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태어나는 자리
황동규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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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황동규의 시는 난해하다. <즐거운 편지>이외에 내가 즐기는 그의 시는 없다. 우리나라 시단에서 그의 위치를 생각해 보건데 이는 상당히 나를 위축시키는 일이라서 그의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선택한 책이다. 이동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읽고 나서 구입했다. 심심할 때, 텅 빈 상태가 좀 조마조마해질 때 다시 들고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 설명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지 싶다. 그러나 시를 공부하고자 했으니 '시가 태어나는 자리'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읽으면서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고 배운 부분도 많았던 책이다.

그동안 나는 에세이류는 절대, 네버, 손대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에세이는 쓰레기인 경우가 많아서 한 장을 넘긴 예가 드물다. 자만이라고 누군가 말해도 할 수 없다. 실제로 쓰레기가 9할이 넘는다, 여전히.

이 책도 그 에세이류에 속하는데, 가려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린 책이다. 산문에 있어 격조를 따진다면 그 격조는 충분히 넘친다. 좋은 산문집이다.

메모한 부분은 무척 많은데 너무 많아서 몇 개만 올려두어야겠다. 내가 쫑알거렸던 부분이 있는 것만 말이다.

-저녁에 한 잔 생각하며 돌아오는 하늘가에

 외로이 떠있는 태양을 위해 쓴 몇 줄의 산문,

 산문이 뒤틀렸다 풀리며 탄력을 받아

 만들어진 몇 마디 시구(詩句)들,

;머리 위로 뚝 떨어진 시구와 산문이 뒤틀렸다 풀리며 탄력을 받아 만들어진 시구의 차이.

 내 '겨울숲'을 생각하면, 그 성취를 생각하면....

-'성긴 눈',......주로 따스함이 깃들어 있는 눈(6.25직후의 폐허를 하루아침에 아름다운 정경으로 바꾸던 눈)이 성겨진 상태, 즉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상태의 표현.....

;'눈'의 이미지가 따스함이란 말이지.

 포근해 보이는 그 부피감, 그 가벼운 부피감 때문인가?저 아닌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

 보송보송해 보이는 눈.

 그러나 도시에는 눈이 내려 쌓일 곳마저 정해져 있는 듯하다. 그저 그 두께를 더하는. 가난마저도.

- ......

그 흔한 망초꽃 속의 어느 눈썹 섭섭한 망초 하나와 만나

인사를 주고 받겠는가?

"듣고 보니 우린 꿈이 같군."

"끝이 환했어."

;눈(目) 속에서 흔들리는 꿈을 보면

두 가지 감정이 밀려온다.

같은 꿈과 알 수 없는 꿈,

같은 꿈에서는 연민이,

알 수 없는 꿈에서는 호기심이.

사람에게 그래도 가장 기우는 것은

꽃도 나무도 새도 아니라 사람에게 가장 깊게 기우는 것은

모두 꿈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꿈으로 그의 몸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같은 꿈에 기대어 같은 속도로 달려나가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그의 꿈에 기대어

결코 만나지 않을 속도로, 우연에 기대는 속도로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정말 꿈같지 않은가.

그 꿈이 정말 환하지 않은가.

-방파제에는 흰 새벽의 달빛이 걸려 있고, 바닷물 위에는 이따금 순색(純色)의 물고기들이 높이 뛰어올라 공중에 남아 있곤 한다. 조용히 일렁이는 바다를 가득 채우는 아침해도 싱싱하고 맑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내 정신도 그만큼 맑고 밝다.

;바닷물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순색의 물고기들을  나, 본 적이 없다. 어느 바다에서 그런 물고기들을 볼 수 있겠는가. 해변에서 그런 바다를 과연 볼 수 있을까? 이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집 속의 배' 속이라서 그런 것일까? 집 밖으로 배를 띄우면 어느 날 그 눈부신 물고기, 공중에 남았다가, 나, 밝고 싱싱하게 돌아오는 길을 따라와 줄까? TV속 그 수많은, 뛰어오르는 물고기떼.  

-술집 밖에 공짜달이 떠있다.

;술 먹었을 땐 모든 게 공짜같다. 그래서 늘 술을 먹고 즐겁다.

오늘은 술 안 먹기로 한다.

오늘만이 아니라

이 시간 이후부터,

공짜가 아닌 세상이 분명하니까,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기로 했다.

 

네가 공짜로 오고

네가 공짜로 나를 안고

네가 공짜로 내 바지를 놓아 주고

그래, 공짜로 네 머리로 나를 받는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언니 장부에 내가 치러야 할 액수가

잉크까지 말라있게 되지만

그걸 잊어 버리려고 먹은 술에

그만 저 달처럼 모두

에이, 또 다 공짜같다.

다시 오늘은 술 안 먹기로 한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어둠 속에서

눈 내리는 소리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

가본 부석사와 못 가본 부석사가 만나

서로 자리를 바꾸는 광경이 나타난다.

창의 단추를 다시 잠그고 자리에 누워도

들린다, 들린다. 창의 고리를 벗기고 다시 눕는다.

내 감춘 모든 것이 나에게 들켜

부석사가 되고 더러는 떨어져나가

하회가 된다.

다시 가보아야 하리.

가는 길은 사람 사이에서 자신에 들켜 숨쉬며

자기가 되는 길이리.

우선은 마음의 관리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새벽 눈 위에 찍힌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보리.

모든 마을의 맨처음 입구(入口)를 만나리.

                             -겨울의 빛 중 마지막 연.

 

;황동규의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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