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리자 - 중국판 목민심서
유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원저자 유기(劉基)는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 건국에 대공을 세운 일등 공신이었다. 그는 주원장이 원을 멸하고 명을 건국한 다음, 후계를 위해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가령 공신에 봉해진 37명 가운데 주원장이 죽기 전에 작위가 박탈되거나 주륙을 당한 사람이 무려 31명에 달했다.

일찍이 주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천하를 위해 4명의 선생에게 굴복한다."

유기와 송렴, 장일, 섭심을 지칭한 말이다. 주원장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서민에서 출발해 불혹에 이르러 새 왕조를 세웠지만 학식이 부족했다. 이에 유기는 원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진사)까지 지냈다. 나이도 주원장보다 18세나 많았고 문신이면서도 종군한 경력[文武兼全]도 있었다.

이렇듯 유기는 재주가 뛰어나 장량과 제갈량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원나라는 혹심한 민족차별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전한다. 최상위에 몽골인, 그 다음에 색목인(色目人), 그 밑에 한인(漢人), 마지막으로 최하층에 남인(南人)이 있었다. 유기는 바로 남인 출신이었다. 이런 사람이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선다? 세상의 제일가는 출중한 재기가 없었다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악을 싫어하며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탓에 정적도 많았다. 결국 그는 강경발언으로 파직당해 낙향하게 되는데, 이 때 부터 반원(反元) 감정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무렵 유기는 쓰라린 심정을 달래면서《욱리자(郁離子)》를 썼다고 전한다. 일찍이 공자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칠 길이 없게 되자 고향에 돌아와 춘추 등 집필에 전념했듯이 유기도 그런 심정으로 작업했으리라.

이러니 당연히 그는 욱리자를 통해 세상의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가 펼치고자 했던 세상의 치세 원리를 가득 담아 놓았다. 옮긴이 신동준 선생은 이 책에 대해 "원명 교체기의 난세를 살아간 유기의 역사관 및 사상 등이 그대로 녹아 있다"(49쪽)고 평한다.

하지만 형식은《장자》처럼 우언(寓言)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장자를 이솝우화에, 욱리자는 라퐁텐우화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어떤 이는《욱리자(郁離子)》의 책명을 당시 유기가 그러했듯이 답답한 심사에서 속세를 떠난 사람을 뜻하는 '울리자(鬱離子)'로 보기도 한다. 옮긴이 신동준 선생도 "대다수 우화가 백성의 고통이나 현실의 폐해를 폭로하거나 유기 자신의 정치적 심의를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울리자'로 표기하는 게 타당하다."(44쪽)고 설명한다.

하지만 명 후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욱리자'로 표현해 놓았다. 이 때 '욱리'는 향내가 진동하는 성세(盛世)의 뜻이 된다. 아마도 이는 후대 사람들이 유기를 재평가하면서 거의 제갈량에 버금가는 신격화 수준에 이른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속절없는 개인의 심사를 밝힌 '울리자'보다는 밝은 문명이 널리 퍼진다는 '욱리자'가 훨씬 적합했을 것이다. 왕조 이름도 '명(明)'이지 않은가.

이 책을 펴낸 곳(인간사랑)에서는 타이틀로 '중국판 목민심서'와 '난세를 극복하는 지혜와 리더십에 관한 지침서'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신동준 선생은 장장 38쪽에 걸쳐 머리글 형식으로〈유기와 『욱리자』〉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유기의 성장배경과 주원장과의 만남 그리고 이후의 행보와 후대 사람들의 유기 신격화 작업 등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 주원장이 새 왕조를 건국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근데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왜 주원장에게는 유방과 항우의 쟁패를 다룬《초한지》같은 이야깃거리가 없을까? 내 생각에는 주원장이 평소 감정 기복과 의심이 많아 가까운 문무 공신들을 거의 모조리 제거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주도할 세력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 이야기에 담았다가 또 무슨 트집(?)을 잡혀 목숨이 위태로울소냐 말이다. 물론 한고조도 토사구팽을 단행했으나, 거병 때부터 행동을 같이 한 여러 동지들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었다. 사실 유기 역시 주원장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오호 통재라!

본론은 총 1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유기와 당대의 인물이었던 서일기의 초판본 서문에 의하면 욱리자는 총 18편, 195개 조로 되어 있다(옮긴이는 이를 부록에 실어 놓았다. 594쪽)고 했으나, 옮긴이는 최근 중국에서 나온, 181장으로 된 판본을 따랐다 한다.

책에 화자로 등장하는 욱리자는 물론 가상의 인물이다. 아울러 181가지 이야기(우화)들은 "진실과 거짓, 탐욕과 파멸, 허세와 기만, 교만과 비굴, 근면과 나태, 현실과 이상, 강자와 약자, 착취와 도탄, 선행과 악행, 술수와 의리, 순리와 억지 등 우리가 일상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다."(53쪽)

요즘 장기 불황과 정쟁에 지친 우리에게 난세(?)를 헤쳐 나갈 치국평천하의 큰 지혜가 절실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새롭게 해석하고, 읽고 또 읽어야 할 것이다. 신동준 선생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그 꼼꼼하고 박식한 작업 수완에 매번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 책 역시 원문, 번역과 해설 등 세 박자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 어디를 펼쳐 읽어도 그 향내의 참맛을 음미하는데 부족함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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