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기도 -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실한 여정
김요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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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쉬고자 하는 경우가 있죠. 기도해도 전혀 응답이 없거나,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불행한 일이 닥칠 때 그렇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대한 의심이 들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며 기도하던 습관조차 내려놓게 되죠.

“분명한 것은, 도저히 기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불평, 원성, 항의, 심지어 욕지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316쪽)

김요한 목사의 〈지렁이의 기도〉(새물결플러스·2017)에 나오는 이야기죠. 고난의 수렁에 빠지거나, 죽음의 압착기가 몸을 짓누를 때, 그때도 언약백성들은 하나님께 입을 열어 기도해야 할 것을 주문한 것입니다. 이른바 박완서 선생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는 괴로움을 당했을 때, 김병년 목사의 아내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각자 하나님께 따지는 것도 그런 기도의 일종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울다가 웃고, 또 욕하고 짜증내는 행위들이 실은 시편의 고백 속에도 나오는 바죠. 그런 항의와 불평의 탄식들이 그래도 하나님을 ‘나와 너’의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하는 행위지만,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나와 그것’의 비존재로 만드는 꼴이라고 하죠.

하나님은 비록 의심하고, 절망하고, 탄식하는 당신의 언약백성들의 기도에 한없이 무응답으로 일관하지는 않는 분이시죠. 이 책에 나오는 분들도 그 당시에는 아픔과 원망으로 삿대질을 하고 회의 속에 살았지만, 그 과정을 지나며 하나님의 임재와 또 다른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며 ‘상처받은 치유자’로 거듭났다고 밝혀주죠.

그렇듯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기도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게 무엇인지, 기도할 때의 방언과 찬송의 유익함이 무엇인지, 기도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개인 기도를 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 곧 섬김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지 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의 세 단계’가 있다는 것은 신선했습니다. 이른바 지하수를 퍼 올리는 단계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지표에서 10-30미터 지점의 ‘지표수’를 퍼 올리는 게 첫 번째 단계이고, 그 지표수 아래의 암반과 암반 사이에 흐르는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게 두 번째 단계, 그리고 300-500미터 이상을 파고 들어가면 암반 자체에 모여 있는 ‘천연암반수’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세 번째 단계라고 하죠.

또 하나 깊이 깨달은 것은 ‘기도 응답의 비결’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다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5-13절을 통해 그걸 설명해 주죠. 여행에 지친 친구가 밤늦게 먹을 것을 구하자 그 친구도 먹을 게 떨어져 이웃집에서 구해왔는데, 그걸 두고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끈질긴 기도에 응답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요한 부분이죠. 하지만 그 본문을 대하는 이 책의 관점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른바 중동의 문화를 통한 해석이 그것이었죠. 중동에서는 손님을 맞이할 때 그 주인이 환대하지 않으면 자기 수치로 다가오기 때문에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손님의 요구에 응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실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환대이자 당신의 명예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죠.

놀라운 점은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는 그가 예언에 관한 ‘은사지속론자’라는 점이었습니다. 그 스스로 누군가로부터 예언기도를 받은 바 있고, 자신도 그 누군가를 위해 예언기도를 해 주고 있다는 게 그것이었죠. 목회의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몇 몇 분의 동일한 예언 기도를 통해 새로운 갈피를 잡는 계기를 맞이했고, 자기 스스로도 예언의 은사를 활용해 집사 친구에게 이사를 하라거나 어느 분에게는 셋째가 아들일 것이라는 예언의 말들을 해 주었죠.

이 부분만큼은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책 전반에 흐르고 있는 기도의 본질을 깨우치게 된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기도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엮어나가는 것이기에, 그 분과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숨기지 않은 것처럼, 바울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게 하신 것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요한에게 알리신 것처럼,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그 천연암반수를 퍼 올리는 단계에 접어들면 그런 은사로 연약한 자들을 섬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도저히 기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불평, 원성, 항의, 심지어 욕지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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