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 시장주의 의료개혁에 맞서는 공공병원 의사의 고군분투기
파트릭 펠루 지음, 스테판 샤르보니에 그림, 양영란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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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국민의료보험제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국민의료보험제도'는 아주 잘 만들어진 일 같다. 병원 진찰과 약 처방을 받을 때에 본인 부담금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보험공단의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기관지가 좋지 않는 우리집 세 아이들은 겨울철이면 일주일이 멀다하고 병원을 찾는데, 그 역시 많은 비용 부담을 덜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내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호박죽을 끓여서 신호등을 건너가고 있는데 그만 차에 치인 것이다. 그 일로 왼쪽 무릎 아래가 분쇄골절을 입었고, 오른쪽 발목 부분은 몇 군데 금이 갔다. 그것을 가해자가 든 보험회사로부터 모든 치료를 받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국민의료보험제도를 민영화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종부세도 감면해 주려는 마당이니 돈 있는 부자들이야 더욱 좋을 것이다. 많은 돈으로 값비싼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없는 서민들은 자체 부담 때문에 도무지 치료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파트릭 펠루의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런 폐해를 미리 예측하게 한다. 1995년부터 프랑스 공공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한 그는 2003년 여름 프랑스의 폭염사태로 큰 인명피해가 있을 것을 내다보고 언론에 경고를 보냈다. 그로 인해 스타가 된 의사다. 그는 현재 사르코지 정부가 수익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공종합병원들을 기업화하려는 것을 최전선에서 저항하고 있다.

사실 프랑스 사회는 사회보험제도, 다시 말해 비영리의료법인(공공종합병원) 제도를 도입한 나라라고 한다. 이 책을 옮긴 양영란 님도 그런 제도 덕택에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든 기간 동안의 입원료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육아비용까지 지급받을 정도였으니 그 혜택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물론 그 일은 19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사르코지 정부는 비영리의료법인을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이 고갈된다는 명목 하에, 아울러 수익성을 최대한 끌어 올릴 수 있는 명목 하에 ‘2007년 종합병원개혁계획’을 세워 공공종합병원 제도를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응급실의 의사와 간호사와 병상의 수를 대폭 줄이고, 병원의 동력과도 같은 배관과 기관공들까지도 외주용역회사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으니 그가 몸을 던져 막으려는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의 공공종합병원은 특정 계층이나 특정 부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프랑스인 모두의 재산이며, 프랑스 사회의 안정망을 형성하는 마지막 보루다. 그것을 해체하는 일이란 그 사회를 악창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르코지 정부가 불도저처럼 그것을 밀어붙이려하고 있으니 그가 시민들과 함께 막아서려는 것이다.

“의료행위별 수가 책정을 보자면, 그걸 시행해야만 병원은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다. 그러니 공공종합병원이나 사설종합병원들이 저마다 가장 수가가 높은 의료행위에 치중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병원 문화는 사라지고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만 남게 되어, 급기야 환자를 선별해서 받는 비극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162쪽)

그와 같은 일들이 아직까지는 우리사회에 일어나고 있지 않다. 나 같은 서민들에게는 극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종부세를 점차적으로 없애겠다고 하는 현 정부가, KBS를 민영화하듯이 혹시 의료보험제도를 민영화하려고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이 끝부분에 삐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지만, 현 정부가 종부세를 없애겠다고 벼를 것이 아니라, 종부세를 그대로 두거나 아니면 좀 더 낮춰서 더 많은 세수를 확보하여 프랑스처럼 '전국민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게 해 주는 것은 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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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MB氏를 부탁해 - 집단지성,공영방송을 말하다
집단지성 엮음 / 프레시안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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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MBC의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가 촛불집회의 기폭제가 되었다. MBC가 그 일로 거리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물론 이명박 정부에겐 눈엣가시로 거슬렸다.

그만큼 한 번의 공영방송의 방영은 네트워크 시스템의 수십만 번의 조회수와 댓글보다 그 파급력이 강력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보도하려는 공영방송의 길목은 정치권의 눈치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제 위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MBC, MB氏를 부탁해>(집단지성 편저, 프레시안북 펴냄)는 보수언론과 보수집권 세력들이 KBS를 장악한 이후 MBC를 민영화하려는데, 왜 그러는지,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공영방송의 길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여러 계층의 여러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록하여 엮은 책이다.

"대중들을 공영방송의 외부자가 아닌 핵심 담당자로 인정하고, 미디어 공공성 의제를 능동적으로 논의하면서 그들을 직접 행동할 주체로 설정하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이다. 공영방송의 문제를 시민사회와 운동 진영에게만 위임하지 않으며, 미디어 공공성을 학자들의 독점적인 연구 주제로 남기지 않으려는, 공영방송 담론 대중화의 야심 찬 기획이다."(여는 글)

왜 정부와 여당은 '프렌들리 프레스'를 내세우며 KBS를 장악하려 했을까? 그 다음 목표로 MBC까지 접수하려고 민영화 방안을 밀어 붙이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해외 선진국의 경우 1공영제체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그런 바람을 타야 한다고 부채질한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과 일본이 '1공영 다민영' 방송일 뿐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과 덴마크와 스페인은 모두 2개 이상의 공영방송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공영방송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니 축소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뉴스 프레임 형성과 논조 주도력도 공영방송보다도 조·중·동이 95%이상을 차지하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들은 민영화를 통해 경영합리화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억지논리다. 이미 민영화한 KT의 수익률 가운데 50% 이상이 외국에 유출되고 있고, 직원들도 절반 이상 일자리를 잃었다. 프로그램의 다양성 역시 이윤창출이라는 태생적 목적 때문에 시청률 경쟁에만 매몰되어 다양성은 훼손될 게 뻔하다.

그런데도 굳이 MBC를 민영화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권의 하수인으로 두기 위함에서이다. 이른바 정치적인 나팔수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그래야만 '땡전뉴스'처럼 집권세력을 대변하는 방송으로 길들일 수 있고, 정권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재연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광우병의 위험성을 밝히고 이명박 대통령의 낙하산 인사와 방송 장악 의도를 낱낱이 파헤친 <PD수첩>, 촛불집회를 '천민민주주의'라고 폄하하는 집권여당 국회의원의 '천민자본주의적' 뇌구조를 펼쳐보인 <100분 토론>, 공영방송들이 민영화된다면 이와 같은 방송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다."(121쪽)

그렇다. MBC가 만일 공영방송의 길목을 지키지 못하고 잃게 된다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여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규명하지 못할 것이요, 조·중·동의 프레임에 갇혀 의제설정과정에서도 획일화될 것이요, 국부가 외국에 유출될 것이요, 직원들도 대다수 퇴출될 것이다. 실로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다.

과연 MBC를 민영화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촛불집회를 통해서도 많은 지지를 받은 바 있듯이 시민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지켜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민들이 나서서 행동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MBC를 지킬 수 있는 길은 MBC 내부구성원들의 몫에 달려 있다. 이는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을 신임 KBS 사장으로 임명한다는 보도와 함께 KBS 내부의 노조와 사원행동간의 엇갈린 행보를 통해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는 부분으로서, MBC만큼은 스스로 한 데 뭉쳐 그 길목을 지켜내야 한다.   

"'공영방송사수'는 시민들의 지지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완성과 책임은 결국 MBC 구성원들의 몫이라는 말이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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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ex 2009-06-2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 더욱 많은 시민들이 계몽되고 자각하여서 현정권에 강한 반발감을 갖고 반대적 입장에 있게된다면, 현정권의 권력도 지금과는 달리 그리 자유롭게 자행하지 못하고 대다수 여론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0.1 그램의 희망 - 삶의 매순간은 신성하다
강인식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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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으로 널러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는 말에서 떨어져 사지마비장애 판정을 받았다.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한없는 수렁에 깊이 빠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며 웃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대 이상묵 교수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공동으로 진행한 야외지질조사 프로젝트에서 차량이 뒤집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 일로 아랫부분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 마비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6개월 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기적을 이뤄냈다. 어려운 치료과정을 걸쳐 전동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다시금 강단에 서게된 것이다. 횡경막으로 정상인처럼 강의하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을 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상묵·강인식의 <0.1그램의 희망>은 그가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에 들어가 MIT-우즈홀 공동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일, 1998년 한국해양연구 책임연구원 및 첨단해양탐사선 온누리호의 수석과학자로 진두지휘한 일, 2003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되어 2006년 불의한 사고를 당한 후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한 모든 과정을 밝히고 있다.

2006년 7월 2일 아침, 이상묵 교수는 일행들과 함께 카리조 평원의 소금 호수를 관찰 한 뒤, 캘리포니아의 데스밸리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겪었다. 그로 인해 한 명의 학생이 그 자리에서 이 세상을 떠났고, 이상묵 교수는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주 후 그가 받은 병원진단은 C4가 완전히 손상된 것이었다. 이른바 뇌에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척추에 번호가 매겨지는데, C1-C2를 다친 사람은 평생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고, C2-C3가 손상된 사람은 배변이나 배뇨의 통제가 불가능하고, C4이하로 손상된 환자도 그와 비슷하다고 한다. 

C4의 손상으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AD(Autonomic Dysreflexia, 자율신경과반사)였다고 한다. 아랫부분이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호스를 끼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막히거나 눌려서 방광이 꽉 찼고, 그로 인해 혈압이 차올라 뇌혈관이 터질 뻔한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사고를 통해 장애를 입었지만, 다시 재기해 활동하는 데 필요한 최소의 부분은 하늘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횡경막만을 이용해서라도 정상인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 보아도 나는 큰 행운아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한다. 다시 주어진 제 2의 인생을 가볍게 볼까 봐, 또 내가 방심을 할까 봐 하늘이 AD라는 감시자를 붙여 준 것이 아닐까."(79쪽)
 
현재 이상묵 교수는 모든 강단의 준비와 활동을 두뇌와 입김 하나로 움직인다고 한다. 머리로 생각한 것들을 컴퓨터에 옮겨 문서로 작성하기 위해, 컴퓨터의 마우스를 불고 빨고 하는 것으로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IT장비와 소프트웨어가 개발이 돼 있는 것 자체가 그에게 고맙고 감사할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 까닭에 그는 대학 강단과 더불어, 장애인들이 삶의 질을 높이고 구직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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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1:9-11)

 

지난주에 어떤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화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분으로부터 기도를 받고 일을 시작하고 있는데, 지금은 영 개운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일을 그만두고 싶고, 또 다시 기도를 받아보고 싶어서 기도를 받아봤는데, 이번에는 처음 기도해 준 것과 다르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해 준 그 분에게 화를 냈는데, 그것이 성령해방죄는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전화내용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제게 전화를 건 분이 흔히 말하는 예언기도를 받았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혹 예언기도를 받아 본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뭔가 황홀하고, 앞날이 확 트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흔히 예언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점쟁이처럼 앞을 내다본다는 뜻의 ‘미리 豫(예)’자를 쓰는 ‘豫言’(예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은행에 돈을 ‘맡기다’ 할 때의 ‘맡길 預(예)’자를 쓰는 ‘預言’(예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점쟁이처럼 미리 앞을 내다본다는 예자의 예언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는 자입니다. 신약이 있기 전 구약의 시대는 예언의 시대여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쓰여 있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영감의 말씀으로 우리의 앞날을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사는데, 어찌 우리의 앞날에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이 술술 풀리고 날마다 행복한 일만 쌓이다가도 불현듯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불행은 하나님께서 그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너무 행복에 겨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까봐, 하나님께서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기에 허락하시는 고난이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야말로 참된 예언가가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이룰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자신을 포함한 조상들이 받았던 과거의 그 복을, 자식들이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 야곱이 한 축복은 축복인 동시에 구약시대의 예언이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축복 바로 그 예언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었을까요? 단지 야곱의 입에서 나온 그 혀끝의 말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야곱이 무턱대고 아들들의 미래를 예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 열 두 아들들이 살아 온 과거에 기초해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말씀이 창세기 49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은 ‘그들 각 사람, 그 아들들의 분량대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 열두 아들들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두고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보고서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예언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불변하는 미래를 확정짓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예언은 고정된 운명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미래는 고정 불변의 미래가 아니라 열려있는 미래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나의 앞날이 달라질 수 있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엉터리로 살아 온 사람에게 아름다운 현재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의 삶을 최선으로 준비하는 자에게 복된 미래가 열리지 않을 수 없는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그 예언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습니다. 이른바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씨가 말라버린다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그런 저주가 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창세기 34장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한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때 시므온과 레위가 자신의 여동생인 디나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히위 족속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히위 족속은 그 말을 믿고 할례를 행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시므온과 레위가 다 쓸어버렸습니다.

야곱은 그 때의 사건을 기억하고서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짐을 당할 것이라고, 그 족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시므온은 야곱의 예언 그대로 유다 지파에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나 레위는 어떠할까요? 레위는 시므온의 경우와는 달리 결코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레위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황금 송아지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맞서서 모세의 편에 앞장을 섭니다. 그만큼 레위는 야곱의 예언을 받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실한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됩니다. 그야말로 레위를 향한 야곱의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일입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예언은 불변하는 미래를 예견하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설혹 축복된 예언을 받았어도 그가 바르고 신실하게 응답하지 않으면 저주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저주를 받았어도 신실한 삶으로 응답해 나간다면 그 이후가 참된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입술에 떨어지는 예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당사자의 신실한 삶의 결과에 따른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이나 신비로운 것에 도취되어,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신앙인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 자신을 하늘에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 살도록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좇는 사도행전의 오늘 본문을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환히 엿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낸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승천해야 할 때가 되셨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세례를 통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때의 ‘권능’이란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을 위해 손수 대야에 물을 떠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권능’이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어린 아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모두 받아주셨던 ‘사랑의 권능’이요, 자신을 향해 비수를 꽂은 가롯 유대를 비롯해 모든 바리새인과 사두개 대적자들을 향해서도 모두 품어주셨던 ‘포용의 권능’이요, 온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뜨린 ‘평화의 권능’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권능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을, 다시 말해 이 세상 한복을 땅 끝으로 삼아 참된 증인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을 끝으로 당신은 본래의 본향인 하늘 보좌로 올려져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늘승천 사건이야말로 당신 자신에 대한 명예회복의 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어 보좌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들 성자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만 천하에 드러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 역시 이 땅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그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증인의 삶이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서 평가받을 것이요, 명예회복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목격하는 그 장면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10-11절 상반부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우리말 ‘쳐다보느냐?’로 번역된 헬라어 ‘엠블레포’(emblepo)는 ‘온 마음을 다해 응시하다’, ‘넋이 나간 채 뚫어져라 쳐다보다’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배우가 넋이 나간 채 어떠한 생각에 몰두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도 우리 자신이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면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와도 좀체 들리지 않고,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변화산상에서 엿보인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하게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장면을 본 베드로는 완전히 황홀감에 도취되어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씀합니다.

‘이 산에다 주님을 위해, 모세를 위해, 그리고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으며 평생 살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마17:4)

이를테면 산 아래로 내려가 세상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괜히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그냥 이 산속에서 살자는 의미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루 동안 세상 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뜻하지 않게 이 사람에게 치이고 또 저 사람에게 치여서 심령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그런데 교회에 나와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다 뭔가 붕붕 뜨는 것 같은 은혜의 파도 속에 젖어드는 그 황홀감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죄악과 다툼으로 얼룩진 악마의 소굴 같고, 교회는 천국 같아서 좀체 세상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넋이 나간 베드로를 향해 산 위에서 살자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세상을 등진 채 무릉도원 같은 그 산 속에서 뜬 구름 잡으며 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품고 세상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받들어 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속 천사들도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황홀한 하늘에 넋이 나가 있어야 할 게 아니라 너희들의 세상 속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어법 같은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요3:16)고 말씀하고 있고, 그래서 죄악과 다툼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지만 멸망시키지 않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셨다”(요3: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면, 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은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이 세상을 품고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모두가 천국이요, 세상은 모두가 지옥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금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인 욕망을 구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할 때에 그 가치를 드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을 우리의 최고 정점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최고 목적의 지점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우리가 바닥에서 살더라도 하늘을 보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두 발을 내딛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지만,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골3:1)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는 날 우리의 영혼이 입성해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저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아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이 세상 사람들을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선하게 사랑하지만,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에는 우리가 가야 할 본향으로 입성해야 할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끝점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통변 같은 일들, 병을 고치는 기적 같은 일들에 현혹되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들이 황홀하고 멋지기는 하지만 주님의 날이 도래하는 그날 그 모든 것들은 폐하게 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신비스럽고 황홀한 것에만 붙잡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팽개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적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예언과 신비를 찾아다니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십시다.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오늘의 일, 내가 준비해야 할 내일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십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정한 가장 합당한 때에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사랑하는 하나님

세상이 혼탁하고 경제가 어렵고 숨이 확확 막힐 지경입니다.

앞날의 걱정 때문에 예언이나 신비로운 것에 현혹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신비롭고 황홀한 것에 매달린 채 세상에서의 책임과 의무에 등진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일에 말씀과 성실로 다하여

참된 미래를 열어가는 참된 예언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언젠가 우리를 부르실 그 때가 분명 있을 것이오니

이 세상을 끝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벗어나,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지혜로운 자들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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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21세기에 끌려오다 - 21세기의 마르크스는 어떤 세상을 꿈꿀까
마토바 아키히로 지음, 최민순 옮김 / 시대의창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가 흔들리자 세계 금융시장이 들썩였다. 자본은 그렇듯 한 국가를 넘어 초국적인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자본은 국경을 넘은 지 이미 오래다. 때로는 자본이 이주노동자를 불러 모으기도 하고, 자본이 값싼 노동력 시장으로 몰려가기도 한다.

자본은 점차 인간을 도구로 삼는다.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직업훈련학교가 되어 있고, 학생들은 전공과는 상관없는 시간제 아르바이트에 목숨을 건다. 자살자와 실업률은 해마다 치솟고 있고,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하층민의 숨통은 헉헉 막힐 뿐이다. 

이러한 때에 마르크스는 뭐라고 소리치겠는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의 소련 붕괴 후, 마르크스는 한물 간 것 같지만 21세기인 오늘 부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을 바라보면서, 자본주의가 세계 속에 확산되는 정점에 설 때에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오늘날 초국적 자본시장이 정점으로 치솟고 있는 이 시대를 이미 갈파한 것이다.

마토바 아키히로의 <마르크스, 21세기에 끌려오다>는 현대의 다양한 문제를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시각에서 풀어쓴 책이다. 일국자본주의와 세계자본주의, 노동자의 중산계급화, 글로벌리제이션의 다섯 가지 모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합일화, 국가를 넘어 연대하는 노동조합 등을 현대적 감각에 맞추어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21세기의 현재를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볼까 하는 문제를 그의 이론에 접목시키고 그것을 현대의 여러 이론으로 대체·적용하면서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그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르크스 연구자인 나를 통해 되살아나는 것이다.”(프롤로그)

소련형 공산주의가 왜 ‘자본제국’에 잠식되었을까? 저자는 ‘자본제국’에 저항하려면 그와는 다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글로벌리제이션에 잠식되었다고 진단한다. 더욱이 ‘자본제국’은 외부에 식민지 등의 비자본주의 사회를 두고 키우지만 소련은 그것을 자국 내부에 두고 있었고, 자원의 재배분에도 소홀했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진단한다.

이 같은 것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야만의 지역을 세련된 지역으로 바꾸어간다(자본의 문명화)”고 이야기했던 부분이 오늘날 재해석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이 상품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외부에 팔아넘기고 있는 일이다. 그것을 소련은 자국 내에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시스템 상에 문제가 터졌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우리나라의 자본은 금융계와 부동산 토지에 집중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부동산에 완전 쏠려 있다. 돈줄을 쥐고 있는 상층계급들은 아파트와 집과 땅이라는 ‘내부’ 자본에 몰려들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도 집이 남아 돌고 있는데도 더 개발한다고 하니 누가 침을 흘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외부’의 비자본주의 사회로 진출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소련처럼 붕괴될 소지가 있다. 지금의 ‘내부’ 토건개발국가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진짜로 무너질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자원의 재분배 장치가 소홀했던 소련처럼 토건과 같은 엉뚱한 곳에만 쏟아 붓는다면 그만큼의 경제는 더 빨리 침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4장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지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것처럼, 지은이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연대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노동자들과 중산층과 서민층의 국제적 연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다. 오늘날 우리나라만 봐도 기업 내에 포섭된 노동자들은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중산층이나 하층민들도 내 집 마련을 일평생의 꿈으로 삼고 있지 않는가? 노동자들은 순종적인 기업의 전사로, 중산층과 서민들은 정치선동의 열렬한 순종자로 길들여져 있다. 

이러한 암울한 21세기 사회 속에서 마르크스의 그 외침은 어떻게 작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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