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폴 칼라니티의 생전 모습

 

 “죽음의 단조로운 황무지에서 방황하던 나는 수많은 과학 연구들, 세포 내 분자 통로, 생존 통계의 끝없는 곡선에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다시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솔제니친의 《암 병동》, B. S. 존슨의 《운 없는 사람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네이글의 《정신과 우주》, 울프, 카프카, 몽테뉴, 프로스트, 그레빌, 암 환자들의 회고록 등 죽음에 관한 글이라면 뭐든 읽었다.

죽음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정의하고 다시 전진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어휘를 찾고 싶었다. 직접 체험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문학 작품이나 학술적인 연구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내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형태의 저술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풍부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사색한 뒤 글을 쓰는 것 말이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너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보는 곳마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몇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 178~179쪽

 

*인용문 마지막 구절은 사뮈엘 베케트가 1953년 발표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전승화 옮김)의 끝부분에 나온다. 베케트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의지는 지속할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마침표가 이에 맞서 종결을 선언하고 있다. 작품에서 쉼표가 지나칠 정도로 과잉 사용되고 있는 것도 작가가 ‘계속’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는 ‘끝’을 맺어야 한다는 사정도 숨어 있다. 사실 인생은 어떻게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계속’과 어떻게 마쳐야 할지 모를 ‘끝’으로 엮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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