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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평점 :
4월 혁명 50주년을 맞이한 2010년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편찬한 사진집에는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여러 장 있다. 저자가 당시 중앙일간지 기자를 찾아 확인해 보니 할아버지 시위는 1960년 4월 24일에, 할머니 시위는 다음 날인 25일에 발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 의사를 밝힌 것은 4월 26일 오전 10시 30분경이었으니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모두 그 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저자는 이에 착안해서 당시 기록을 찾아 나섰다. 방대한 4·19 관련 자료 속에서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시위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의 기록은 물론 후세의 연구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할머니들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보다 앞서 일어난 2차 마산항쟁에서도 여성들은 상당히 두드러지고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 여학생뿐만 아니라 중년, 노년의 여성들도 많이 참여했다.
주변부의 약자를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을 실현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차별과 무시 속에서 소진시켜 버린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역사 발전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 220쪽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드러나지 않은 행간(行間)을 읽을 수 있다.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 사람들의 활동은 원천적으로 기록에서 배제되고, 지워질 뿐만 아니라 어떤 결과와 결실을 거둔 사람들, 이른바 승리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다시 지워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960년 4월에 있었던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사건은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저자 홍석률 교수는 성신여대에서 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남북관계사, 한미관계사 등 한반도 냉전사를 주로 연구해 왔다. ‘사건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로 읽는 현실’ 등을 강의하면서 한국사의 주요 사건에서 오늘날 반추해야할 역사적 의미를 풀어내는데 힘쓰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 잔혹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엘리트들이나 유명한 사람들만 주로 부각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부차화, 주변화되는 역사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혹은 희생된 사람들이 여전히 가려지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은 잔혹한 일이라는 것이다.
홍 교수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현대사의 8가지 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한다. 삼청교육대에서 희생된 도시빈민 박영두,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 한국전쟁 때 학살된 민간인 등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한 6월 항쟁 때의 박종철, 5·16 쿠데타 당시 젊은 장교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학병동맹 사건 등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의 이면과 그 의미를 되짚어본다.
2017년 6월 10일은 6월 항쟁 30주년이다. 지난 5월 10일 인권변호사 출신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뜻 깊은 때를 맞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이고, 앞으로 민주주의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의무이기도 하겠다.
이 책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며, “실현되지 못한, (혹은) 희생된 역사적 가능성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