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월스트리트 공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2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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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꽁돈 60만 원이 통장에 들어와?

내가 아는 선배 목사가 있다. 그 분의 친구 목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 친구 목사는 교회를 새롭게 꾸미고 방송장비 몇 가지도 새로 구입했다. 모든 단장이 끝이 났고, 마이크 몇 개만 장만하면 됐다. 얼마 안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거래 업체에서는 그 값으로 500만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터무니없이 가격이 비싼 것 같아 그 분은 미국 현지에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갔다. 당연히 한국 업체에서 요구하는 값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하듯이 그 분은 당장 카드 결제를 해서 마이크 몇 개를 구입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환율이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분은 미국의 그 업체에 카드 결제로 송금한 금액이 많은 손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급기야 미국 현지의 업체를 통해 주문한 마이크를 취소했고, 환불을 요청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 분의 통장으로 60만 원의 돈이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이른바 환율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그 차이로 그만큼의 돈을 받게 된 일이었다. 그 분은 꿈인지 생시인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살다보면 그런 일도 다 있을까 싶다. 의도를 갖지 않고 바람직한 일을 좇아 행하는 데, 그렇게 황당할 만큼 좋은 일을 만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예전에 나는 좋은 꿈을 꾼 덕에, 후배 하나가 로또 하나를 사 주었고, 그것으로 딱 한 번 5천원에 당첨된 경우가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직까지 또 다른 행운은 만난 적이 없다.

 

2. 그녀가 만진 것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줄이야?

래너드 위벌리가 쓴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월스트리트 공략기〉도 꼭 그랬다. 가난한 나라 펜윅은 양모와 포도주로 자급자족하는데, 강대국인 미국과 맺은 껌 사업이 호황을 누려 몇 년 동안 엄청난 수익금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는 그 돈을 국민들에게 나눠 주고, 세금도 깎아 주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돈 맛에 빠져 들어 일할 의욕도 잃었고, 더 많은 이자 빚에 시달려 경제가 파탄에 처했다.

 

다음 해에는 1000배나 많은 돈이 들어왔으니 펜윅으로서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한 셈이었다. 그때 펜윅의 공주는 미국의 주식 중 추락하는 웨스트 우드 석탄 회사의 주식에 모든 돈을 투자했다. 주가가 떨어지면 투자한 돈이 사라질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식은 엄청난 폭등을 가져왔고, 공주는 단번에 고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웨스트 우드 석탄 회사의 주식 값을 고공행진하도록 이끈 미국 월가의 큰 손이 이번에는 펜윅과 조약을 맺은 껌 회사에 직접 투자를 종용하고 나섰다. 그 일로 미국 월가의 돈이 그곳에 몰려들었고, 펜윅의 공주는 그것을 긁어모았으며, 급기야 미국의 전 금융권까지 휩쓸고 말았다.

 

사실 펜윅의 공주는 자국민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에서 그 같은 일을 벌였을 뿐이다. 주식 부자는 물론이요, 미국의 월가나 미국의 경제를 주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만진 것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으니, 한낮 허구일지라도 얼마나 재밌고 익살맞은 이야기인가?

 

3. 꽁돈 60만원보다도 더 값진 것을 얻는 날

사람은 누구든지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다. 선한 것을 심으면 선한 것을 거두고, 악한 것을 심으면 악한 것을 받게 돼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 그것이 우화나 소설 속 주된 내용이자, 만고불변의 법칙이지 않던가?

 

문득 그 생각을 떠올리자니 서울 화곡동의 한 교회가 생각이 난다. 그 교회는 새로 시작하면서부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를 운영했다. 새로 시작한 교회라 재정적인 여유가 없어서 일주일에 딱 두 번 정도만 실시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구청에서 조사가 나왔고, 급기야 구청으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는 구청지정 무료급식소가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옆에 있는 큰 교회도 당장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여 주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교회는 자신들이 나서서 구청에 그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그 교회도 구청으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구청에서는 더 이상 무료급식소는 인근에 필요치 않다고 잘라 버렸다.

 

최근 나도 새로 시작한 교회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지역아동센터'를 설치하려고 여기저기  발버둥 친 적이 있다. 솔직히 지역아동센터의 순수한 운영보다는 교회의 살림살이를 더부살이 해볼 심사가 컸다. 그래서인지 구청에서는 인근 800m 근방에 지역아동센터가 이미 설치돼 있고, 더군다나 교회 건물 내에는 그것을 설치 할 수 없다고 딱 잘라왔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괜히 얼굴이 빨개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 스스로를 위해서나, 새로 시작한 교회를 위해서나 모두 잘 된 일이지 싶었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더욱더 선하고 올곧은 길을 다져갈 수 있는 까닭에서다.

 

그렇기에 요즘들어 더욱 절실하게 그런 꿈을 품고 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 흉내 내지 않고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유익을 끼칠 수 있을까?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선한 일이 무엇일까? 그런 일을 꿈꾸고 하다보면 언젠가는 꽁돈 60만원보다도 더 값진 것을 얻는 날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보다도 더 선한 일을 만날 날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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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글쓰기 - 발설하라, 꿈틀대는 내면을, 가감 없이
박미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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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골 후배가 늦은 밤 시각에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많이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녀석이라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여러 가지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뜩 후배 녀석이 경험한 치유에 관한 이야기로 빠져들었습니다.

장남으로 태어난 후배 녀석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동물성 사료를 먹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평소 아버지도 자신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며, 갑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분노와 적개심은 청년이 되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치유된 것은 아버지가 겪은 뇌출혈로 인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병상에 있던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놓고 지난 날 구박했던 모든 일에 대해 용서를 청해 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 아버지를 향한 모든 분노가 눈 녹듯 녹아들어갔고, 그때에 썼던 시 한편도 내게 즉석에서 읊조려 주었습니다.

사람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감상하거나 수다를 떠는 것으로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미라의 〈치유하는 글쓰기〉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자전적인 글쓰기가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고 극복하는데 제일 좋은 특효약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참 탁월한 도구다. 단 한 문장으로도, 서툰 글 솜씨로도, 아무렇게나 끄적인 낙서로도 치유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 치유의 방법은 아주 다양한데, 글쓰기 안에 그 모든 게 들어 있다."(책머리에)

그렇다고 치유하는 글쓰기에 뭔가 남다른 비법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조금 먼발치에서 거리를 둬 보는 것, 그 문제를 직접 직면하거나 명료화 하여 써 보는 것, 그것을 인터넷 동호회와 같은 곳에서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급기야 사랑하고 수용하는 방법 등 여러 갈래의 오솔길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명문장이거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짝 들어맞거나 앞뒤 문맥이 일치해야 하는 것도 아님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소설가가 인기를 끄는 비결이 독자들과 흡족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듯이, 치유하는 글쓰기도 그저 누군가의 삶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족할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자신의 아픈 상처를 누군가에게 알렸을 때, 다른 사람이 그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공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몫이 될 것입니다. 이른바 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품는 일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아픈 비밀을 털어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요, 좀체 치유하는 글쓰기란 쉽지 않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치유하는 글쓰기가 막막할 것 같으면 책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따라 하는 것도 좋은 처방이 될 것 같습니다. ‘버스명상’이라는 코너에서는 자신이 버스 운전사가 되어 버스를 몰고 가는 상황을 글로 쓰는 일인데, 그것으로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인생의 집 한 채’라는 부분에서는 나만의 안식처를 글로 써서 힘들고 고달플 때면 그곳에서 삶의 에너지를 찾을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쯤 해서 첫머리에서 밝힌 후배 녀석의 '울 아버지는 나에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라는 시를 소개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당연히 후배 녀석의 허락을 받아서 옮겨 적습니다. 나도 이 시를 읽는 동안 지난 날 이른 나이에 하늘로 간 아버지가 그립고 서러워, 목 놓아 울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에게도 치유하는 힘을 북돋지 않을까 싶습니다.

                                울 아버지는 나에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최규성

연약한 아들 하나 낳아서 세상에서 제일 잘난 아들처럼 생각하시는
우리 아버지가 그 눈물입니다.
못난 아들 반에서 꼴등 해 가슴 아파 푸념석인 말투로
농사짓자 하시더니 오늘은 또 돈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내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아들 녀석 세상에서 출세하라 했더니
주의 종 된다고 신학대학 시험 보더니 덜커덕 떨어져 화내시려다
못난 아들 기죽을까봐 오늘도 눈물 삼키시더니
아파서 병이 나 수술하셨습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내게 흐르는 눈물입니다. 

울 아버지 뇌수술로 큰 병원에 입원하시더니 의사가 죽는다 엄포를 놓습니다.
울 아버지 수술실 들어가는 것 보고 아빠 손 잡았더니
걱정하지 마라 아들아 아무 일 없다, 울지 말라 하십니다.
울 아버지 바보같이 아픈 건 아버지신데...,
내 걱정하는 것이 가슴 아파서 하늘보고 땅보고 눈물 흘립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제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울 아버지 머리숱 많다 하시더니
못난 아들 고민하다가 머릿속이 훤히 보입니다.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수가 늘어가는 아버지 뒷모습 보며
오늘도 눈물이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내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언제 집에 갔더니 다 떨어진 내복 입고, 울 아버지 텔레비전 보십니다.
며칠 쉬었다 가려는데 옷 사 입으라고 돈 주십니다.
그 돈 받고 떨어진 내복 입고 계신 울 아버지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아
아빠 등지고 하늘 바라보고 눈물 흘립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내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번에 또 대학원에 편입시험 봐서 떨어졌더니
두말 안하시고 노력하라며 한숨을 내쉽니다.
울 아버지 생각에 가슴 아파서 오늘도 눈물 흘렸습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내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래저래 못난 아들 기죽지 마라고 본인이 두 배로 일하시더니
그런 돈 내게 부치시고 밥 굶지 말라 하십니다.
서른 다 된 내 나이에 부모님께 효도 못하고
밤늦게 들어와 주무시고 새벽에 나가 일하시는
부모님 피 빨아서 학교 다니는 것 같아
글 쓰는 이 밤 하나님 알고 나만 알게 불 꺼진 천장 바라보고 눈물 흘립니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내게 늘 흐르는 눈물입니다. 

못난 아들, 하지만 울 아버지의 희망 규성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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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조엘박의 한국교회 개혁시리즈 2
조엘 박 지음 / 박스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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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솟구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가 이전의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 같은 바람직한 교회 상을 제시하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지탄받을 만한 일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순수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집단으로 전락해 있고,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 문제가 근절되기는커녕 지금까지도 다른 방법을 통해 진행되고 있고, 교회의 과다한 헌금 요구와 함께 투명하지 못한 헌금의 지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조엘 박의 <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는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과제를 풀어 쓴  내용이다. 이른바 한국교회의 전통이나 고정관념 혹은 기득권층이 주도해가는 교회개혁이 아니라 성경이 원하는 시스템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정교분리의 실천이라든지, 자율화된 헌금이라든지, 목회와 직업의 겸직 허용이라든지, 목회세습의 중단과 관련하여 교단헌법에 그것을 명기하는 일이라든지, 예배출석의 자율화라든지,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 등의 이야기꺼리가 있다.

 

사실 이번 대선과 총선에서도 교회의 정치 참여, 더 정확히 말해 목사들의 정치참여는 크나큰 문제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분명 한국교회의 배타주의가 낳은 두 번째 괴물입니다. 첫 번째 괴물은 IMF를 불러온 경솔한 김영삼 장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며 장로라고 불렀던 이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전도의 문은 막히고, 빛과 소금은커녕 ‘개독교’라는 최악의 별명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26쪽)

 

대형교회이든 중소교회이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헌금자의 이름을 주보에 기입하여 밝히고 있다. 그것이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는 격려의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에겐 심리적 압박감으로 다가오고 그로 이해 헌금을 유도하는 차원이 된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헌금자의 명단 공개를 통해 헌금액수를 확보하는 관행으로 사용한 게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임직자를 세우는 과정 속에서도 고액의 헌금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른바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의 직분은 감사헌금과 직결된 상태이다. 그 옛날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와 비슷한 형태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물론 그와는 달리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의 직분을 학력과 재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적정 연령이 되면 조건없이 직분을 받도록 하는 교회도 있다. 그런 교회라면 정말로 바람직한 임직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임직자를 통해 많은 헌금을 확보하려는 일을 개혁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을 주는 것을 전제로 감사헌금을 하게 합니다. 따라서 직분을 제안 받았어도 헌금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직분을 받았음에도 헌금을 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눈총을 받기 일쑤입니다."(43쪽)

 

그 밖에도 이 책에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기득권이 버려야 할 여러 악습들에 대해 과감한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하여 더 늦기 전에 지금에라도 매스를 들이대야만 한국교회의 몸통 전체로 파고들어가는 썩은 부위를 말끔하게 수술할 수 있으며, 그때에만 그 옛날 우리 민족과 사회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참 자화상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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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벽에 창세기를 묵상하면서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늙은 종에게 고향 땅에 가서 이삭의 배필을 택하도록 청했습니다. 주인의 영향을 받은 그는 메소보타미아의 우물가 근처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것만 채우기에 급급한 여인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리브가를 만났고, 하룻밤 유숙한 이후 리브가 일행은 곧장 이삭을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그때 이삭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처해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창24:61-63) 있었습니다. 이삭이 묵상한 장소를 성경은 ‘브엘라해로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나를 감찰하시는 전능자의 우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잃은 이삭의 마음만 헤아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형편과 마음까지도 모두 살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본문 24절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이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한 사람을 보선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라 충실하게 번역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이, 하나님, 당신이시여”’입니다. 하나님은 특정인의 마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까지 아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마음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임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자보다 그 집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듯이, 자동차를 만든 사람보다 그 자동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기에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4)


오늘은 한 해 동안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감사주일’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의 형편과 마음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과 힘든 일도, 심지어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쳐 온 그 모든 일들도, 우리 각자에게 필요함을 아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성숙한 감사의 고백 위에 하나님께서는 더 아름답고 선한 길로 우리를 친히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나의 형편과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브엘라해로이'의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앞길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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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 - 엔도 슈사쿠의 인생론, 향기 가득한 교양산문의 빛나는 경지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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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질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생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죽음’은 더더욱 숨을 옥죄는 일일 수 있다. 승자만을 만들어내는 이 살벌한 시대에 ‘좌절’은 우리 모두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과 ‘좌절’이 그처럼 단절과 패배만을 생각케 하는 일일까? 브레이크 없는 이 시대에 ‘죽음’은 때로 더 깊은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성공 신화만을 목적으로 하는 현 시대에 ‘좌절’은 인간에 대해 더 깊은 배움을 얻게 하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엔도 슈사쿠의 인생론이 담긴 〈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은 이 세상의 모든 ‘죽음’과 ‘좌절’에도 나름대로의 뜻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 속에도 그것대로의 소중한 목적이 담겨 있음을 성찰케 해 주는 잠언집이다.

사실 그에게도 절망과 좌절의 시기가 없지 않았다. 그는 약관 30세에 결핵으로 인해 세 차례나 되는 수술을 받았고, 2년 반 동안은 입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 수술로 일곱 개의 늑골을 잃었고, 한쪽 폐도 잘라야 했다. 근 3년 동안 죽음의 터널을 온 몸으로 맞섰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토록 쓰디쓴 절망감을 맛보지 않았던들 인간과 인생에 대해 남다른 눈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하여 위대한 소설 〈침묵〉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그 스스로도 결코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밝힌다. ‘죽음’의 터널과 ‘좌절’이라는 패배감은 인생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갖게 하는 신비였던 것이다.

“병이라고 하는 생활상의 좌절을 3년 가까이 충분히 음미한 덕택에 나는 인생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가 있었다. 이것은 소설가인 나에게는 고통스럽지만 귀중한 공부와 체험이 되었다. 그런 체험 덕분에 인간과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이나마 트였기 때문이다.”(133쪽)

이는 예순에 들어선 그가 자신의 옛 삶을 돌이켜 보며 새긴 글이다. 그에게 일어났던 지난날의 모든 일들은 그것이 기쁘든 슬프든 좋든 나쁘든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선악불이(善惡不二)’를 즐겨 이야기한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손바닥과 손등이 선과 악처럼 붙어 있어서 악을 뒤집으면 선이 되고, 선을 뒤집으면 악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악에도 나름대로 ‘의미’와 ‘쓸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생활의 부정적인 요인이 인생의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과 좌절, 질병과 실패가 부정적인 요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정적인 열매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구체화시키기만 하면 생활 속 손해도 언젠가는 이익으로 바뀔 날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이 인생의 황혼기에 쓴 것이라 그런지 유독 ‘죽음’과 ‘좌절’, ‘나약함’이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우리들의 인생 앞에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다. 그 문제를 소설가이기 이전에 직접 경험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찰했는지를 담고 있기에 이 책이 더욱 진지하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쪼록 무한경쟁 속 승자와 패자만을 양산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닥쳐 오는 모든 실패와 좌절이 결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 언젠가는 그것이 유쾌한 쓸모가 되어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을 내다보는 안목을 갖고 살았으면 한다.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도 감사를 느끼는 '선악불이(善惡不二)'의  비결을 배우는 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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