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다 - 하이꾸 이야기
전이정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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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한마디 나 한마디 가을 깊어가는구나



かれいちご それいちご        あきふか
  彼一語     我一語       秋深みかも



 



                                                  -타까하마 쿄시(1874~1959), 『六百五十句』



*키고 秋深し(가을)      키레 秋深みかも     키레지 みかも


 



그가 한마디 던지면 나도 한마디 던진다. 주위엔 정적만이 있을 뿐이다. 잠시 후 그가 다시 한마디를 던진다. 나도 한마디의 말로 응수한다. 또 다시 주위는 정적에 휩싸인다. 깊어져 버린 가을, 삶의 애상을 느끼게 한다. (중략)


대화를 나누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내던지는 한마디 한마디 사이의 정적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이다. 배경이 되는 이미지는 드러나 있지 않고, 분명하게 그려진 것은 '그가 한마디 나 한마디'이다.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은 일체 생략되어 있다. (하략)



 -<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다>에서 발췌



 



2. 한 마디


로 줄이고 줄이려면 거기 생략된 것을 알아들어 주는 벗이 필요하다. 그 者가 아니면 한 마디 한 마디 사이의 정적을 누릴 수가 없다. 설명해야 되고 설득까지 해야 되면 다 귀찮아진다. 너와 내가 다르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다름을 즐기는 걸로 할 일을 다하는 거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도, 그의 한 마디를 알아들어야  다름도 눈치챌 수 있지 않은가. 


많은 시간을 같이 쌓아서 결국 그 한 마디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그 사이 정적이 아무리 오래되도 거기는 따땃한 물 속이거나 시원한 바람 속이거나, 둥둥 즐거운 뭉게구름 속일 것이다. 그런 情景에 들려면....  


어렵겠다. 생활도 생활이거니와 그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면 이쪽 머리털이 뽑히니까, 좀 쿠울하게, 거리를 약간 두고, 새뜻한 반투명막을 쓰고, 그냥 건들, 저는 이렇지요. 그대는 그러하네요. 그런 거네요. 뭐 상관없어요. 그래, 이것들도 한 마디는 한 마디다.  


3. 무언가 한 마디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나 부다. 왕가위. <2046>에서 그는 [사랑은 타이밍이다]라고 말한다. 그거 참 진부하고녀~.


 어제 <2046>을 봤다. 愛끓는 영화. [아비정전]에서 이젠 많이 흘러 왔음을, 그동안 보여준 것들이 2004년, 여기에 다다라 있다는 것을, 그러나 다른 버전은 조금 또는 아주  다를 수도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그의 얘기를 듣고 왔다. 그동안 안고 지냈던 자기 캐릭터들을 하나도 못 버리고, '이 애를 어쩌면 좋아', 하나 하나, 십수년 후의 그들을 <2046>에 풀어 놓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난 그의 영화들이 <2046>에 침범하는 것을 지켜봤다.


동시에 이미 죽어버린 나의 캐릭터들도 꿈틀거렸다. 그들은 이미 다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2046>에서 돌아다니는 미미와 리첸과 징웬, 탁과 차오를 바라보는 동안 아직 그들이 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줄줄이 그들이, 시냇물처럼 졸졸졸, 내 마음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버릴 수 없는 것일까? 그들도 혹시 자라고 또 늙고 있었을까? 어떤 한 마디를 하려고 아직까지 좀비처럼 기필코 일어나는 것일까.


사랑은 타이밍이다. 그게 어긋나서 할 수 없이 산 속 깊은 곳에 들어가 나무 한 그루에 구멍을 뚫어 그 속에다 얘기를 쏟아놓고 꼭꼭 막아두고 산을 내려온다. 구멍 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2046>은 그 구멍이며 앙코르와트 사원의 그 구멍, 아직 따지 않은 유통기한 만년인 통조림캔이다. 나는 이때 갑자기 탁 떠오른 시 하나를 적는다.  


4. 이 한 마디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정양, 『눈 내리는 마을』(모아드림 刊, 2001) 中



누구는 사라지지 않게, 변하지 않게 구멍 속에 소곤소곤 파묻고, 누구는 금방 지워질 모래밭에다 대고 크게크게 쓴다. 이것도 스타일일까. 나는 어떤 스타일일까. 누구라도 몸이 저린 말이란, 그 한 마디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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