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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 5년 동안 이 소설을 꺼내 읽다 말다를 얼마나 했는지... 그동안 소설 아닌 것에 눈길이 가 있었고, 눈길 가는 곳에만 집중하는 내 습벽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책꽂이에서 홀대를 받았던 그 소설. 읽은 앞 부분의 몇 개 챕터만으로도 이 소설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 거라는 견적 정도는 뽑아지는 게 애초의 내 깜냥이라서 이제야 소설로 돌아온 내 눈길이 되었기에 정독할 수 있었던 소설이다. 내게 있어서는 지금의 이 눈길로만 소설읽기가 가능하다.
그래. 이럴 줄 알았던 것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소설을 쓰는 데 바쳤을까. 그는 이 소설을 쓰며 얼마나 진지했을까. 스토리보다 소재에 마음이 끌려 그 넓고도 협소한 바운더리에서 도통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임은 명약관화다. 세밀화를 세밀하게 그려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안을 그려야 했을까. 얼마나 많은 기안을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 찢어 버려야 했을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선택했을 이 소설의 구성법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빌리고 싶은 생각이 정말 꿀떡같다. 그동안 그리고 지금에도 수도 없이 시안을 잡고 버리고 또 잡고 하는 중이라서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소설의 고유한 구성법에 매료되고 만다. 물론 그것을 완독한 이후 나도 모르게 잊혀지는 것이 상례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성법은 잊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파워풀해서이다. 사건은 분명히 진행되고 진행의 나레이터는 등장인물. 한 사람에게 한 개 챕터가 할애된다. 왜 그 부분의 진행을 그가 맡았는지는 모른다. 왜 그를 통해 그 부분을 이해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 부분을 그 아닌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들었다면 얘기는 어떤 이면을 새로 보여주게 될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두 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분량은 열 권의 부피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때 역사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바탕이 된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대체로 독자를 도발하는 소설을 제일급으로 친다. 같이 터키소설인 <에프라시압 이야기>에서도 느꼈지만 그 문화의 기저가 참으로 오래되고 튼튼하고 풍성한 나라의 소설답다. 후반의 달리기가 워낙 빨라서 왜 그 사람인가, 왜 그여야 하는가를 한눈에 깨닫기가 쉽지 않았다. 앞부분, 반복에 반복을 하는 읽기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훗날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있다. 도발된 상태가 아닌 상태가 되어서 읽는 맛도 보고 싶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