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유교수의 생활 1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Y대 경제학부 교수, 유택.

도로는 우측통행, 횡단보도 이외의 곳에서는 절대 건너지 않는다. 싸고 맛있는 '삼치'를 위해서라면 생선가게 무대포 아줌마의 야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자유경제법칙에 충실한 학자의 밝고 명랑한 기록이다. <속지 中>

유택은 재미있는 노교수입니다. 평생 오후 9시 취침을 어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가 말하고 실천하는 정도(正道)에 그 누구도 반론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게다가 이 교수만큼 객관적인 눈으로 자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인물이란 사실 이 세상에는 없을 듯합니다. 그만큼 그의 판단과 평가는 절대적이지 않을 수 없구요. 결국 이 얘기 속의 누구나 유택교수를 좋아하고 또 존경하며 의지합니다. 작가가 강변해서 그러냐구요? 아닙니다. 그건 강요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수긍되는 것입니다. 꾸덕. (--)(__)(--)

작가는 왜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까요? 제 생각엔 '스승 없는 시대의 반증'이 그 컨셉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 말하고 유택교수를 떠올리면 그 말이 무색해지니까요. 하지만 실제 인물이 아니니 그냥 내쳐 버릴까요? 그러나 스승이 언제나 실제인물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허구적 인물도 현실과의 접점이 있게 마련이지요. 제 어릴 적 스승은 사실 '니나'였어요.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와 <덕성의 모험> 속 주인공 말이지요.^^;; 지금이요? 아무래도 허구 속 인물인 데다 일본인이기까지 한 이 유택교수를 스승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나 하는 중이랍니다. ^^

비단 그의 생활만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노교수는 표정이 살아 있습니다. 그 의도의 진정성 때문이지요. 그것을 제대로 그려낸 작가의 실력도 빵빵한 것이구요. 사실 늙은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그려진 만화는 드뭅니다. 아무래도 簡略畵인데다 펜화이기 때문일 테지요.(그 면에서 요즘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배가본드>가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좀 다릅니다. 노인의 궁금함과 감탄, 안심, 기대, 만족 등을 표현함에 있어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그런 표정을 잡아내는 작가가 존경스럽기까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15권입니다. 게다가 엄청 심각한 주제를...--; 그러나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 부분이었습니다.

-전.. 그 곳에서.... 몽골인이 될 겁니다.
- ....야베 군
-전 꼭 증명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문화(Culture)는 농경(Cultivate)을 모계로 하고, 문명(Civillization)은 도시(Civy)를 모계로 해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근대'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습니다. 농경과도 도시와도 무관한 '유목'이라는 태고로부터의 생활 형태는 현실에 대해 안티테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체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싶습니다.
-음 그렇군. 하지만 태고로부터 농경민족이었던 일본인인 자네가 유목 생활을 할 수 있겠나?
-어떠한 생활 양식=하드도 결국 움직이게 하는 소프트는 인간입니다. 전 반드시 해낼 겁니다.

----몽골----

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거지?
구름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그 끝은 어디에 있을까?

가보는 수 밖에 없다. 뛰어 넘어도 뛰어 넘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음에 등을 떠밀리 듯이 인간을 고양하는 이러한 대초원에 과연 우리 고도경제사회에 대한 해답이 있을까?

-오오, 게일(유목민의 집. 조립식이라 이동에 적합하다.))이 많이 있군.
-들렀다 가요! 교수님.
-그랬다간 너무 후한 대접 때문에 배가 불러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거야.
-믿을 수가 없군. 우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하지만 이 곳에선 당연한 일이에요. 어떤 게일에 들어가도 반드시 후한 대접을 해주고, 원한다면 기분 좋게 재워 주기도 하죠. 그런 호의를 사양하는 건 오히려 실례예요.
-그러지 말고 책에서 읽은 지식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것은 민족성에서 유래하는 친절한 마음에서인가?
-아니요.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예요. 계절마다 목초를 찾아서.... 잃어버린 말과 양을 찾아서.... 유목이란 이동의 반복이거든요. 이동 중 침식은 도중에 만나는 게일 사람에게 신세지는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설령 생판 모르는 남일지라도. 하지만 몇백 년씩이나 반복되어온 일이기 때문에 당연시되고 있어요. 몽골이라는 제한된 지역과 생활형태에 있어서는 고도로 합리화된 경제체제라 할 수 있죠. 교수님 식으로 말하면...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난 동시에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일본말이 떠오르는군. 내가 지금 호란과 이렇게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내일 헤어지고 말면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현실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 만남이라는 건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다고 할 수 있지.
-푸하. 의외로 감상적이시군요, 교수님. 메일, 휴대폰, 비행기.... 인간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들은 유목민이에요. 바람처럼 어디로든 멀리 떠나 버리는.... 그들에겐 전화도 없어요. 아깐 웃었지만 이곳 몽골에서는 지금도 일기일회가 살아 있어요.
-호란. 그들이 바람을 따라갔다면 우리도 같이 바람을 따라가 보는 게 어떨까.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거야.

                                                                                       15권 중

멀고도 독특한 세상(몽골)에서 사랑하는 거기 여인과 살고자 하는 일본 청년 야베의 이상을 보면 그저 감상적인 얘기다 치부하고도 싶지만 유목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와는 단절됐던 생활 형태에 대한 유전자의 향수(?)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키토 시베리안. 좀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반도에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유목민의 후예니까요. 또한 지금의 우리는 해결을 기다리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도의 경제사회를 살고 있으니 유택교수의 말처럼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무시하고 굳이 이 쳅터를 인용한 것은 다름 아닌 '사이버' 세상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웹이라는 대지 위에 드디어 생활자들이 생겨나고 서핑이라는 여행을 통해 그들의 게일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데 말이죠. 의미심장하게도 만나는 게일마다 너무나 친절하고 배불리 먹여 주고 또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자면, 비록 실제 몽골을 겪어 보지 않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유목생활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일기일회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친절이라는 덕목 또한 웹이라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합리적인 생활형태임을 그 곳 생활자들이 이미 경험으로 증명해 놓았으니 말입니다. 유택교수가 찾고자 했던 것. 우리 고도경제사회에 대한 해답. 그것으로서 부상하고 있는 사이버세상의 경제. 그 미래를 현재의 몽골에 비교하는 몰역사적 기대보다는 유목에 대한 좀더 발전적인 기대가 생겨납니다. 유목생활이라는 하드로 소프트인 우리 인간은 과연 옮겨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말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요즘엔 모두 on이 아닌 off를 알짜배기라 하는데, IT보다는 굴뚝이라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그 시작이 언제나 미미했음을, 미심쩍었음을, 엄청나게 불안정했음을 기억합니다. 잊지 않고 유심히 주목해야 할, 그 틀을 익혀 두어야만 할, 욕심대로라면 발 한짝 담궈 놓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세상이 사이버 세상일 듯합니다.

오호호~

만화를 통해 무슨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공부하려고 만화를 집어 드는 경우도 없을 뿐더러 공부하라고 만화를 그려 내는 작가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끔 이렇듯 비범한 만화가로부터, 열정을 가진 만화편집자로부터 본의 아니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만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만화 역사가 긴 일본이 가진 소프트라고도 할 수 있지요. 우리 만화가에도 이런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리라 기대합니다.

일본 만화층의 두터움을 드러내 주는 <천재 유교수의 생활>. 시츄에이션 드라마라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그만큼 많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고, 놀랍게도 개개가 허접한 것이라곤 없다는 것이 그 탁월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츄에이션 또는 옴니버스 스타일의 만화를 꼽으라면, <호텔 아프리카>, <닥터 스크루>, <마스터 키튼>, <못 말리는 간호사>, <아름다운 시절>, <갤러리 페이크> 등이 있지요. 이 모두가 <천재 유교수의 생활>과 같은 감동을 줄 것임을 약속합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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