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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ㅣ 문학동네 시집 80
이병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좋은 사람들
-이병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골목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들이비치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나는 개미들의 행렬을 따라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뒤척인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한 눈발을 지켜보는 일(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낸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날마다 세상 위로 땅이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自整을 위해 詩를 한 수 읽기로 했다.
문득 다시 읽고 싶어진 그 시,
좋은 사람들. 어조에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읽힌다.
그래서 시 두 개를 얻은 밤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아.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잘 자라.
참고로 ;
저녁의 습격 / 이병률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만나기로 한 약속, 일찍 도착하여 서 있기도 뭣해 백화점 안을 둘러보기로 하는데
미리 와 있는 당신은 혼자서 뭔가를 먹고 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자 한 약속인데 뭔가 잘못 됐나 싶지만 어엿한 정각이 되고 모르는 척 백화점 앞에서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은 따뜻한 것이 먹고 싶다하고 콩깍지 밟는 소리 나는 골목을 돌아 찾아간 식당, 당신은 태연하게 백반을 먹기 시작합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우적우적 가슴 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저 일은 무슨 일일까 생각합니다
그때 오래전 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였다가 내 전생이었다가 십일월이었던 당신은 나에게 뱉어야 할 말 대신 깔때기를 입에 문채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문예중앙 2005 여름
어여쁘게 생겼다는 이병률.
이름도 꼭 음률쟁이 같아가지고 뭔가 유행가 한 자락, 슴가를 처연히 쓸고가는 노랫가락을 내지르는 듯.
우연인가, 내심 박정대 생각도 나고 윤제림 생각도 나고
실은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란 이런 것인데
이런 얘기는 아주 어려운 시를 지르고서야 받아준다는 것.
하긴... 누군들 저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래도 저것이 아름다운 시인 이유는
그렇게도 말을 잘 부리는 사람이 딱 이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것인즉
그래서 지극해지는 것이고 또한 간절한 것이 되는 거 아닌가 그 말.
그런데 말이지..
예전엔 안 이랬는데 말이야.
저 신파가 왜 이렇게 이쁘고 아픈 것이야!
늙은 건가?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