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의 시대
김경민 지음 / 이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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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은 전통 한옥 마을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임금이 살았던 궁궐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예전부터 왕실 사람들과 사대부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진 것은 일제 시대인 1920년대부터였다. 이 때 탁월한 사업가였던 ‘건축왕’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1888~1965)이 등장한다.

 

그는 1919년 고향 경남 고성에서 경성으로 올라와 이듬해 9월 주택건설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했다.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하여 회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꾼 지 6개월 만이었다. 건양사는 부동산 개발 및 건설 전문회사로서 기획과 설계, 시공, 감리 및 주택금융과 중개업 등 부동산관련 거의 모든 사업을 취급했다.

 

소설가 이태준이 쓴 단편 「복덕방」을 보면 당시 건양사의 풍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등장인물 서참의는 복덕방의 주인으로 가회동에 큰 한옥을 갖고 있다. 본문을 보면 “지금은 중개업자도 많이 늘었고 건양사 같은 큰 건축회사가 생겨서 당자끼리 직접 팔고 사는 것이 원칙처럼 되어 가기 때문에 중개료의 수입은 전보다 훨씬 줄은 셈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1930년대초 정세권 가족 사진 (왼쪽 앉은 이가 정세권)

 

1920년대 들어 경성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자리와 교육을 위해 경성으로 올라오는 지방 사람들이 많았고, 조선 식민지의 개발을 위해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았다.

 

경성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일본인 거주 지역(남촌)에 들어가기가 녹록지 않았다. 이들이 눈을 돌린 곳은 북촌이었다. 하지만 일제 역시 늘어나는 일본인들의 새 거주지를 위해 북촌 진출을 계획했다. 북촌 소재 신규 주택이 시장에 나오는 대로 일본인의 수중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정세권이 직접 북촌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한옥 중심의 대형 개발을 통해 북촌을 지켜내고자 했다. 이후 정세권은 일본인이 선점한 조선의 근대적 건설업 분야에서 놀라운 수완을 보이며 급성장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양사의 경성 개발지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는 해방 이후 잊혀진 정세권을 발굴하여 정리했다. 그는 당시 사료와 신문기사, 유족의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를 모았다. 김 교수는 정세권을 이렇게 평가한다.

 

정세권은 자수성가한 대사업가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출판인이었고, 사회운동가였다. 그리고 서구의 도시 이론가에 필적할 만한, 경성을 바꾼 도시계획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198쪽)

 

과연 정세권은 경성 개발에 남다른 혜안을 지닌 근대적 디벨로퍼였다. 그는 1920년대 북촌 일대를 개발하고 20세기 초중반 대도시 경성의 뉴타운(신도시)이라 할 창신동, 서대문, 휘경동, 왕십리 등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이것은 반쪽의 평가에 불과하다.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로 얻은 막대한 부와 재산을 민족운동에 쏟아부었다. 그는 1928년 침체에 빠져 있던 조선물산장려회에 막대한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 회관을 건립하고 조직 운영비를 댔으며 물산장려운동을 전담하는 장산사를 설립했다. 또한 조선어사전 편찬을 추진하던 조선어학회에도 회관을 지어주는 등 적극 후원했다. 경주 최씨 부자에 비견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닐 수 없다.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현충사 방문 기념 사진. 앞줄 맨 왼쪽이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가 안재홍.

 

이때 정세권은 언론인 민세 안재홍과 국어학자 고루 이극로 등 민족운동가와 동지적 유대를 맺었다. 저자는 "이들의 관계는 신흥 자본가와 언론 그리고 학계가 함께한 민족운동전선이었다"(197쪽)고 평한다.

 

하지만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건양사 면허가 취소되고 사업도 쇠퇴했다. 이후 결코 재기하지 못했다.그는 1965년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고향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그의 묘가 있다.

 

저자는 2012년부터 온 백방으로 자료를 구하고 유족을 찾아 정세권을 연구하고 복원해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잊혀진 정세권의 삶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가까운 날 북촌 한옥마을을 거닐며 ‘건축왕’의 독립지심을 느껴보면 어떨까.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있는 정세권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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