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처럼 생각하라 -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
아르네 네스.존 시드 외 지음, 이한중 옮김, 데일런 퓨 삽화 / 소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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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남한산성을 올라갑니다. 마천동 버스 종점에서 시작하여 산 할아버지 흉상이 있는 다리를 지나, 서문을 통과해 전망대까지 오르지요. 그 위에 서면 서울 시내 전경은 물론이고 한강 너머 저 멀리 남산까지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망원경으로 보면 안전철봉에 가리는 게 많기에 제 눈으로 보는 게 더 많은 대자연을 담을 수 있습니다.

1624년 조선왕조 제 16대 임금인 인조 2년부터 축성하기 시작한 남한산성은 2년 뒤 완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맞은 그 해 12월 14일 임금은 도성을 빠져나와 송파 강나루를 건너 남문으로 피해 들어가지요. 그로부터 47일 만에 임금은 두 사람이 지나기도 어려운 비좁고 어두운 서문으로 그 산성을 걸어 나와야 했습니다.

그 역사의 뒤안길은 수어장대(守禦將臺) 옆 조그만 누각 안에 있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을 통해 엿볼 수 있지요. 다만 김훈의 〈남한산성〉은 그때의 치욕이 청나라로부터 겪은 일이지만 실은 조정 대신들 간의 다툼이 더 큰 화를 자초했다고 꼬집지요. 어떤 역사든지 뼈아픈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남한산성이 그 자체로서 좋은 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 위에 성벽을 얹어 놓은 모습 때문입니다.

2018년에 치러질 평창 동계올림픽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관심거리입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인근 주변의 땅값이 들썩인다고 하지요. 각종 개발에 따른 여러 이득들을 누리고자 함이겠지요. 하여 1994년도 동계 올림픽 개최지였던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Lillehammer)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들 하지요. 대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립식 건물들이 그것입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건물을 지었으니 땅 투기도 없었을 테고, 경기가 끝나 모든 시설물들을 철수하였으니 막대한 관리비용까지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동계올림픽이었겠죠.

일상의 산행에서 역사까지, 그리고 머잖아 치를 세계적인 동계 올림픽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게 어설픈 조화 같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한 가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이것 저것 끌어 온 것입니다. '대자연과 동일시하는 인간의 삶' 말이지요. 그건 아르네 네스와 존 시드 외 여럿이서 쓴 〈산처럼 생각하라〉를 읽어봐도 너무나도 타당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반짝이며 흐르는 냇물과 강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입니다. 우리가 백인에게 우리 땅을 팔면 그들은 그것이 신성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것이 신성한 것임을, 맑은 호수에 비치는 신령한 모든 것들이 우리 생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흐르는 물소리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음성입니다."(48쪽)

"땅이 우리 친족들의 생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바를, 땅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땅에 일어나는 일은 땅의 자식에게도 일어납니다. 사람이 땅에 침을 뱉으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53쪽)

대자연에 흐르는 냇물과 강물이 조상들의 피라니, 그 물소리가 아버지의 음성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식견입니까? 대자연의 땅이 어머니라니, 그 땅에 침을 뱉는 게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라니, 얼마나 깊이 있는 혜안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산과 동일시하며 사는 사람이라야 깨달을 수 있는 진리겠지요. 사실 성경에서도 사람이 대자연의 '흙'으로부터, 아니 티끌과 같은 '먼지'로부터 나왔다고 하니, 인간은 대자연에 속해 있는 존재일 뿐이지요. 인간중심주의라는 말은 결코 옳지 않는 말이겠지요. 그것은 죽어 흙가루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히 숙연해지는 진리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고 있지요. 멀쩡한 강들도 이미 파헤칠 대로 파헤친 이 정부는 과연 철학과 역사의식이 있기나 한 걸까요? 태곳적으로부터 내려온 대자연의 흐름만 내다보았던들 결코 그런 난개발과 파괴행위는 벌이지 않았겠지요. 그 속에 빈 머리를 맞대며 일하는 참모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여 해군기지를 설치한다 한들 우리에게 군사주권이 없는 그 기지이니 미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그 일에 정부 요원들이 머리를 맞댔으니 어찌 인조 시대의 조정대신들과 다르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늦게 가더라도, 더디 돌아간다 해도 물처럼 흐르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도 실은 수 천 년의 지혜와 철학과 역사 속에서 품어 나온 잠언이잖습니까? 그만큼 인간중심주의보다 대자연의 흐름에 인간이 내 맡기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은 없다는 뜻이겠지요. 마지막 임기를 코앞에 두고 있는 대통령과 이 정부를 이끌어가는 참모들은 부디 이 책 〈산처럼 생각하라〉를 탐독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리하여 늦게나마 대자연의 산과 들과 강과 물에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마음이 동(動)한다면 역사 앞에 참회하는 시간을 갖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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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이남곡 지음 / 휴(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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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공자 문하에서 남긴 대화집이다. 일부는 공자가 한 말이고 또 일부는 문하생들이 한 말이다. 예수가 남긴 말도 후대가 남겼듯이 논어도 공자시대엔 경(經)이 될 수 없었다. 공자의 가르침이 성전(聖典)이 된 것은 공자 사후의 일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된 것도 그렇다.

논어는 세상을 사는 정치과 교육, 문화와 경영까지도 담고 있다. 논어를 정치학, 기업경영, 학문의 교본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논어의 근본 바탕은 사람을 사랑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남곡 선생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은 그걸 일깨운다.
"성인이 되는 길을 나와 다른 세상의 일로만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다. 한자로 '성聖'을 풀어 보면 耳와 呈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耳를 뜻으로 삼고 정呈을 소리로 삼고 있다. 즉 소통에 막힘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인은 못 되어도 소통의 달인은 한 번 쯤 도전해 볼만하지 않을까. 소통疏通은 인간이 개인화 되고 파편화되고 있는 오늘날 가장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화두다. 가정에서부터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소통이 절실한 시대라 하겠다."(320쪽)
이는 논어 제 9편 자한 4장을 풀어가면서 한 이야기다. 이른바 '공인'(公人)을 이야기함인데, 공인이란 단순히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익과 욕망을 넘어선 인간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소아(小我)의 존재론적인 자아를 넘어 대아(大我)의 관계론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인(仁)을 주창했고, 참된 소통의 삶을 추구했고, 아집이 없는 대자유인으로 산 까닭 말이다. 물론 시절이 수상하던 춘추전국 시대였으니 무턱대고 무아(無我)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오직 실천적인 언행을 내세웠다.
어쩌면 그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젊은 시절 이남곡이 공자를 보수 우익의 원조로 여긴 것 말이다. 함평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던 가운데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옛 시절의 고전 해설들이 시대 정권을 보좌하는 시녀역할을 자처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사회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전북 장수로 귀농한 그는 논어를 달리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치학이나 기업경영 혹은 학문의 교본이라는 시각을 벗어나 참된 인간애를 품고 있는 게 논어의 정수라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 책에서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를 모두 품고 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논어 제 2편 위정 14장을 읽어가면서 참된 군자(君子) 상을 밝혀주고 있다. 이른바 무고정(無固定)의 사람, 무아집(無我執)의 인격으로 결코 편파적이지 않고 보편성을 추구하며 그것을 실언하는 인간을 일컫는다. 그것이 주이불비(周而不比)이자 군이불당(群而不黨)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총선과 대선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야말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이룰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곡남 선생은 주이불비(周而不比)의 정신을 살려 개인이나 특정 세력의 이익을 좇기보다 인류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당부한다. 그것이 곧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치이자, 우리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진일보 할 수 있는 계기이며, 그것만이 사람을 참되게 사랑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더욱이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논어의 관점으로 우리시대의 양극화 해소 방안도 내 놓는다. 물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나름대로 시각차를 보이지만 중요한 건 현실성 있는 재정대책이다. 이에 대해 그는 '관중의 인(仁)'으로 그 해법을 찾는다. 이른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는 불리할지라도 전체 구성원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 놓는 것 말이다. 다만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는 '합리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공자 사후 2,500년이 지난 오늘이다. 물질과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누가 뭐래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전쟁이 도사리고 있고, 환경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고, 양극화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인간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남곡 선생이 재해석한 논어를 통해 참된 인간애의 정수를 길어 올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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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 손석춘.김기석의 대화
김기석.손석춘 지음 / 꽃자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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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교회, 언론인과 목회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둘은 사실 전혀 다른 기관이고 그 텃밭도 다르다. 언론이 세상 돌아가는 사건을 밝혀주는 '빛'이라면 교회는 세상에 '소금'이기를 자처하는 까닭이다. 물론 둘 다 '사람'이 그 구실을 하는 데는 차이가 없다. 다만 언론인이 정론직필(正論直筆)하고, 목회자가 긍휼과 함께 예언자의 목소리를 갖출 때 자기 본연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언론인과 목회자. 그들 두 사람이 만나면 무슨 대화를 나눌까? 제 스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기반성을 할 것이다. 언론인은 역사 속에서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것이고, 목회자는 성경 속에서 보여준 예수의 삶을 비춰보며 그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물론 둘 다 지향하는 바는 정말로 올바른 사회를 꿈꾸는 일일 것이다.

손석춘과 김기석의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는 그런 자기반성과 함께 우리사회가 올곧게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편지 모음집이다. 지난 2년간〈기독교사상〉이란 잡지에 연재했던 편지를 한데 묶은 것이다. 손석춘 교수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을 주도하며 고운 우리말을 살려 쓰는 정론직필의 언론인이라면, 김기석 목사는 교리로 박제된 초월적인 예수보다 이 땅 낮은 자들을 품는 목회자다. 둘이 주고 받은 편지 행간 행간에 각자의 '번민과 울림'이 전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설교자의 가장 큰 번민은 입을 다물고 싶을 때조차도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통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말의 부박함이 떠오를 때면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어집니다. 듣는 이들을 고려하여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저 자신과 마주칠 때면 그런 심정은 더욱 깊어집니다."(236쪽)

이는 김기석 목사가 쓴 편지로서 설교자로서 겪는 고충을 담은 글이다. 목회자가 여러 가지가 일을 하지만 설교에 가장 비중을 두고 있고, 설교를 작성할 때 교인들을 고려치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지점에서 자기 삶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교인들을 바르게 이끌고자하는 예언자적 통찰력과 외침을 상실하면, 그때부터 그는 체제안정과 번영복음에 갇혀버린다는 뜻이다.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재발견, 아니 자기 자신의 성찰이 저는 지금 보수든 진보든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에 곧이어 따라오는 자기 경계도 있지요. 엄연히 고칠 수 있는 정치경제적 문제를 두고 모든 것을 영성을 환원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기도'가 해석의 여지없이 명확하게 밝혔듯이 예수는 단순한 영성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자기중심주의와 탐욕을 벗어나 빚을 탕감해 주라고 가르쳤지요. 거듭남과 더불어 그 거듭남을 구체적 이웃 사랑으로 구현해나가라는 가르침으로 저는 읽었습니다."(293쪽)

이는 손석춘 교수가 쓴 편지로서 그가 이해한 '주기도문'이다. 현실을 떠난 영성은 결국은 자기 도피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예수의 피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인간이 그 피로 고쳐져 예수적 존재로 거듭날 때에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예수가 바라 본 하나님 나라도 죽어 가는 저 세상이 아니라 이 땅에 실현해야 할 공의로운 나라라는 의미다. 언론인들도 그를 실현코자 정론직필해야 하지만 곳곳의 '당근과 채찍'에 놀아나고 있고, 심할 경우 종교의 빛마저 어둠으로 가리기를 서슴지 않는다는 꼬집는다.

문제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 공의로운 나라를 실현하는 과제다. 과연 둘은 어떤 방향성을 찾고 있을까? 손석춘 교수는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진보세력들이 하나로 합쳐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김기석 목사는 폭력은 강자들이 약자를 굴복시키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약자들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이기에 예수의 비폭력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전태일이나 이소선 어머니를 통해 예수와 그 어머니를 바라보는 관점은 둘 다 다르지 않았다.

언론인 손석춘, 종교인 김기석. 그 들 둘이 나눈 번민과 울림의 편지는 현실과 성경의 만남이자 예수님이 걸어간 길을 되짚은 일이기도 하다. 그가 꿈꾼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한 현실 대안은 무엇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아무쪼록 둘의 번민과 울림을 통해 한국교회가 높은 돔 한복판에 새긴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전능의 주)처럼 '박제된 예수'를 내세우기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둘러메는 '살아 있는 예수'를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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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아와 새튼이 - 한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 이야기
문국진 지음 / 알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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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그만큼 완전범죄는 없다는 뜻일 것이다. 살인죄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처럼 지능범들이 다양하게 활개치긴 하지만 범인들은 모두 자취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설령 범인이 남기지 않더라도 살해당한 피해자가 그걸 남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국 최초 법의학자인 문국진의 <지상아와 새튼이>는 그 면면을 속속들이 파헤쳐준다. 각각의 살해사건을 자살로 꾸며내고 또 위장하지만 사건 현장을 감식하면 모두들 타살임이 드러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물론 그 중심에 경찰도 있고, 검찰도 나서지만, 결정적인 사건의 실마리는 법의관들의 감식결과에 있음을 알려준다.

일례로 일본 동북지방의 작은 공장에서 일어났던 여자 청년의 살해사건이라든지, 조그마한 항구의 다방에서 영업하던 미모의 한 마담에 살해된 현장이라든지, 임신한 여자 청년을 강물에 밀어뜨리고서 마치 강물로 뛰어든 것처럼 꾸민 일이라든지, 여비서의 임신 사실을 알고 '아비산'이 든 주스를 마시게 하여 독살시킨 뒤 시체를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져버린 일 등, 다양한 살해사건 현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사건도 몇 몇 알려준다. 농촌의 삼형제에 관한 이야기인데, 큰 형이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첫째와 둘째와 셋째 아이들이 각각 다른 혈액형을 보유한 것이다. 이른바 큰 형 밑의 둘째와 셋째와 함께 형수가 바람이 났던 것이다. 그 사건을 바라보던 문국진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다음과 같은 말로 큰 형에게 위로 겸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고 한다.

"K씨! 당신에 삼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핏줄이오. 비록 태어난 자식 중 둘은 당신 자식이 아니지만, 당신과 같은 핏줄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핏줄을 모르거나 알고도 자식으로 거두는 사람들도 많고, 또 동생의 자식을 아들로 삼고 키우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 거요. 이 경우는 그래도 모두 당신과 같은 핏줄 아니오. 이제 와서 이런 사실을 낱낱이 밝혀 평지풍파를 일으켜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소. 모두에게 좋은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93쪽)

또 하나 재밌는 사건이 있다. 두 부부가 신혼여행 3일째 되던 날에 신부가 아랫배의 통증을 호소한 사건이다. 신부의 소변검사는 '이상한 균' 때문이라고 판명이 났고, 결국 그게 발단이 되어 남편의 '성병'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성병 때문이 아니라 그람음성간균이 원인인데, 그것은 여자의 항문 주위에 있던 대장균이 그녀의 질까지 침범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 요인으로 여성들은 종종 월경 뒤에 오줌소태를 자주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바기니스무스'와 관계된 사건들이다. 조그마한 농촌 마을에 한 쌍의 처녀총각이 결혼반대를 무릅쓰고 밀회를 즐기는데, 그 날 보리밭에 뱀 한 마리가 처녀 옆을 지나간 것이었다. 순간 처녀는 너무 놀라 '바기니스무스'가 일어났고, 총각의 성기는 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서로가 진땀이 났고, 둘은 탈진하여 의식을 잃어버렸고, 그 모습을 동네 노인이 발견하여, 의사의 왕진이 있은 뒤에야 성기가 빠졌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붙어 있는 두 사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의사 선생이 보리밭까지 왕진을 나왔고, 치료를 하고서야 성기가 빠졌다. 그런데 이 날의 사건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양가 부모들도 더 이상 결혼을 반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기니스무스가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113쪽)

본래 이 책은 리라이팅된 것들이다. 문국진 박사의 <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다>는 인터뷰 집의 후속조치로 나온 산물이다. 1985년과 1986년에 발간된 <지상아>와<새튼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잘 보여준 몇 편의 글들을 골라서 다시금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여전히 기똥차게 재미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물론 각각의 사건현장 속에 있었거나 그 피해를 당한 분들에게는 명복을 빌어야 하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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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도서관 - 천천히 오래도록 책과 공부를 탐한 한국의 지성 23인, 그 앎과 삶의 여정
장동석 지음 / 현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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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어느 프로그램에서 서울 시장을 인터뷰한 걸 봤다. 그가 앉아 있는 집무실 광경도 신선했고, 그가 품어내는 말도 공감이 갔다. 새로 구상한 뉴타운 정책이라든지, 아들의 병역에 관한 의혹들, 그리고 민주당에 입당한 진정한 속내까지도 모두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힘든 시민들을 품고 대화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압권이었다.

그처럼 이 사회를 이끌려면 적어도 시대상황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더욱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도 돋보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만 무성한 게 아니라 그 행동도 그대로 묻어나야 한다. 그 때에만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그의 행보를 모두 닮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 인물들은 물론 책에서 배움을 얻는다. 그건 박원순도 마찬가지다. 수감사 시절 그는 전투하듯이 책을 읽었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 객원연구원 시절 그는 그곳의 책들을 모두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불태웠다. 아름다운 재산을 구상한 것도 실은 그때 읽은 책들 속에서 나온 것이다.

장동석의 〈살아 있는 도서관〉(현암사)은 사람과 책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사회 곳곳을 이끌고 있는 한국의 지성 23인에 관한 책 탐방서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 어떤 책들이 영향을 끼쳤는지 그 깊은 면면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이 책을 대하는 독자들마다 추천하는 이들이 다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고전의 광대무변한 세계를 누비고 있는 고미숙 씨를, 어떤 이는 인간 냄새나는 한국형 평전을 그리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을, 또 다른 이는 여성학과 한의학의 행복한 만남을 엮어나가는 한의사 이유명호 씨를 추천할 것이다. 그들의 삶과 그들이 읽었던 책들이 오늘날에도 생생한 감흥과 도전을 준다는 이유인 까닭이다.

그러나 내게 색다른 감흥과 도전을 준 이들은 이만열 교수와 김두식 교수, 그리고 양희창 목사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 세상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그들이 안내해 주는 까닭이다. 당연히 그들이 소개하는 책도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조직이 까딱 잘못하면 어떤 권위주의 체제보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30여 년이 흘렀다고 해서 〈야훼의 밤〉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기독교 단체나 교회, 또는 조직들의 현실과 실상이 그 시절 〈야훼의 밤〉의 배경이 된 선교단체에 견주어 그리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51쪽)

이는 헌법학자인 김두식 교수가 〈야훼의 밤〉을 읽어보도록 추천한 이유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답습되고 있는 엉뚱한 권위를 해체시켜야 하는 까닭도 있다. 그런데 그 책은 이슬람에 관하여 전문가인 이희수 교수가 추천한〈정체성과 폭력〉에도 일치한다. 이른바 도그마적인 정체성이 모든 사물과 사건을 선악의 구도로만 이해시키려 한다는 게 그것이다. 중동과 이슬람을 무조건적으로 단죄하는 경향이 그 구도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초등학교 1학년 때 집안에서 발견한〈신약성경〉에 매료되어 지금껏 한국기독교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이만열 교수. 그는 한국기독교가 민족주의 요소를 지닐 것을 강조한다. 그것이 이기백의 〈한국사신론〉과 찰스 라이트 밀스의〈들어라 양키들아〉를 추천한 이유일 것이다. 한편 그는 한국교회의 개편 찬송가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이유인 즉 새 찬송가의 가사가 은혜와 묵상을 방해하고,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만든 찬송가가 너무 많다는 이유다.

"사실 대안학교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의 동의가 절대적이다. 공교육 부적응이 이유가 아니라 '다르게 살겠다는 절대적 의지'가 대안학교를 찾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양희창 교장의 생각이다."(200쪽)

이는 제천 간디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양창의 목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그곳에 전념한 것은 간디의 불복종 정신과 공동체를 지향한 열정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물결로 양극화 문제가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이 때에 진정으로 소박한 꿈을 이루고픈 그 대안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을 품기까지는 어떤 책이 영향을 미쳤을까? 바로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듯 이 책에 등장하는 한국의 지성인들이 추천하는 책은 다 다르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몇 권 있다. 이른바 〈사상계〉와 〈기독교사상〉,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루쉰의 〈아Q정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에드워드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그것이다.

아울러 내 눈에 새롭게 띄는 책도 있다. 찰스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 장현광의 〈우주설〉, 데이비드 애튼 보로의 〈식물의 사생활〉, 윤노빈의 〈신생철학〉, 조성기의 〈야훼의 밤〉,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가 그것이다. 목회자로서 민족주의 색체를 갖출 건 무엇인지, 신학과 과학의 만남은 어떤 출구에서 가능한지, 한국교회의 권위주의 요체를 개혁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그 점점을 알고자 하는 까닭에서다.

지금은 바야흐로 융합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시대다. 환경과 철학과 기술과 문학과 문학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통섭의 시대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려고 해도, 부부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려 해도, 그 누구와도 외연을 넓히려 해도, 그야말로 총체적인 독서가 필요한 시대다. 시대를 이끄는 인물도 그를 바탕으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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