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수렴청정으로 영조의 뜻을 잇다 영조 시대의 조선 13
임혜련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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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가 정순왕후를 두고 악녀라고 하는 것에 관해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아무래도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향 탓이라는 거다.

 

가령 드라마 '이산'에서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일조하고, 정조를 핍박하는 등 최고의 악녀로 자리매김하였다. 또 순조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분노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또한 신유사옥을 일으켜 정약용 형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과연이 이 모습이 정순왕후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정순왕후의 행적을 추적하며 역사적 논거를 들어 아니라고 설명한다.

 

"정순왕후는 영조~순조 대에 중전으로, 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로 살았다. 그런 만큼 그녀의 삶도 파란만장하였다. 정순왕후가 정조와 대립하고, 순조 대에 정조의 체제와 인물들을 제거했으며, 벽파와 경주 김씨를 등용했다고 해서 그녀를 악녀로 모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여인으로서 정순왕후의 삶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남편도 자녀도 없는 그녀가 가족을 잃었을 때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지 않을까?" - 9쪽

 

정순왕후는 1745년 (영조21)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로 태어나 15세 때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66세. 그녀는 궁궐의 어려운 법도를 익히며 할아버지뻘 영조와 살았다. 게다가 그녀에게 아들이요, 며느리며 손자, 손녀 그리고 후궁들이 모두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었다. 그나마 혜경궁 홍씨가 동갑내기. 오죽 적적했을까 싶다.

 

영조는 정순왕후를 지극히 배려하여 그녀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려고 애썼다. 가령 정순왕후가 수두에 걸려 5일만에 낫자, 창경궁 명정전에 나가 향을 전하였고, 창덕궁 인정전에 나가서는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또한 친정 식구들도 꼼꼼히 챙겼다. 영조는 부친 김한구, 숙부 김한기, 오빠 김귀주 등 경주 김씨들을 빠르게 승진시켰다. 이렇듯 경주 김씨 일가는 외척으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정국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정순왕후는 한편으로 이를 우려하기도 했다. 타 세력의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순왕후 승하 후 경주 김씨는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대목은 정순왕후와 정조의 관계다. 정조는 즉위 후 정순왕후를 끝까지 대왕대비로 승차해주지 않았고, 김귀주를 귀양보냈으며, 경주 김씨를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자 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정조는 자신이 세손이던 시절 그 지위를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정순왕후와 그 일가가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 뜻은 온전히 세손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략적 이용이랄까? 정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정조는 외척을 배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는 의리를 중요시했던 정순왕후와 대립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고, 정조 사후 그의 척신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왕실의 혼례를 기록한 《국조오례의》는 영조 때 개정되어 《국조속오례의》가 나왔다. 영조가 어의궁에서 정순왕후를 맞이하여 궁궐로 돌아가는 친영을 그린 그림〈가례 반차도〉는 세세한 곳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당시의 풍습을 잘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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