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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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단편, '상황과 비율'(단편소설집 '가짜팔로 하는 포옹' 중)





1. 춘하프로덕션의 사장 이정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감독(이하 '상감')차양준은 상황시리즈로 포르노 영화업계에 히트 기획자로 자리잡았다. 이를테면 '버스를 기다리다가, 피서지에서 보트를 놓친 후에, 회사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카페에서 커피 주문을 기다리다가'같은 상황을 애로티시즘으로 풀어냈다. 차양준의 작품을 대하는 의식은 확고하다. 상황과 전희와 섹스의 비율은 1:1:2 여야 한다. 




2. 상황과 이야기를 중시하는 차양준과 달리 춘하프로덕션의 또다른 축인 오형수 감독은 이미지와 편집을 중시한다. 차양준이 '봉테일'로 불리는 '괴물'의 봉준호라면 오형수는 콘티없는 촬영으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나, 기획자와 감독의 위치로 보나 둘은 물과 기름이다. 




3. 오형수가 디렉팅을 하는 작품 중에 뒷부분이 남은 것이 있다. 주인공은 '송미'라는 28세 포르노 배우다. 오형수와의 갈등으로 촬영중단은 선언하고 잠적했다. 그녀는 터뜨리는 데서 성적 쾌감을 느낀다.  비닐봉지에 공기를 가득 넣어 발로 밟을 때 나는 '펑'소리는 마치 자위를 하는 도중 느끼는 오르가즘 같다고 말한다.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송미'를 설득하기 위해 차양준이 나선다. 그는 특기를 발휘해 그녀가 얼마나 시장에서 반응이 좋은지, 왜 그가 잔여 촬영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통계를 들먹이며 차근차근 말한다. 송미는 그런 차양준의 말투가 잼있고 묘한 매력을 느끼고 촬영장으로 복귀한다. 





4. 차양준과 오형수의 대립은 상황과 이야기 vs 이미지와 편집의 가치충돌이다. 미술, 음악, 소설같은 예술작품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선택은 창작자의 몫이다. 대신 상황과 이야기는 뉴스와 르포를 넘는 미적 예술성을 함유해야 하고 이미지와 편집은 인상의 조각들을 있음직한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 어떤 요소가 많고 적냐의 문제이지 일도양단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5. 예술문제를 넘어 사회에서 일어나는 논쟁적인 문제에서는 절차와 실체(현실)의 동시 충족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에너지 수급을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다고 가정해보자. 에너지 안정적 공급이라는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도 이해관계인들을 설득해 나가는 상황과 절차가 생략되거나 무시된다면 발전소 건설은 정당화될 수 없다.



작가의 의도도 분명 상황과 이야기를 부각하기 위한 인물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송미'를 촬영장에 다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설득의 과정과 상황이기 때문이다. 탁구공이 요리조리 장애물을 피해 데굴데굴 구르다가 누군가의 발에 밟혀 '펑'터지는 상황을 촬영때마다 상상한다는 송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건 '상황'이다.





창문 만들기 - 김중혁의 단편, '픽포켓' (단편소설집 '가짜팔로 하는 포옹' 중)을 읽고

1. 이호준과 장우영은 '기민지'라는 28살 가수를 좋아한다. 호준은 그녀의 종아리와 노래를 우영은 가슴과 춤을. 그녀는 최근 연인 k군과 결별했고 신곡 '안녕을 훔치다'의 부진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어느날 '기민지'가 실종되었다는 기사를 본 호준과 우영은 예전 그녀의 잡지인터뷰의 중 '부산 바닷가 호텔 꼭대기방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푹 쉬고 싶다' 말을 떠올린다. 무작정 밤기차를 타고 기민지를 찾으러 부산으로 내려간다. 오랫동안 연락은 못하고 살았지만 부산에는 동창 '송진구'라는 믿는 구석이 있다. 

'역 앞을 벗어나자 주택가인 듯한 조용한 동네들이 나타났다. 밤이 깊었지만 불 켜진 집이 많았다. ... 모든 창문의 빛이 달라 보였다. 

'밤에 대도시에 갈 때면,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집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뿐인가. 집안의 방마다 비밀이 있으며, 그 방에 살고 있는 수천 수백 명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을 품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문장)" (67쪽)

송진구가 사는 곳은 나즈막한 담벽에 조그마한 화분이 줄지어 놓인 골목을 따라 가면 나왔다. 



2. 기민지는 잠적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채 외부와 차단된 호텔 27층에서 며칠을 보낸다. 어찌어찌하여 탈출한 후 기획사 사장 조남일에게 전화하는 도중 가방을 소매치기(픽포켓)당한다. 범인을 쫓아 달리고, 놓치고, 도달한 곳은 송진구가 사는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이다. 

기민지는 창문 보기를 좋아한다. 회사대표 조남일은 스캔들을 의도하고 K군과 민지를 만나게 했지만 K군은 연인이 있었다. K군의 집에 나와 그 집에 어른 거리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보며 기민지는 질투가 났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87쪽)



3. 벽은 안과 밖을 단절시키지만, 창문은 소통과 단절의 매개체다. 창문의 크기에 따라, 빛의 양에 따라 커튼을 치기도, 폐에 산소를 채우듯 활짝 여는 때도 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옛 추억에 잠기고, 누군가는 떠나보낸 혈육을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통곡의 벽은 좌절감을 주지만 눈물 맺힌 창문은 위로를 안긴다. 

창문도 같은 창문이 아니다. 호텔방의 창문은 훨씬 크고 화려하지만 기민지는 스스로 열고 나갈 수 없다. 부산의 뒷골목 작은 화분들이 줄 지어선 동네의 조그만 창문엔 집집마다 사연과 비밀이 묻어 있다. 여닫음을 선택할 수 있는 창문을 소매치기 당한 사회에서 탈출해 나만의 창문을 만들자. 비밀을 창문에 비추기도 때로는 창문을 열고 종이비행기를 날려보기도 하자. 



지금이 바로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다(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첫문장)



- 가짜팔로 하는 포옹을 읽고(150919)


나는 자칭 양심적 음주거부자다. 내가 먼저 술자리 제의하거나 주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술 마시는 모임에서 맥주 한 두잔, 소맥 한 잔 정도 마신다. 사회생활에서 술잔에 담긴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글자를 담은 편지다. 나도 정성스레 편지를 써 모르던 사람, 알고 지내지만 서먹한 사람에게 편지 한 장 건네고 싶다. 하지만 편지 쓴 후의 어지러움과 졸림의 고통이 편지를 쓰는 즐거움보다 커서 자꾸 미루고 피하게 된다. 술 잘먹게 생긴 사람이 술 못 먹는 고통은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 못 먹는 고통만큼 크다.


단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의 규호는 옛 애인 정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면서 알콜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씨'에 대해 말한다. 동대문 근처에서 옷가게를 하는 피존은 이혼남이고 몸집이 커서 닫히지 않는 셔츠 단추까지도 꼭 채워야 한다. 창문과 모든 문을 닫아야 직성이 풀린다. 


'술은 물보다 강합니다. 물은 몸에 에너지를 주지만, 적당한 술은 우리의 몸에 초능력을 줍니다.'(109쪽)



규호는 피존의 언행을 술자리에서 담담하게 풀어낸다. 풀어냈을 뿐 피존이 닫는 문과 채우는 셔츠단추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깊이 관여하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김승옥의 '1964년 겨울'에 만나 여관방에 묵는 남자들처럼. 공감없는 동정이 바로 가짜팔로 하는 포옹이 아닐까. 매일 마주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가짜 얼굴로 웃음짓는 것은 아닌지, 다음에는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과 마주치는 사물을 진짜팔로 하는 포옹을 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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