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 - 禪詩, 깨달음을 노래한 명상의 시, 개정신판
석지현 엮음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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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엮고 옮긴이 석지현(釋智賢) 선생은 일찍이 초판 서문(1974년)에서 "잘못되고 객기 부린 곳은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두고 바로잡겠다"던 언약을 만 38년이 지나 그대로 지켜냈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은 한글세대에 맞게 시편 일부를 새로 엮거나 빼기도 하고, 한문 원시에 일일이 한글 음을 달아 보기 쉽도록 했다. 한자를 유심히 살펴보면 난자(難字)가 한둘이 아니니, 선생이나 현암사의 편집진이 얼마나 큰 수고를 더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석 선생에 의하면 선(禪)은 달마의 '불립문자(不立文字)'로부터 출발한다. 일체의 깨달음은 누가 전수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경전에서도 찾을 길 없다.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 직관적인 깨달음[得道]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경지와 희열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시를 통해 표현(以詩寓禪)’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선시(禪詩)의 출현이다. 그래서 선시는 선시(仙詩)요, 오도송(悟道頌)이요, 증도가(證道歌)이기도 하다.

책 표지를 보면 한 승려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표지 속의 승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고개를 수그리고 낮잠을 자고 있다. 이 그림은 조선 말기 화가 혜산 유숙(1827~1873)이 그린 '오수삼매'(午睡三昧)이다.

 


이 그림에서 연상되는 선시를 본문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벽송 지엄은 "옷 한 벌 밥그릇 하나로 '조주의 문'을 드나들었네"(마하연에서)라고 노래했고, 다이구 료칸은 "아는 이의 집에서 이틀 밤을 묵네 / 옷 한 벌과 나무 밥그릇 하나여"(이틀 밤)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옷 한 벌 마저 거추장스러워 조주(趙州)는 "제일로 걱정되는 것은 잠자리에 누울 때라 / 옷 한 벌 없으니 무엇을 덮고 자겠는가"(멍청이의 노래)라고 읊었고, 함월 해원은 "내 생애여 무엇이 남아 있는가 / 표주박 하나 벽에 걸려 있네."(표주박 하나)라고 노래했다. 옷 한 벌 없이 지내고, 달랑 표주박 하나 조차 벽에 걸어 내버려두었다. 바로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책에는 98명의 선사, 시인 그리고 무명씨가 등장한다. 석 선생은 책 뒤에 '작가별 찾아보기'를 붙여 우리가 특정 작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렇듯 일백여 선사 등의
선시 384편을 18개 장의 시상(詩想)으로 나누어 담았다.

게중에 내 마음을 울린 선시 몇 편과 그 해설을 소개해 본다.

해탈

-소요 태능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를

불 속에 옮겨 심네

봄비가 적셔주지 않아도

붉은 꽃 어지럽게 피어나네.

賽一禪和之永
새일선화지영
一株無影木 移就火中裁 不假三春雨 紅花爛漫開
일주무영목 이취화중재 불가삼춘우 홍화란만개

우물 밑에서
-습득

우물 밑에서 붉은 티끌이 일고
높은 산 이마에 파도가 치네
돌계집이 돌아이 낳고
거북이의 털이 날로 자라네.

井底紅塵生
정저홍진생
井底紅塵生 高山起波浪 石女生石兒 龜毛數寸長
정저홍진생 고산기파랑 석녀생석아 구모수촌장

그 누구도 짝할 이 없이
-작가 미상

그 누구도 짝할 이 없이 언제나 높고 높아
일천 강에 달 비치듯 온갖 곳에 응하나니
꽉 막혔으나 허공에 가득 차서

볼 때는 먼지 한 오라기도 볼 수가 없네.

偈頌
게송
獨行獨座常巍巍 百億化身舞數量 縱令逼塞滿虛空 看時不見微塵相
독행독좌상외외 백억화신무수량 종령핍색만허공 간시불견미진상


앞서 언급한 조주(趙州)가 읊은 '멍청이의 노래(十二時歌)'는 어떤가? 이 시는 축시, 인시, 묘시, 진시, 사시, 오시, 미시, 신시, 유시, 술시, 해시, 자시 등 하루 일과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주는 120세를 살고 간 선승이었다. 40년은 참선, 40년은 운수행각 그리고 나머지 40년은 제자 지도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검소하디 검소한, 무르녹은 선승의 범접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전율하듯 느낄 수 있었다.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휴정의 '백운산에 올라(登白雲山吟)'을 읽을 적에는 석 선생의 해설이 자못 감탄스러워 무릎을 쳤다.

계수나무 열매 익는 향기 달에 나부끼고
소나무 찬 그림자 구름에 스치네

桂熟香飄月
계숙향표월
松寒影拂雲
송한영불운

이제, 선생의 해설을 보자. "첫 구가 매우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달 속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생각에서 '계숙(桂熟)'을 끌어낸 것도 좋으려니와, 그 계수나무 열매 익는 향기가 달에 나부낀다는 '표(飄)'자에는 귀신을 울릴 수 있는 묘함이 깃들어 있다. 2구 송한영불운(松寒影拂雲)의 '영불운'도 예사 글귀는 아니다. 한 시인이 일생을 갈고 닦는다 해도 찾아낼까 말까 한 그런 글귀다. 도대체 이런 글귀가 어떻게 예사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시를 쓰겠다는 작위심이 없는 무심지경에 들어갔기 때문이다."(237~238쪽)

나는 이렇듯 선생의 해설을 읽으며 또 다른 묘미를 느낀다.

왕유의 '석양(鹿柴)'

빈산에 사람 없고
들리느니 말소리뿐
지는 햇살 숲 깊이 들어와
푸른 이끼 위에 비치고 있네.

鹿柴
녹시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공산불견인 단문인어향 반경입심림 부조청태상

산등성이
- 작가 미상

산등성이 넘고 보면 또 구름이 앞을 가려
기진맥진 허기져서 흐물흐물 해메다가
발길 꺾어 돌아서서 집에 와보니
꽃 지고 새 우는 봄 여기 있었네.

偈頌 其八
게송 기팔
一重山了一重雲 行盡天涯轉苦辛 來屋裏坐 落花啼鳥一般春

일중산료일중운 행진천애전고신 맥답귀래옥리좌 낙화제조일반춘

선재 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53명의 스승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난다. 선재가 만나는 스승들 가운데는 도둑놈도 있고 깡패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창녀도 있고 의사도 있고 백정도 있고 고행자도 있고 구두쇠도 있고 장사꾼도 있고 난봉꾼도 있고 소녀도 있다. 선재는 그들에게서 모두 그들이 겪은 나름대로의 체험, 하나의 진실을 얻는다. 마침내 나그네 길은 끝나고 선재는 잠에서 깬다. 아차! 자신이 처음 출발했던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구도는 자신이 번민했던 그 자리에 해답이 있는 것일지니, "내가 나에게로 돌아오면 그곳이 바로 고향 아니고 무엇이리."

영가 현각의 '깨달음의 노래'(證道歌)도 이를 증언한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 보니 / 원래부터 모든 것은 나에게 있었네 / 꿈속에선 지옥도 있고 고통도 있었으나 / 꿈 깨고 보니 한 구슬 빛뿐이네."

큰 깨달음을 노래한 오도송(悟道頌)이기도 하다. 나는 그 의미를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일 뿐!

그간 절판되어 이런 좋은 싯구를 접할 수 없어 무척 아쉬워 하던 차에 현암사에서 용기(?)를 내어 재간하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한다. 자고로 시는 자꾸 읊고 노래해야 그 빛이 영롱한 법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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