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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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의 지론(持論)을 토로하는 격전장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때가 1907년이라고 하니,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 제국은 한껏 동양 제일을 넘어 세상 제일이라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등등하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메이지 시대의 신법(新法)에 대한 성공의 자부심도 대단했을 터. 막부의 구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연 메이지 시대는 수많은 수재들을 영국 등 선진국으로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들이 돌아와 그들이 배운 격물의 이치로 서양의 호랑이 러시아를 때려잡았으니 어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도 신식 화포로 맞서서 말이다.

국비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소세키 역시 한껏 고양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그런 기운이 가득 넘쳐난다. 이른바 소세키식의 계몽론이 득세한다.

이 소설에는 메이지 시대 당시를 대표하는 인물 유형이 등장한다. 시라이 도야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주의와 지사적 관점이 한 축이고, 나카노 슌타이가 대변하는 신흥 유한계급의 전형이 또다른 축이다. 이 사이에 낀 다카야나기 슈사쿠는 햄릿형 인간의 유형을 보여준다.

소세키는 도야를 통해 자신의 지론을 맘껏 펼쳐 보인다. 아마도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세상이 급변하는 당시, 소세키 자신도 나름대로 중심을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따분하긴 하지만 위엄을 잃지 않는 지사론(志士論)이다.

도야는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학문의 본체에 근거지를 둔 데서 나온 고매한 결과라고 자부한다. 그는 인격 면에서는 세속 사람들보다 자신이 높은 경지에 있다고 자신한다. 돈도 권력도 없는, 그런 그는 천하의 선비로서 부끄럽지 않게 과업을 이루고자 붓의 힘에 의지하고 싶어 한다. 돈에 쪼들리는 빈궁함 속에서도 실업가 형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를 꺼려하고, 팔리지 않을 《인격론》을 집필하는데 매달린다.

소설의 전개는 도야와 나카노-다카야나기(둘은 친구 사이로 같이 등장) 이야기가 교대로 이어진다. 다카야나기가 도야를 만난 것은 그가 고쿄 잡지에 실린 도야의 ‘해탈과 구애’를 읽고 감회를 나누기 위해서다. 소설적 전개로는 중반(전체 12장 중 6장)에서다.

다카야나기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소설을 제대로 소화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소설의 대미는 다카야나기가 도야의 《인격론》을 백 엔에 구입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사실 다카야나기와 도야는 소설 맨 처음에서 첫 조우했는데,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 알 수 있다.

“아니, 잘못 했습니다. 이 원고를 꼭 제게 넘기십시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에치고의 다카다에서 선생님을 괴롭혀서 쫓아냈던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넘겨주십시오.” - 206쪽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 처럼 돌고 도는 법이다. 원래 다카야나기가 갖고 있던 백 엔은 나카노가 준 것이다. 다카야나기는 요양을 떠날 요량이었는데, 요긴한 곳에 쓰라고 나카노가 준 것. 결국 다카야나기는 도야의 《인격론》을 사는 데 투자한다. 도야는 궁핍한 생활에 보태 쓰려고 퉁방울이라는 사람에게서 백 엔을 빌렸다가 빛 독촉에 시달리며 무안을 당하고 있던 참이었다. 극적인 반전인 셈이다.

 

▲《태풍》이 들어 있는 책의 표지(1908)

 

소세키는 무엇을 의도했을까? 결국 소설 속에서 다카야나기는 도야의 고매한 인격을 선택했다. 유한계급 나카노에게서 흘러나온 돈이 다카야나기의 인격을 변모시키는 매개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물질 문명이 발달하더라도 사람의 품위를 세워주는 인격, 나아가 일본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듯 에치고에서 못된 학생이었던 다카야나기가 도야와의 만남을 통해 정화되는 과정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다. 결국 소세키는 인간을 고치는 것(즉 개조)이 가능하고, 그것은 고매한 인격의 감화를 통해 올바른 인성을 회복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처량하게 전당포에 들락거리고, 아내의 등쌀에 시달리면서도 도야의 인격론은 멋지게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런데 소설 제목이 왜 ‘태풍’인가? 이의 단초를 얻을 수 있는 신체시(新體詩) 한 편이 본문에 소개되어 있다.

 

흰 나비, 흰 꽃에
조그만 나비, 조그만 꽃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기나긴 근심은, 긴 머리카락에
어두운 근심은, 검은 머리카락에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부질없이, 부는 태풍
부질없이, 사는가 속세에
흰 나비도 검은 머리카락도
  흩어져 있네, 흩어져 있네  - 109쪽

 

아, 부질없이 부는 태풍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리의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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