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풍수집의 실시학사 실학번역총서 8
정약용 지음, 박종천 옮김, 재단법인 실시학사 기획 / 사람의무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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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죽은 뒤 무덤을 쓸 때 지사(地師)에게 묻지 말고, 가원(家園)에 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그는 경기도 마재에 위치한 자신의 생가 뒷산에 묻혀 있다. 다산은 유교적 장례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풍수집의(風水集議)에 정리했다.

 

풍수집의는 당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선유들의 풍수론 28가지를 집대성하고 거기에 자신의 설명을 '()' 형식으로 덧붙인 뒤 다산 자신의 풍수론인 사암풍수론(俟菴風水論)을 합친 것이다. 원본은 31책으로 1825년에 완성되었다.

 

다산은 풍수집의에서 조선 후기에 성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산송(山訟)의 사회적 폐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山訟은 산소, 즉 조상의 분묘에 대한 소송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좋은 매장지를 찾는 묘지풍수가 성행하면서 여러 사회적 문제가 생겨났다. 가령 사족간의 산송은 물론이고 지방 향리, 평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광범하고 빈번하게 벌어진 소송이었다.

 

목민심서형전(刑典청송하(聽訟下)편을 보면 산송이 구타 살인 사건의 절반이 될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다. 당시偸葬(투장暗葬(암장勒葬(특장盜掘(도굴) 등이 성행하였다.

 

산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묘역이 법조항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 사람 간에 해석이 달랐다. 특히 투장(남의 묏자리에 몰래 묘를 쓰는 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이는 조상의 묘역을 훼손했다는 문제와 직결되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대립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다산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소목법에 따른 족장법을 주장했다. 족장법을 토대로 산송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담부서로 장역서’(掌域署)를 설치하고, 분묘를 국가가 공적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원문은 신조선사본을 저본으로 삼고 필사본들을 대조하여 교감한 정본 여유당전서(다산학술문화재단, 2012)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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