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의 맛! - 우리 문화유산 무엇을 볼 것인가
홍지석 지음 / 모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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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것 중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다. 저자에 따르면 토기의 무늬 패턴에 내재적 질서를 파악하는 일은 이후 한국미술에 나타난 장식 패턴을 이해하는 예비 과정이다. 장식 패턴을 즐기는 일은 음악의 리듬을 찾는 것과 같다.나아가 당초문, 도철문과 운학문의 패턴을 읽노라면 세계의 질서와 보편적 원리를 깨우치게 된다. 저자는 장식의 패턴을 읽는 요령을 독자에게 친절하게 일러준다

 

한편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중 하나인 수성동은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계곡 이름이다. 경복궁에서 매우 가깝다. 저자는 실제 수성동을 찾아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한다. 다행히 수성동은 옛날 세워진 옥인아파트를 허물면서 20127월 과거의 자연 풍경을 복원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화폭을 완벽하게 재현”(아래 사진)했다고 하니 참 반가운 일이다.

 

정선의 수정동(왼쪽)과 복원된 수성동 계곡 

 

저자는 단국대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에 재직 중인 홍지석 연구교수다. 그는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미술사, 미술비평, 예술심리학을 강의했다. 책 제목 답사의 맛!’에 담긴 사연도 흥미롭다. 저자는 지역답사를 다니며 고유섭 선생처럼 씹고 씹어야 나오는 조선백자의 고수한 맛을 느껴보고 싶고, 김용준 선생처럼 작품을 음미해보고 싶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저자는 모두 아홉 군데의 문화유산을 좇아 그 인문학적 탐미를 풍성히 차려 독자 앞에 내놓았다.

 

종로 네거리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려주던 옛 보신각종은 지금 어디 있을까? 보신각종은 1619년 이후 도성 한복판에서 수백 년간 시각을 알려오다가 1979년 균열이 발견돼 198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옛 보신각종은 한양에 들른 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찾았던 시대의 랜드마크였다.

 

전형(典型) 석탑은 지붕돌의 비스듬한 낙수면과 지붕 아래 4단 층급받침이 있는 모양새를 갖춘 탑을 말한다. 이곳저곳 흔하게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달리 다보탑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는데, 전형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형(異形) 석탑에 속한다. 가장 오래된 전형 석탑은 경주에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등이 후보군인데 아직 제작 순서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동탑과 서탑 두 기가 있다)

 

2013년에 나온 길을 잃은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를 보면 명사 40인이 내 인생을 바꾼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 순간 방황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이곳에 없었던 반전의 시간들.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화순 운주사를 찾아가는 길도 그렇다. 구름이 자욱한 곳에서 모든 것은 흐릿해지고 경계선은 힘을 잃는 순간, 우리는 묘한 낯섦과 마주하게 된다.

 

고려 초에 제작된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찾아가노라면 한국 최초의 근대조각가 김복진을 만나게 된다. 은진미륵은 돌에 조각해 만든 석불로 높이 18.12미터에 달하는 거불(巨佛)이다.

 

김복진은 1936년 김제 금산사에 12미터 높이의 대불상을 만들었다. 그는 1939년 속리산 법주사에 약 23미터 높이의 미륵불상 제작에 나섰다. 관촉사의 미륵을 능가하는 조선 최대의 불상이었다. 그는 돌로 쌓아서 콘크리트를 바르는 공법을 택했다.

 

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이듬해 김복진이 서른아홉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에 마침내 1963년 완성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멘트가 떨어져 나오는 등의 이유로 1986년 철거됐다. 1990년 김복진의 원안을 토대로 청동불상이 세워졌다.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은 2002년 금박을 덧씌워 리모델링한 금동불상이다.

 

1960년대 법주사 미륵대불. 김복진의 원안대로 완성됐다.

 

또한 저자는 백자미()의 근원을 찾아 근대적 답사를 떠난 배정국 일행(이태준, 김기림, 이여성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참여)의 발자취를 좇아 경기도 광주 분원마을을 답사한다. 이들이 길을 나선 1942년에는 분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1900년을 전후로 분원도 사라지고 장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흔적이라도 찾아보자며 나섰을 게다.

 

1920년대의 문학 동인지 폐허’(2)에서 고흐의 그림 로마극장의 폐허를 발견하고는 문득 남한강변에 위치한 여러 폐사지를 향해 기행을 떠났다.

 

한편 나는 고흐가 그렸다는 로마극장의 폐허를 찾을 수 없었다. 로마극장의 폐허는 아를의 오랑주에 있다. 2010년 여기에 들렀을 때 으레 그러하듯 고흐의 그림(사본)이 놓여 있지 않았다. 혹시 폐허문인들은 고흐가 머물렀던 아를에 로마극장의 폐허가 있었으니, 누군가의 폐허 그림을 고흐가 그렸다고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체적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훑는 저자의 시선은 독특한 글맛과 어우러져 한껏 풍성하다. 말만 요란스레 말고 나도 얼른 길을 나서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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