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의 소설읽기를 되돌아 본다.
좋은 소설들이 많았고 그걸 찾아 읽는 보람도 때마다 느끼며 즐거웠다.
좋은 소설일수록 내 안의 창작열을 돋궜고
그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며 읽는 속도가 느려졌던 경험도 심심찮게 있었다.
최근에 윤성희 <하다만 말>을 읽으면서는
아예 그 등장인물들에 사연까지 넣어주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단막 드라마대본까지 홀린 듯 쓰고야 말았다.
결국 표절이 된 셈이어서 어디든 내놓을 만한 것도 되지 못했다.
물론 그걸 감수한 건 나다.

하여튼 스밀라를 읽으며
내가 그동안 에세이를 읽는 태도로 소설을 읽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결말이라든가 그 등장인물들의 속내가 궁금해서 읽은 소설이란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
그렇다면 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사실도 아닌 허구를 무엇때문에 500페이지를 넘겨가며 지난하게 읽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완성한 작품 하나 없지만 여전히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인 이야기를 써서 무엇하려고, 하는 물음이 자꾸 내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소설에, 소설 쓰기에 홀려 있는 것일까.
왜 소설을 읽으면서 거기 나오는 작가의 잠언 같은 깨달음들에 공감하며 줄을 긋는 것일까.

문장과 수사를 즐겨온 것만은 사실이다.
주제를 즐겨온 적이란 없다.
오로지 문장과 수사와 잠언이 된 혜안과 지식을 즐겼다.
그리고 가끔은 그 탁월함과 마주치며 내가 만든 인물들의 동선과 대사를 고쳐왔다.
결코 완성될 리 없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게는 아무 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목적도, 선택의 가늠쇠도, 정착지도, 귀향지도, 근본적으로 지도마저도 없다.
나는 지금, 스밀라는 알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빙해를 항해하는 느낌이다.
 

항해는 가만히 서있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이다.(394p.)

주위의 지형지물은 변하지 않고 그저 때로 온도가 바뀌는 바람과 내 시력이 허락하는 선을 수평선 삼아.
목적지도 잊어 버렸고 엔진은 점점 허약해지는 그 숨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있고
선체는 이미 낡고 군데군데 많이 부서졌다. 한때 선체를 장식했던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은 10년도 전이었다.  

나이가 들면 어떤 걸 봐도 뭔가 떠오르기 마련이다.(433p.)

이제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걸 아직 씌여지지도 않은 내 소설에가 아니라
남아있는 내 생애에다 투영시켜야 함을 느낀다.
굳이 그보다 더 긴 사족일랑 집어치우고 그 에센스만을 가져다 인소싱이나 해야할 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스밀라를 읽으며
이렇고 저런 과정을 거쳐 이제 더 이상 소설을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나는 그동안 소설을 아주 재미없게만 읽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재미마저 사실은 전혀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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