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저자는 2007년 어느 날 예일 대학교 휘트니인문학센터 주최로 열리는 연례 강연회의 초청을 받았다. 이 강연회의 주제는 "X는 왜 중요한가"라는 것이었는데, 저자는 '번역'을 선택했다.

이디스 그로스먼! 저자의 이름은 내게 무척 낯설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들춰보면 금세 왜 '번역'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번역 분야에서 최고로 뛰어난 탁월한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스페인어권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데 발군의 노력을 경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편집일을 하는 친구의 권유로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단편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이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어 마르케스의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번역하면서, 마르케스의 극찬을 받게 되고, 마침내 세르반테스의돈 키호테"스페인 걸작 문학을 영어로 가장 훌륭하게 옮긴 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나는 다행히 위 두 권을 우리말로 된 것으로 읽어 보았기에 그 노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다. 특히돈 키호테는 민용태 교수님의 번역본을 읽었는데, 우아하고 세련된 옮김에 감탄하여 마지 않았었다. 내 생각에 스페인어권 번역의 일가(一家)에는 영어권에 그로스먼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민 교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지난 80년대 도올 선생의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당시 완전 번역에 대한 주장을 거침없는 톤으로 제기한 도올 선생의 패기는 지금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다.

, 그로스먼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강연한 '번역'에 대한 것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저자에 의하면 이 책의 서문, 1장과 2장은 당시 강연 원고를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3번에 걸쳐 연강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고, 3장 부분-() 번역에 관한은 책 발간에 즈음하여 새로이 정리한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서문과 1·2장만 읽어도 그로스먼이 견지한 번역에 대한 고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읽어 본 내 소감을 먼저 밝히자면, 놀라움! 그 자체였다.

 

번역가의 목적은 원작에 담긴 모든 특징,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작가 특유의 표현, 문체상의 특색 등을 이질적인 언어 체계 안에서 최대한 재현(re-create)하는 것입니다. 번역가는 유추를 통해 그 작업을 합니다. - 20

 

우리 학계에서도 '번역'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로스먼이 적을 두고 있는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는 알기 쉬운 사례를 들면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가령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는 6,000여 개이고, 이 중 글로 기록되는 것은 1,0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라도 자유자재로 말하고 쓸 수 있는 언어는 고작 10개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머지 990개 언어로 쓰인 작품은 어떻게 접할 수 있을까아뿔사!

또 그는 일부 학자들이 자존심이 있는 대학이라면 교과 과정에서 번역서를 추방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되 단호히 거부한다.

 

(이 주장은) 안나 아흐마토바를 러시아어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독일어로, 에우게이노 몬탈레를 이탈리아어로, 페데리코 로르카를 스페인어로, 폴 발레리를 프랑스어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그리스어로, 헨리크 입센을 노르웨이어로,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를 스웨덴어로, 주제 사라마구를 포르투갈어로, 아이작 싱어를 이디시어로 읽지 않으면 20세기의 문학 관련 정규 과정에서 이 작가들에 대한 공부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이 세상에 제가 읽지 못하는 중요한 언어가 얼마나 많고, 제 모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더라면 전혀 알지 못할 소중한 문학 작품은 또 얼마나 많은데 말입니다. - 50~51

 

내 생각에 그로스먼은 노어노문학과 학생들이라고 해도 러시아어로 톨스토이 문학을 굳이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문학 연구에서 앞으로 크게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그 실종된 비평 어휘를 구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노어노문학과 학생들이 영어로 번역된 톨스토이 작품을 읽는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러시아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하겠지만.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파고 들어야 하는 것은 톨스토이 작품이 미국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미국인들이 어떻게 톨스토이를 읽어야 하는지 독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전문가의 길로 들어설 때, 러시아어로 된 원전을 읽으면 그만이다. 그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한 개인이 평생 어떻게 통달할 수 있을까?

가령 18세기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새뮤얼 리처드슨의클러리사 할로(원제 Clarissa Harlowe)를 보자. 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김성균 교수는 대학 시절부터 원작을 끼고 살았고,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 위해 반세기를 함께 했다고 한다. 김 교수의 노고가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누가클러리사 할로읽어볼 엄두를 내겠는가?

저자는 다른 언어문화권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그 문학적 생각, 통찰, 직관을 상호 교류할 수 있도록 활성화하고 촉진하는 기초적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무척 공감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학창 시절 읽었던 많은 고전 작품들은 원전을 텍스트로 하기보다 일어나 영어본을 활용한 중역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한 그로스먼의 견해는 무엇일까? 그는 다리 역할을 하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령 최근까지만 해도 중국어 번역가들은 원작보다는 영역본을 텍스트로 삼아 중역(重譯)해 왔다는 것이다. 스페인어 번역가들이 러시아 작품을 번역할 때는 프랑스어본을 참고로 해 왔단다. 현재 우리는 수많은 번역가들의 수고에 힘입어 원작을 텍스트로 완역한 고전을 제법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여간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전달하고, 동시에 두 언어의 효과와 리듬과 예술성을 들으려고 하며, 그 가운데 두 언어 사이에서 소용돌이치고 비등(沸騰)하는 기호와 의미의 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은 환각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 80

 

그로스먼은 자신이 각별한 수고를 들인돈 키호테의 영역에 대해 덧붙인다. 그는 "첫 구절을 성공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왠지 쉽게 자리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고수다운 면모가 아닌가. 진검 승부에서 고수는 잎사귀 하나, 가지 하나를 베어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표출할 수 있을터.

 

(원문) "En un lugar de la Mancha, de cuyo nombre no quiero acordarme……"
(영문) "Somewhere in La Mancha, in a place whose name I do not care to remember……"
(국문) "라 만차 어느 마을, 그 이름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곳에……"

 

그는 이 구절을 마치고, "황홀한 만족감이 밀려들었으며, 실제로 이 걸작을 번역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졌다고 토로한다. 사실 동시대의 작품에 대한 번역도 결코 쉽지 않을진대, 4백여 년 전(돈 키호테1605년에 발표되었다)에 쓰인 작품을 오늘날 독자의 기호와 이해도에 맞게 옮기는 일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게다가 세르반테스는 16세기 당시 유행하던 구전 민요, 서사시들, 유명한 전쟁터와 성채, 당시 인기 작가들과 그 작품들을 방대하게 인용하고 있으니 오죽 고역이었을까 싶다. (여담이지만돈 키호테완역본을  읽어내려면 각별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또한 그간 스페인어의 언어적 변동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하지만, 16세기이니 만큼 고어에 가깝다. 그러니 그로스먼이 오랜 지인이었던 멕시코 작가에게서 17세기에 간행된 스페인어-영어 사전 (사본 형태로)을 받았을 때 그 기분이 어땠을까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번역을 하다 보면 운 좋게도 저자와 만나게 되는 최상의 지점을 발견하는 때가 있는데, 제게도 그런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저자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중략) 그럴 경우 번역할 작품을 영어로 말하는 방법을 찾아냄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스페인어로 말하는 저자의 음석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신나는 경험이요, 공생의 경험이며, 물론 은유적인 경험입니다. - 95

 

나는 그로스먼이 한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번역가도 작가다"라는 것을 꼽고 싶다. 이는 원작자의 의도와 원어의 풍미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우리말로 적절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번역은 제2의 창작이요, 번역가는 문화 전도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로스먼의 강연과 서술은 번역을 업으로 하는 분이나 일반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 줄 것으로 믿는다.

한편 부록으로 이 책의 옮긴이 공진호와 로쟈 이현우에 대한 작은 인터뷰가 실려 있다. 두 사람은 주로 문학 번역가로서 살아가면서 느낀 경험담, '인문서 번역의 어려움' 그리고 번역과 관련된 국내 출판계의 어려운 현실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부분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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