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 - 지친 나를 일으키는 행복에너지
이주은.이준 지음 / 예경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어릴 적에 곧잘 콩나물을 다듬곤 했다. 어머니가 콩나물 한 다발을 사 오시면 콩나물의 대가리와 뿌리를 떼 내는 것이 내 일이었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나는 일상의 반복과 그 단조로움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기억이 있다.

 

부엌은 매일의 일상이 지배하는 곳이다. 쌀을 씻어 앉히고 콩나물을 묻히며 찌개를 끓여 밥상을 준비하는 곳이다. 다 먹고 나면 어김없이 설거지로 마무리해야 한다. 부엌 일이란 곧 생명을 부양하는 일이기도 했다.

 

부엌은 요리사가 식재료들을 다듬고 양념에 버무리거나 불을 가해 맛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달리 생각하면 실험실처럼 은밀한 창조가 일어나고 신비로운 변화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중략) 요리사는 재료들이 이뤄내는 놀라운 맛을 상상하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아야 한다... 날것의 식재료에 주문을 걸고 불을 가할 때 비로소 맛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맛의 기적은 그 음식을 먹는 모든 이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 212

 

오랫동안 부엌은 하녀들만 드나드는 젖고 더러운 곳이었다. 부유한 가정의 여주인은 젖은 장소에 거의 드나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을 바라보는 화가들의 시선은 우리의 일상을 비틀어보게 해준다. 저자는 부엌과 식탁이 서로 이어지는 마법의 시간’, ‘소통의 공간으로 보았다.

 

가령 렘브란트 반레인의 도살된 소(The Slaughtered Ox, 1655)나 윌리엄 마이클 하네트의 일요일 저녁 식사를 위한 것(For sunday’s dinner, 1888)를 보자. 마치 마르셀 뒤샹의 (Fountain, 1917)처럼 뇌리를 때린다. 우리의 먹거리에는 과일이나 채소와 같이 우아한(?)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선명하게(!) 마주한다.

 

"미감은 우리 몸이 진정 원하는 것을 잊은 채 점점 감각이 무뎌져 가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소심한 나, 착한 후배, 그리고 로봇 선배, 이 인물들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우리는 음식남녀가 되어,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식탁 위에 하나씩 솔직하게 끄집어 내놓았다. 예전에 화가들이 그림으로 남겨놓은 바로 그 식탁 위에서." - ‘프롤로그중에서

    

이준 셰프(왼쪽)와 이주은 교수

 

이주은 교수는 달갈요리를 좋아한다. 그녀는 계란 같은 글을 쓰고 싶은 작가다. 이준 셰프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이야기가 담긴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스와니예를 오픈했다.

 

이 두 사람이 만나 그림 맛과 음식 멋을 버무려 내놓았다. 美感味感, 한 그림 요리 한 접시, 그 오묘한 조화란...

 

책은 나를 보살피는 ‘ME’와 너를 움직이는 ‘YOU’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상처 많은 소년이었던 달리는 그림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구원의 장소를 찾았다.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의 내면과 마주선다. 그렇게 자신과 마주하면서 치유하고 반성하며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을 되찾아야지 싶다. 고흐가 꿈꾸었던 것처럼 감자 한 알을 서로 나누고, 커피 한 잔으로 삶의 품위를 즐겨볼 일이다(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1885).

 

나는 피카소가 자크린의 지극한 보살핌에 그렸던 헌사 같은 그림이 좋았다. 스태미너에 좋다는 장어와 몸속을 정화해 준다는 양파가 들어간 장어 마틀로트(La Matelote d'anguilles. 1960). ‘장어 마틀로트는 장어와 양파, 제철 채소와 갖은 양념을 넣고 끓인 것이다. 우리 식으로 장어탕쯤 될까? 나이 들어가던 피카소는 아직도 왕성한 창조를 향한 열정과 자크린의 젊음을 뭉근히 우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남자는 늦게 철든다는 말이 있다. 유진 오닐이 칼로타의 사랑에 밤으로의 긴 여로를 헌사했던 것처럼 피카소도 자크린의 사랑 앞에서 자아를 깨달았던 것일까? 피카소의 나이 80 때 일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장어 마틀로트(La Matelote d'anguilles. 1960)

 

피카소 그림에서 영감을 얻는 권지예 작가는 뱀장어 스튜를 썼다. "내게는 쓸쓸한 감동을 준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예술가의, 일상에 대한 경의와 마지막 여자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 내는 것이 아닐까"

 

고달픈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이 인생일지 모른다. 책을 읽는다는 것, 혹은 예술을 접한다는 것은 그런 일상을 이겨낼 힘을 키우는 일이다. 그래, 내가 고달프면 너도 고달프겠다,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내일을 살아낼 용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오늘 식탁에는 아내가 계란찜과 닭도리탕을 내놓았다. 나는 입 안 가득 씹히는 고소한 맛을 음미하며 고마움을 잔뜩 표했다. “우와, 너무 맛있어!” 아내는 슬며시 웃는다 새삼스럽기는~” 옆에 있던 아들 녀석이 거든다. “아빠, 정말 맛있어요!” “그래 맞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