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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평점 :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독일 법학자이자 언론인 라이문트 프레첼의 필명이다. 이 필명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제바스티안’과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하프너’를 딴 것이다. 1907년생인 저자는 1938년 나치의 억압을 피해 유대인 약혼자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고, 1954년 독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87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바로 2년 전 이 책을 썼다.
저자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던 독일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했다. 여든에 이른 노학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기폭제가 된 것은 독일 역사학자 피셔가 1961년에 내놓은 연구서 『세계 권력 움켜쥐기』와 일련의 저서들이 불러일으킨 역사 논쟁이다. 논쟁의 핵심은 1차 대전 발발에 대한 독일의 책임 문제와 당시의 외교정책이 나치 정권에 계승되어 2차 대전 발발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하프너는 피셔의 주장에 일부 동조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 논지를 펼쳐 보인다. 이를 위해 방대한 사료, 정책 자료와 관련 보고서를 인용한다.
우선 하프너는 프로이센 제국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센은 1701년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면서 탄생되었다. 이후 1848년 3월 혁명을 거쳐 1871년 1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도이치 제국으로 발전했다. 프로이센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 제1차 대전의 패전과 1918년 10월 혁명을 맞아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슐라이허가 막후 혹은 직접 나서 추진하던 왕정 복고 시도가 무위로 끝나고 1933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전면에 부상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1945년 제1차 대전의 패배와 함께 몰락했다. 이렇듯 도이치 제국은 1871년부터 1945년까지 고작 74년간 지속되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문명 형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즉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반복되고, 새롭게 출발하며 다시 회귀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하프너에 따르면 히틀러는 비스마르크에게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비스마르크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전쟁을 위해 외교적 중재와 막후 협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전쟁의 판세와 미국의 전략을 오판하여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1941년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은 전쟁을 필패로 이끈 최악이었다.
이 책은 도이치 제국의 정치 경제적 여건이 어떻게 제국의 흥망성쇠와 밀접히 관련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가령 1919~1923년 대규모 인플레이션은 임금노동과 시민계층의 몰락을 촉진했고, 1930~1933년 의도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은 나치가 기승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저자는 격동기의 시절을 함께 한 자신의 체험과 기억도 들려준다. 저자가 대학 다니던 시절 바이마르 “공화국의 처지는 몹시 나빴다”. 당시 사람들은 “반공화파, 군주국지지, 민족주의, 보복주의 입장”(199쪽)을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1933년 당시 국민들은 “나 자신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는데” (...) “이미 생명이 다해 사라진, 옛날 군주 시대 상류층의 대표자”가 아닌 “정말로 새로운 뭔가를 원”(227쪽)하고 있었다.
하프너는 1989년 베를린 장벽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도 생생히 목격했을 것이다(1999년 타계). 이 시기를 전후해서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가 해체되었다. 그는 최후의 제국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이치 제국의 몰락은 곧 민족 문제를 지핀 불씨이기도 했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 것인가.
저자의 능준한 필력 덕분에 19~20세기 격동기 시절의 한 역사가 인문학적 교양으로 거듭났다. 아울러 옮긴이의 빼어난 번역 솜씨는 읽는 재미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