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역사 -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현대인들은 매일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소비는 생산보다도 더 밀접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생산과 노동을 점령하는 상황에서 소비는 머지않아 인간에게 남은 고유한 활동이 될지 모른다.

 

저자 연세대 설혜심 교수는 그간 역사책으로 쉽게 만날 수 없는 주제를 통해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해 왔다. 이번에는 근대 이후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호모 콘수무스로서의 소비하는 삶을 조망했다. 저자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상품은 물론, 약장수, 방문판매, 우편주문, 백화점, 쇼핑몰 같은 근대적 판매 방식과 공간 등 폭넓게 다룬다.

 

원래 원고는 네이버의 파워라이터 ON소비의 문화사라는 제목으로 20171월부터 8월까지 연재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문성보다는 대중성을 위해 쉽게 풀어쓴 덕분에 흥미롭게 읽힌다.

 

화장하는 백인 여성을 지켜보는 아프리카 여인들

백인들은 비누를 비롯해 치약, 화장품 등을 이용해 몸을 씻고 이를 닦는 새로운 방식을 전파함으로써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아프리카인들에게 이식했다.

 

저자가 목적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소비를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둘째,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역사학이 주목하지 않았던 인간의 내밀한 행위와 동기,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사회적 효과를 살피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역사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역사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욕망하다(굿즈), 유혹(세일즈), 소비하다(컨슈머), 확장하다(마켓), 거부하다(보이콧) 등 다섯 파트로 되어 있다. 사실 이러한 구성은 소비라는 주제에 마케팅,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접목시켜 논의를 풍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사실 소비 시대는 저임금 노동과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 생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생산자와 자본가들은 일상 생활에서의 소비 혁명을 통해 사람들이 소비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했다.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성장한 기성복과 드레스 산업은 이런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때로는 식민지나 먼 이국에서 들여오는 이색적인 물건들, 가령 향료, 상아나 도자기 등이 특별한 소비를 촉진하기도 했다. 피어스 비누 같이 백색 신화를 조장해 시장을 공략하는가 하면, 부티크 처럼 귀족이나 부유층의 여성을 공략해 사람들에게 헛된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특히 재봉틀의 발명은 소비 패턴과 인식에서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우선 방문판매와 할부방식이라는 마케팅을 선보여 불티나게 팔렸다. 다른 상품도 이와 유사한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소비를 더한층 촉진시켰다. 재봉틀의 보급은 그간 공장과 집이 공간적으로 분리대 있던 시대를 벗어나 여성들이 가사 노동에 얽매이는 단초가 되었다

 

Elizabeth Okie Paxton, 〈The Open Window〉, 1922, Museum of Fine Arts, Boston

여성들의 삶을 개선해줄 거라는 홍보와 함께 가정용 재봉틀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재봉틀은 여성적인 물건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백화점 진열대의 상품은 바로 눈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손에 넣고 싶다는 그릇된 욕망을 부추긴다. 의사들은 쇼핑 중독이나 병적 도벽 같은 질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근대 사회에서 건강한 사람이란 적절한 소비로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면서 절대로 과도한 충동에 휘둘리지 않아야 했다. 인간의 몸 역시 제약 산업과 의료 시장에서 거대한 소비의 장이 돼버렸다.

 

1994년 실시된 한 연구에 의하면 평균 이상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12% 정도 더 높은 소득을 올린다. 그런데 성형수술로 외모가 개선되어 수입이 증가하더라도 그 수준이 성형수술 비용을 충당할 만큼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형은 투자라기보다는 본인의 즐거움을 위한 소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여성들의 유방 성형 수술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예로 든다. 가령 아르헨티나는 유방 확대를, 브라질은 유방 축소를 선호한다. 아르헨티나는 가슴이 큰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반면, 브라질은 노예제가 유지되던 시절 풍만한 가슴은 육욕의 대상이자 식민적 종속의 상징물이었다. 오히려 브라질은 여성의 매력으로 엉덩이를 더 강조한다. 이처럼 소비에 대한 욕망은 그 나라의 문화와 깊이 연관돼 있다.

 

이제 소비는 글로벌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생산, 고용, 수익 창출이 온전히 국경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19813월 도요타 차 박살내기처럼 불황과 금융 위기 마다 자국 상품 애용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경쟁력 없는 상품은 결국 설 자리를 잃기 마련이다. 한편 세계화와 더불어 소비자운동도 촉진되었다. 미국의 흑백 분리에 맞선 불매운동은 소비자들이 수동적인 돼지가 아닌 소비 행위의 주체임을 분명히 했다.

 

저자에 따르면 소비의 역사는 모호함 속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역사학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매력적인 분야다. 이 책은 다양한 상품과 소비 주체를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역관계를 보여주면서, 근대 이후 소비라는 주제를 통해 근·현대사를 개관한다. 이러한 읽기는 역사 현장에서 그간 소외되었던 주체를 발굴하고 복원해 냄으로써 다각적으로 조망하고 통찰할 수 있는 인문학적 사고의 힘을 길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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