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네가 어떻게 걷는지 보여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 고대 로마인들의 생각

 

네 발로 몸을 지탱하고 땅을 바라보던 한 유인원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손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인류의 문명은 시작됐다. 걷기. 지극히 평범하고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동작은 불가사의하다. 지금까지 어떤 로봇도, 기계도 완벽하게 구현해내지 못했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루아는 걷기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색한다. ‘걸음은 우리 눈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색의 대상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말하기와 생각하기와 함께 걷기를 든다. 이 세 가지는 밀접히 연관돼 있다.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셋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책은 이 철학적 의문에 대한 소요(逍遙)이자 산책이다.

 

저자의 관점은 독특하다. 그에게 철학은 진리를 향한 걷기. 실재적이고, 결연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걷기다. 엠페도클레스의 청동 샌들이나 프로타고라스의 왕복 운동은 고대 철학자들이 걷고, 말하고, 생각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죄수가 풀려나 진실의 빛을 향하기 위한 첫 여정은 걷는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럿이 무리를 지어 산책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습관이었다.

 

데카르트 역시 걷는 것에 의미를 뒀다하니 새롭다. 저자에 따르면 방법서설에 걷기에 관한 언급이 네 번 나온다. 저자의 치열한 꼼꼼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걷기로서의 재발견은 루소 덕분이다. 그는 여행에서 산책을 분리해 고유한 즐거움과 개별적인 미학을 지닌, 그 자체로 완결되는 활동으로 새롭게 창조해냈다. 정적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던 루소는 그가 보는 풍경이 곧 그 자신이었다. “풍경은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은 엠페도클레스에서 루소,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리스에서 인도, 중국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철학자 27명과 그 저작에서 발견한 걷기와 사유의 연관성을 담았다.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문장이 다음 단어들을 향해 이어지듯이, 생각이 다음 생각을 향해 나아가듯이. 그 무엇도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 몸도, 생각도, 시간도 말도.” (203)

 

저자는 인류는 쉬지 않고 보잘 것 없는 곳에서 드넓은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 걸으며 이주와 침략, 전쟁과 대결, 탈출과 유배를 이어갔다. 인간과 함께 역사도 걷는다. 또한 말, 담론, 생각, 문제, 지식, 방법, 사고방식, 학설, 물음, 믿음 같은 것들도 인간과 함께, 인간 안에서 걸어왔다.

 

왜 여전히 걸을까? 인간의 여행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발걸음은 언젠가 멈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걸음은 계속된다. 한 발짝은 미미하지만 길은 무한하다. 우리의 걷기는 언젠가 끝이 나지만, 걷기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210)

 

우리는 불멸을 꿈꾼다. 우리 몫의 주어진 시간과 삶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기에, 거기에 모든 세월을 더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 자연을 모방하고, 사색하며 세기를 뛰어넘고자 한다. 현자들에게 걷기는 시간의 파기요, 시간의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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