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영조 시대의 조선 8
최봉영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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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만 백성의 군주이기도 하지만 한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왕과 왕세자의 관계 뿐만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다. 숙빈 최씨는 나인보다 못한 신분에서 성은을 입어 영조를 낳았다. 숙빈 최씨는 친인척이나 다른 지원 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아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영조는 생모가 하찮은 출신이라 궁궐 안에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모 역시 아들을 애지중지 키운 탓에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미운 정과 고운 정을 주고받으며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이렇듯 영조는 어릴 때부터 일정한 트라우마를 안고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 여파도 영조는 사랑하는 일과 미워하는 일을 매우 극단적으로 보였다. 아버지 숙종에 대해서는 그저 그랬지만, 어머지 최숙빈에 대해서는극진했다. 아들과 딸에 대한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극진히 사랑한 반면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를 그저 그렇게 대했다.

 

한편 영조는 3세에 외동아들 효장세자를 잃었다. 세자빈까지 맞이한 10세의 세자가 갑자기 죽자 그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 7년 뒤 아들 사도세자를 얻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뿔싸, 영조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300년 종사를 이어갈 세자로서의 체통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는 세자를 생후 백일만에 생모 영빈 이씨에게서 떼어 세자로서의 위의(威儀) 공부를 시키게 했다.

 

사실 세자 입장에서도 불운했다. 성장기에는 부모의 사랑을 통한 정서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었을 상궁이나 나인들이 교육에 대해 얼마나 알았을까? 게다가 당시 세자를 대신 길렀던 이들은 경종을 모시던 윗전 나인들이었다. 이들은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를 낮추어 보아 생모가 세자를 보고자 하면 궁궐의 법도에 따라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세자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린 성격으로 자랐다. 이에 반해 영조는 매사에 민첩하고 조급한 성격이었다. 부자간에 엇박자가 생긴 것이다. 세자는 부왕의 성격적 결함과 어머니의 부재라는 이중적 어려움 속에서 자랐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자지간을 중재해줄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하때 영조의 사랑을 받던 화평옹주가 중재를 맡기도 했으나, 그녀가 아기를 낳다가 갑자기 죽자 부자지간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 책은 국왕을 대리하던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 세자가 죽어간 과정, 그리고 세자가 죽음으로써 불러들인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나는 그간 조선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비극의 내막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잘못된 훈육 방식에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조는 사랑보다는 체통을 중요시했고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자주 했다.

 

원래 권위적인 가부장제 집안에서 그 자녀는 이중 속박을 겪게 마련이다. 영조는 자신이 받았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사도세자에게 권위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사도세자의 성격은 아버지의 기대를 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도 저도 어쩔 수 없으니 결국 정신착란 증세가 온 것이 아닐까? 결국 영조는 4대 독자였던 아들을 서인으로 강등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여버렸다(1762년 임오화변).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효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령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에 처음으로 수봉관을 설치하도록 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바꾸었다.

 

한편 극적인 매듭은 사도세자가 환갑을 맞은 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화성으로 모시고 가 군왕에서 천민에 이르는 모든 이들이 한데 어울리는 큰 잔치를 베푼 것이었으니. 사도세자의 억울한 한을 멋진 환갑 잔치로 승화시켜 풀어낸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달리 해석한다. 그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보면서 당시 정치적 권력 다툼의 격변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본다. 역사적 사실을 놓고 그 맥락을 되짚어보는 것은 우리가 오늘을 사는 교훈을 얻기 위함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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