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 - 보통의 행복, 보통의 자유를 향해 달린 어느 페미니스트의 기록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 지음, 정미화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스피드는 걱정하지 말고 완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저자 카트리나 파이크가 맨 처음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을 때 아빠 친구들이 들려준 팁이다. 마라톤은 인생과 같다. 인생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마라톤처럼 지구력이 중요하다.

카트리나는 스무 살 때 아빠와 엄마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다
. 어린 여동생 셋을 건사해야 했다.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10년이 지나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전까지 운동화를 신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녀는 달리면서 마침내 눈물로 지샌 숱한 나날을 훌쩍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하프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아주 즐겁고 상쾌한 기분을 만끽했다고 말한다. 달리기 작가 조지 시한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달리기는 삶의 방식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신비로운 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훈련 가이드, 인기 있는 달리기 선수들, 엄한 코치들이 전하는 유용한 팁 못지않게 문학, 페미니스트 정치학, 인내력에 대해 내가 생각했던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모든 면에서 봤을 때 이 책의 기본 바탕은 달리기 전후의 내 삶이다. (중략) 이 책을 쓰기까지는 나는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야 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긴 호흡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마라톤이 작가 하루키의 삶이 되었듯이, 장거리 달리기(이 책의 원제는 ‘The Long Run’이다) 역시 카트리나에게 존재의 한 방식이 되었다. 그녀는 풀 코스 마라톤 다섯 차례, 하프 마라톤 수십 차례를 뛰었다. 이 책을 쓰던 2015년에도 시드니 하프 마라톤 참가 신청을 했다고 한다.

 

저자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


카트리나는 온라인 문학비평 저널 시드니 리뷰 오프 북스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페미니즘, 문화와 정치에 관한 기사와 글을 써 왔다. 그녀의 이력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단순히 달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여성이 달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여성 달리기에 대한 아주 뿌리 깊은 편견들을 짚어낸다. 여성은 달리기를 할 수 없고, 오직 특정한 계층의 여성들만 달릴 수 있고, 여성의 달리기는 너무 위험하고, 여성적이지 않고, 골칫거리를 유발할 뿐이라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여자 육상경기가 처음 치러진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800미터를 포함한 다섯 종목에서였다. 이때 800미터 경기를 마친 선수들 일부가 의식을 잃고 졸도했다. 사람들은 일류 여자 운동선수들이라 해도 장거리 달리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올림픽에서 800미터 여자 달리기가 다시 열린 것은 30년이 더 지난 1960년이었다.

최초의 공식 여자 마라톤 대회가 열린 것은 1973년 서독에서였다. 이듬해 같은 곳에서 첫 국제 여자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마라톤 경기에 여성의 참여를 허용하려는 운동은 여성의 몸과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운동과 맞물려 진행되어왔다.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84LA 올림픽 때였다.

이렇듯 여성의 몸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은 마라톤 같은 스포츠 분야에서도 만연했다. 여성이 달린다는 것은 여성이 자립한다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존 삶에서 벗어나 달아나는 일은 성적 자율권을 찾으려는 여성의 행동이면서 동시에 이 여성에게 내려진 벌이기도 하다.

 

카트리나는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연작(네 그림, 사진)에서 젠더와 달리기에 대한 15세기의 통념, 즉 달리고 있는 여성을 만만한 놀림감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통념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가령 적절치 않은 장소에서 혼자 달리는 여성은 ()폭력이나 조롱 혹은 곁눈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페미니스트인 그녀에게 달리기는 더 빨리 달리기 위한 정신과 육체에 관한 탐색일 뿐만 아니라 억압적인 젠더 역할을 만들어 온 계급 제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몸매와 외모를 강요하면서 육체에 얽매이게 만든다. “몸무게를 조절하고 외모를 가꿔라!”

 

달리기를 할 때 나는 인생은 바뀔 수 있고 습관은 깨질 수 있으며, 몸을 움직이는 일은 비유가 될 수 있고 동시에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긴다.” - 336

 

이 책은 저자가 달리기를 통해 부모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여성이 달린다는 것에 관한 페미니즘의 탐색이다. 달리기에 관심 있거나, 새로운 페미니즘의 통찰을 원하는 독자 모두에게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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