한교수와 닮았다. 현실적 사랑을 선택한 엄마를 누나와 지지했듯, 애달프게 남겨둘 수 밖에 없었던 정순을 이해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한교수에 감정이입을 한다. 


"교수님, 장례식에 가실건가요?" 




나는 이 소설을 '형, 한교수'로 상징되는 명분과 '엄마와 정순'으로 대표되는 현실간의 간극에 관한 소설로 읽었다. 죽은 줄 알았던 형은 끝끝내 돌아와 스스로 몸을 던진 장면은 명분의 단발마다. 




- 악은 평범하다. - 김승옥의 단편 '건(乾)'을 읽고

1. 1952년 깊어 가는 가을 자락에 '나'의 집은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방위대책본부로 쓰였던 저택은 시립병원으로 변했고, 지금은 텅 비었다. 벽돌공장에서는 빨치산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발견되었다. 엎드린 채 보따리는 풀어져 있고, 총은 시체 옆에 무심히 놓였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6학년생. 형은 고등학교 2학년이다. 아버지와 나, 무전여행을 계획했다 틀어진 형과 형의 친구들은 돈을 받고 빨치산의 시체를 치우기로 한다. 벽돌공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관이 있고, 빨치산의 어머니는 거듭 사죄를 한다.

"저 놈이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글쎄 하필... 빨갱이가 되어서...저 꼴로 돌아와서....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하다. 시체를 치우고 형과 형의 친구들과 나는 돌아오는 길에 나와 정감있게 친했던 '윤희누나'와 마주친다.



"저거 우리 먹을래?"
나는 빈집으로 할말 있으니 나오라는 형의 편지를 누나에게 전달한다. 누나의 반응을 예상해 둘러댈 변명거리를 형과 연습하기까지 하면서 '공범'이 된다.



2. 어머니의 사죄가 마음에 쓰인다. 죽은 아들의 시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아들을 잘 못 키워서 빨갱이가 되게 했다는 자책은 방어본능이었을까? 그렇다면 이념이 천륜마저 꺾어 버리는 참상은 끔찍스럽다.



자신을 살뜰히 챙기던 누나를 형의 교사로 범하는 과정에 가담하는 '나'는 초등학생임을 감안해도 정범인 형과 형 친구들의 불법보다 큰 악을 저지르는 공범인 정범이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극히 평범하다. 십자군 원정을 떠난 군중, 유대인들을 살육장으로 실어나른 나치의 조력자 아이히만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인이다.

악의 평범성에 흔들리지 않는 척추를 세우는 일, 멸치의 뼈로 내 뼈를 만들듯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것부터 바른 생각을 유지해야겠다.



- 김승옥의 단편 '역사(力士)'를 읽고




1. 공원 벤치에서 머리털이 덥수룩한 젊은이에게 들은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동대문 창신동 빈민가에서 하숙하던 시절을 연극을 전공하는 내가 희곡을 습작하던 시절이었다. 하숙집은 방이 5개 였는데, 첫째는 주인이, 두번째는 '영자'라는 창녀가, 세번째는 50대 절름발이 남자와 그의 딸이, 네번째는 40대 '막벌이 서씨', 마지막으로 내가 사는 방이다.

우연히 단골술집인 함흥집에서 '서씨'를 만나 그의 인생을 듣는다. 중국남자와 한국여자의 혼혈로 태어난 그는 고향은 함경도인데, 6.25.때 월남했다. 나에게 자신은 동대문과 친하다며 술집에서 나와 동대문으로 데려간다. 동대문을 기어올라가 큼지막한 돌 하나를 빼더니 머리위로 번쩍 든다. 그의 넘치는 힘을 소모하기엔 막일은 소소했고, 집안 대대로 '역사(力士)'임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2. 나는 창신동 하숙을 나와 지인의 소개로 깨끗한 양옥집에서 하숙하고 있다. 구성원은 할아버지, 할머니, 물리학 강사 아들과 며느리, 3살 난 딸, 여고생인 여동생. 식모까지 일곱이다. 할아버지는 6.25.사변이 가정의 파괴를 불러 왔으며, '질서정신'에 입각한 가풍을 세우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 집은 규칙적인 생활의 전범이다. 며느리는 4시면 피아노 앞에 앉아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한다. 저녁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밤 10시 즈음에 티 타임을 갖고 취침한다. 밤에 기타를 튕켜보다 할아버지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나는 '빈민가가 파견한 척후(109쪽)'였다.

나는 결심한다. 빈껍데기, 방향이 틀린 습관적인 생활을 하는 이 가족에게 티 타임시간에 식모 몰래 약국에서 산 흥분제를 넣었다. 가족들은 차를 마신 후 각자 방으로 가고 두번 째 일탈을 한다.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시작한다. 신기한 건 나를 피아노 앞에서 떼어내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 할아버지 뿐.




3. 2001년에 서울에 올라온 뒤 줄곧 하숙을 했다. 과일장사를 하셔서 지나가다 인사하면 귤을 건네 주셨던 하숙집 아저씨의 푸근함. 교회 앞에 하숙집이 있어서 일요일이면 사람들의 웅성임에 잠을 깨곤 했던 기억. 하숙집에서 당시 가장 어려 평생 처음으로 '귀엽다'는 말을 듣는 순간 느낀 오묘함. 어느새 하숙집의 맏형이 되어 동생들과 저녁먹고 노을지는 언덕길. 남자들이 있는 집만 살다가 여자들과 맨 얼굴로 밥상앞에서 마주해야 했던 어색함.
나의 하숙생활은 다행히 창신동 빈민가 같은 처절함도, 양옥집의 햐안방 같은
답답함이 없는 행복한 생활이었다.



공원에 앉은 젊은이는 묻는다.
"어느 쪽이 틀려 있었을까요?"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양자가 공존하는 세상은 어지럽기만 하다.

"이 사람들의 태도야말로 자신들은 걷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매일매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그 끝없는 공전 같아 뵈던 생활이 이 곳보다는 오히려 알찬 것이 아니었을까?"(107쪽)



4. 극단적인 하숙생활을 대비는 우리 사회가 겪은 급격한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창신동 빈민가에서 탈출을 성공했지만 깨끗한 양옥 하숙생활은 나의 힘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수명은 연장되었지만 행복감의 수명은 기술발달에 비례하지 않는다. 각자가 가진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공평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매일 밤 동대문에서 벽돌조각을 들었다 놓는 역사(力士)처럼 움츠린 채 살고 있지 않은가.


가풍, 질서,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 마음대로 기타나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남는 힘과 열정을 쏟을 곳을 찾는일이 중요하다.

#김승옥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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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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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이야기' (1강) 움직이는 원자 - 고독과 외로움

1.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영원히 운동을 계속하는 작은 입자로서 거리가 어느 정도 이상 떨어져 있을 때에는 서로 잡아당기고, 외부의 힘에 의해 압축되어 거리가 가까워지면 서로 밀어낸다(42쪽) 
원자가설(atomic hypothesis)의 내용이다. 가장 작은것의 구조와 전체구조가 동일하다는 '프렉탈'을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멀어지는 보고 싶고 너무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싶은 것이 인간관계다. 혼자이고 싶고 함께이고 싶은 존재가 인간이다.



2. 예전에 메모했던 글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관한 글을 가져 왔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운 경우가 있고, 그대가 곁에 없어도 그대가 그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움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외로움, 고독, 홀로서기, 자존감, 자존심, 자아, 관계. 사랑, 행복... 항상 제 머릿속에서 맴도는 단어들입니다. 솔직히 정답을 찾을 자신이 없지만 글을 쓰면 조금 위안이 됩니다.
‘혼자 있다는 것과 홀로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혼자 있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이라면 홀로 있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다는 것이 외로움과 관계가 있다면 홀로 있다는 것은 고독과 관계가 있습니다. 외로움이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라면 고독은 절대적이고 존재적인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외롭지만 홀로 있을 때는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있다는 것이 이기적이라면 홀로 있다는 것은 이타적입니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함께 있을 수 없지만 홀로 있으면서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비채, 2013, 274쪽)



3. 온갖 종류의 원자들이 다양하게 나열되어 수시로 변하는 그런 복잡하기 그지없는 배열로 이루어진 물질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67쪽)
인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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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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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단편, '상황과 비율'(단편소설집 '가짜팔로 하는 포옹' 중)





1. 춘하프로덕션의 사장 이정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감독(이하 '상감')차양준은 상황시리즈로 포르노 영화업계에 히트 기획자로 자리잡았다. 이를테면 '버스를 기다리다가, 피서지에서 보트를 놓친 후에, 회사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카페에서 커피 주문을 기다리다가'같은 상황을 애로티시즘으로 풀어냈다. 차양준의 작품을 대하는 의식은 확고하다. 상황과 전희와 섹스의 비율은 1:1:2 여야 한다. 




2. 상황과 이야기를 중시하는 차양준과 달리 춘하프로덕션의 또다른 축인 오형수 감독은 이미지와 편집을 중시한다. 차양준이 '봉테일'로 불리는 '괴물'의 봉준호라면 오형수는 콘티없는 촬영으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나, 기획자와 감독의 위치로 보나 둘은 물과 기름이다. 




3. 오형수가 디렉팅을 하는 작품 중에 뒷부분이 남은 것이 있다. 주인공은 '송미'라는 28세 포르노 배우다. 오형수와의 갈등으로 촬영중단은 선언하고 잠적했다. 그녀는 터뜨리는 데서 성적 쾌감을 느낀다.  비닐봉지에 공기를 가득 넣어 발로 밟을 때 나는 '펑'소리는 마치 자위를 하는 도중 느끼는 오르가즘 같다고 말한다.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송미'를 설득하기 위해 차양준이 나선다. 그는 특기를 발휘해 그녀가 얼마나 시장에서 반응이 좋은지, 왜 그가 잔여 촬영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통계를 들먹이며 차근차근 말한다. 송미는 그런 차양준의 말투가 잼있고 묘한 매력을 느끼고 촬영장으로 복귀한다. 





4. 차양준과 오형수의 대립은 상황과 이야기 vs 이미지와 편집의 가치충돌이다. 미술, 음악, 소설같은 예술작품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선택은 창작자의 몫이다. 대신 상황과 이야기는 뉴스와 르포를 넘는 미적 예술성을 함유해야 하고 이미지와 편집은 인상의 조각들을 있음직한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 어떤 요소가 많고 적냐의 문제이지 일도양단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5. 예술문제를 넘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논쟁적인 문제에서는 절차와 실체(현실)의 동시 충족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에너지 수급을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다고 가정해보자. 에너지 안정적 공급이라는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도 이해관계인들을 설득해 나가는 상황과 절차가 생략되거나 무시된다면 발전소 건설은 정당화될 수 없다.



작가의 의도도 분명 상황과 이야기를 부각하기 위한 인물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송미'를 촬영장에 다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설득의 과정과 상황이기 때문이다. 탁구공이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해 데굴데굴 구르다가 누군가의 발에 밟혀 '펑'터지는 상황을 촬영때마다 상상한다는 송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건 '상황'이다.





창문 만들기 - 김중혁의 단편, '픽포켓' (단편소설집 '가짜팔로 하는 포옹' 중)을 읽고

1. 이호준과 장우영은 '기민지'라는 28살 가수를 좋아한다. 호준은 그녀의 종아리와 노래를 우영은 가슴과 춤을. 그녀는 최근 연인 k군과 결별했고 신곡 '안녕을 훔치다'의 부진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어느날 '기민지'가 실종되었다는 기사를 본 호준과 우영은 예전 그녀의 잡지인터뷰의 중 '부산 바닷가 호텔 꼭대기방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푹 쉬고 싶다' 말을 떠올린다. 무작정 밤기차를 타고 기민지를 찾으러 부산으로 내려간다. 오랫동안 연락은 못하고 살았지만 부산에는 동창 '송진구'라는 믿는 구석이 있다. 

'역 앞을 벗어나자 주택가인 듯한 조용한 동네들이 나타났다. 밤이 깊었지만 불 켜진 집이 많았다. ... 모든 창문의 빛이 달라 보였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문장)" (67쪽)

송진구가 사는 곳은 나즈막한 담벽에 조그마한 화분이 줄지어 놓인 골목을 따라 가면 나왔다. 



2. 기민지는 잠적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채 외부와 차단된 호텔 27층에서 며칠을 보낸다. 어찌어찌하여 탈출한 후 기획사 사장 조남일에게 전화하는 도중 가방을 소매치기(픽포켓)당한다. 범인을 쫓아 달리고, 놓치고, 도달한 곳은 송진구가 사는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이다. 

기민지는 창문 보기를 좋아한다. 회사대표 조남일은 스캔들을 의도하고 K군과 민지를 만나게 했지만 K군은 연인이 있었다. K군의 집에 나와 그 집에 어른 거리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보며 기민지는 질투가 났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87쪽)



3. 벽은 안과 밖을 단절시키지만, 창문은 소통과 단절의 매개체다. 창문의 크기에 따라, 빛의 양에 따라 커튼을 치기도, 폐에 산소를 채우듯 활짝 여는 때도 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옛 추억에 잠기고, 누군가는 떠나보낸 혈육을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통곡의 벽은 좌절감을 주지만 눈물 맺힌 창문은 위로를 안긴다. 

창문도 같은 창문이 아니다. 호텔방의 창문은 훨씬 크고 화려하지만 기민지는 스스로 열고 나갈 수 없다. 부산의 뒷골목 작은 화분들이 줄 지어선 동네의 조그만 창문엔 집집마다 사연과 비밀이 묻어 있다. 여닫음을 선택할 수 있는 창문을 소매치기 당한 사회에서 탈출해 나만의 창문을 만들자. 비밀을 창문에 비추기도 때로는 창문을 열고 종이비행기를 날려보기도 하자. 



지금이 바로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다(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첫문장)



- 가짜팔로 하는 포옹을 읽고(150919)


나는 자칭 양심적 음주거부자다. 내가 먼저 술자리 제의하거나 주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술 마시는 모임에서 맥주 한 두잔, 소맥 한 잔 정도 마신다. 사회생활에서 술잔에 담긴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글자를 담은 편지다. 나도 정성스레 편지를 써 모르던 사람, 알고 지내지만 서먹한 사람에게 편지 한 장 건네고 싶다. 하지만 편지 쓴 후의 어지러움과 졸림의 고통이 편지를 쓰는 즐거움보다 커서 자꾸 미루고 피하게 된다. 술 잘먹게 생긴 사람이 술 못 먹는 고통은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 못 먹는 고통만큼 크다.


단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의 규호는 옛 애인 정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면서 알콜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씨'에 대해 말한다. 동대문 근처에서 옷가게를 하는 피존은 이혼남이고 몸집이 커서 닫히지 않는 셔츠 단추까지도 꼭 채워야 한다. 창문과 모든 문을 닫아야 직성이 풀린다. 


'술은 물보다 강합니다. 물은 몸에 에너지를 주지만, 적당한 술은 우리의 몸에 초능력을 줍니다.'(109쪽)



규호는 피존의 언행을 술자리에서 담담하게 풀어낸다. 풀어냈을 뿐 피존이 닫는 문과 채우는 셔츠단추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깊이 관여하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김승옥의 '1964년 겨울'에 만나 여관방에 묵는 남자들처럼. 공감없는 동정이 바로 가짜팔로 하는 포옹이 아닐까. 매일 마주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가짜 얼굴로 웃음짓는 것은 아닌지, 다음에는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과 마주치는 사물을 진짜팔로 하는 포옹을 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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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11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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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이청준)'을 읽고




- 등장인물




조백헌 : 원장, 현역대령

이상욱: 보건과장, 원래 미감아(문둥병 부모 사이에서 태어남)

주정수: 일제시대 원장

사토: 주정수의 오른팔

서미연: 분교 여선생, 사실은 미감아

윤해원: 보육소 선생, 서미연에 구애, 

이정태: 소록도 기자

황희백: 장로, 어릴적 문둥병 아저씨를 따라다니면서 끔찍한 경험을 함




1. '새 원장이 부임해 온 첫날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 탈출 사고는 실상 새 원장에 대한 우연찮은 부임선물이었다. 새 원장은 부임인사를 하지 않았다. 탈출 사고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천국'의 첫 문장이다. 새 원장이 부임할 때면 으레 '탈출사고'가 일어난다. 원하면 소록도를 나갈 수 있는데도 굳이 돌뿌리 해안근처로 가서 도망질을 한다. 그렇기에 원장의 부임선물이다. 



원장은 인화단결, 정정당당, 상호협조, 재건을 모토로 자신만의 계획에 따라 섬을 바꿔 간다. 가장 먼저 문둥병 환자로 이루어진 축구팀을 만들었다. 몇차례 친선경기를 하고 공식경기에 출전하고, 도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다음으로 바다를 막아 간척사업을 한다. 나병 환자들의 낙토를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하에 원장부터 원생까지 하나가 된다. 그러나 몇년에 걸친 노력에도 투석과 성토작업을 쉽사리 끝나지 않고, 조백헌 원장은 전임발령이 나버린다. 그 즈음 원장의 사업을 경계하던 이상욱은 섬을 탈출한다. 



7년의 시간이 흘러 기자 이정태가 소록도에 재 방문하고 이정태는 원장이 아닌 주민으로 돌아온 조백헌 원장으로부터 이상욱이 보낸 2통의 편지를 건네받고 본다. 





2. 원장의 명분은 명백하다. 바다간척을 통해 소록도의 자생력을 확보하고 개간한 땅을 주민들에게 배분해서 낙토를 건설한다는 목표다. 이상욱은 냉소적이다. 일제시대 원장인 주정수와 똘마니인 사토가 낙토건설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핍박당했기 때문이다. 명분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명분의 독점화'는 선택가능성을 배제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부정하는 것은 공산이념과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추종하는 것이다'는 주장을 보자. 현대 시민이라면 '민주공화국, 복수정당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명분'은 옳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만능은 아니다. 국민의 선택의 의해 선출된 대표가 위임의 취지에 반하거나 국민의 뜻에 반해 사욕을 추구하거나 자본에 천착하고 확장과 팽창에만 중점을 둔 나머지 소외계층을 살피지 않는 폐단이 발생함에도 오직 '명분'만으로 밀고 나간다. 




3. 선택가능성과 자유의지가 결여된 명분으로 이뤄낸 결과는 그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그건 '당신들의 천국'이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다. 섬안의 사람들의 천국이 아닌 섬 밖에서 섬안의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사람들은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표출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자유는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은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자유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자유는 불완전하며 믿음의 관계, 입장의 동일함을 바탕으로 공동운명으로 느낄때만 '우리들의 천국'이 된다.




4. '자유,사랑,탈출,동상,철조망..' 상징의 울림이 잔잔히 펼쳐지는 가운데, 실화에 기반한 소설은 무거웠다. 황희백 장로와 조백헌 원장은 대화는 한 사람의 발화가 한 페이지를 넘기도 하고 철학적인 문답이 오고 간다.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무게를 덜어준다. 황희백 장로가 문둥병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며 저지르는 행동들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서술한 '징비록'처럼 사실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한아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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