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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어서 이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작가의 마음이 함께 읽혀지는 소설이었다.
읽어가는 나 역시 그만큼 속도감이 붙어서 하루만에 읽기를 마쳤다.
처음에, 문장이 하도 심심하여
긴 소설만 찾아 읽는 작금의 내 습관 때문인가 싶기도 한 실망감이 앞섰다.
가끔은 이 사람, 직전에 김훈을 읽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만큼 그 문장이 짧고 담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작가의 소설이 처음이므로 원래 이 이의 문장일 수도 있다는 게 결론.
그렇게 읽는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억울하게 죽어 서대문 밖에 머리가 걸린 역관의 소중한 외동딸이
러시아로 들어가 따냐가 되어 봉이 김선달 뺨치는 사기꾼으로,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의 연인 아닌 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아버지의 의문사를 파헤치고 범인을 잡고 응징하며
단단한 정체성으로 미국에까지 건너가 카페를 열고
뿌쉬킨의 시를 읽으며 살아가게 되는 일종의 성장소설이 노서아 가비이다.
아관파천과 고종황제가 즐겼다는 노서아 가비를 엮어 짧고도 풍부한 서사를 이끌어내고 있다.
우리가 아는 조선은 참으로 단면뿐이다.
팩션이라는 장르가 이 단면의 역사에 이렇게 자꾸 켜를 더한다.
조선의 계집아이가, 그것도 역관의 자식이 압록강을 넘어 러시아까지 흘러가
위조전문가로 얼음여우 사기단의 은여우가 되고
유럽의 귀족들에게 러시아 숲을 파는 사기꾼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다
민비를 잃고 시름에 빠진 황제의 단 하나 믿음직한 사람으로
황제의 목숨을 구하고 국민의 의리를 지키는 대역사.
그래. 그런 일이 조선 역사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읽기 시작한 즈음에는 만족스럽지 않은 문장의 깊이에 시간낭비인가 싶었지만
다 읽고난 느낌은 낭비가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만족감이었다.
그럼에도 별 하나 모자란 것은
소설이란 게 그다지 우연에 기댈 필요가 없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우연을 남발했다는 점이다.
그 우연에 기댐이 극적인 진행과 결말을 낳은 것이겠으나
의도하지 않았는데 모든 의문을 풀어줄 근거가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그런 인식의 재구성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필 이반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그 사람이라니.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어지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챕터 제목들은 도무지 내용과 연결짓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그 제목 문장들이 뭐랄까... 허세끼 다분한 남세스러운 라디오 멘트를 듣는 심정이 되고 만달까.
작가가 한번쯤 이렇게 놀고 싶었구나 싶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큰 흠이라 여기지는 않지만 소설의 완성도를 좀먹는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모르지. 노서아 가비.
싸이폰을 갖추고 러시아 가비를 내려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며 읽어나간다면 아주 걸맞게 느껴질 문장들일 수도.
하긴 번역소설만 읽었던 이 즈음 우리 문장이 그리워서 그나마 선택한 책 중의 하나임을 생각하면
이만큼도 감지덕지해야 할 부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