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선 1
필립 마이어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아들'(더 선)에 대한 이야기다. 매컬로 가문의 일대기라는 형식을 빌어 미 개척사를 둘러싼 대하드라마.

무대는 텍사스. 주인공은 매컬로 집안의 세 인물이다. 암스트롱 매컬로(1811년생)-엘리 매컬로(1836년생)-피터 매컬로(1870년생)로 이어지는 3대 부자의 이야기.

시간적 배경은 1811년부터 2012년까지. 거의 2백 년에 걸친 한 집안의 파란만장한 연대기가 세 인물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가 필립 마이어의 이력을 보니 영락없이 '꿈'을 찾아 떠나는 카우보이 체질이다. 내가 보기에 오히려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써보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특이한 이력을 지녔지만,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그 꿈과 소망을 위해 월스트리트도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아마츄어 작가(?)가 훌륭한 대작을 만들어내다니 정말 헐~이다. 그만큼 작가 자신의 상상력과 창조성을 어떻게 주체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스케일이나 구성이 탁월하고 돋보인다.

저자는 5년에 걸쳐 무려 350권의 책을 독파하고 몸소 인디언 방식의 사냥을 체험하며 텍사스의 역사와 문화, 인디언의 풍습 등을 철저하게 탐구한 끝에 이 작품을 탈고했다고 한다.

언뜻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떠오른다. 그 역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 애리조나와 남부 텍사스의 어둡고 스산한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인간의  폭력성과 삶의 고통을 잘 묘사해 냈다.

필립 마이어의 이야기도 그에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주 무대인 '텍사스'에서 연상되듯이 인디언, 멕시코인 그리고 백인 이 삼자간의 대격돌이 긴장감있게 그려진다. 때로는 따사롭게 때로는 박진감있게 때로는 피비린내 나게….


 


소설은 1936년 일백 살을 맞이한 엘리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나보고 1백 년은 살 거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그 나이가 되었으니 그 말을 의심할 건더기는 없는 셈이야. 머리가죽이 그대로 붙어 있긴 하지만 기독교인으로 죽는 건 아냐. 그리고 만약 영원한 사냥터(북미 인디언의 내세)라는 게 있다면, 난 거기로 가겠지.(13쪽)

 

여기서 엘리가 언급한 '영원한 사냥터'라는 말은 적어도 첫 번째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애초 텍사스는 스페인 정복대가 차지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 아파치와 코만치에 의해 궤멸되면서 무주공산이 된 그곳에 엘리가 태어나기 4년전 1832년에 집안이 이주한다.

텍사스에 정착한 엘리 가족은 아빠, 엄마, 누나 리지, 형 마틴과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자정 무렵, 아빠가 멀리 나간 사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코만치 인디언들에게 엘리 가족은 끔찍한 난도질을 당한다. 엄마는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누나는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형과 함께 납치당한 엘리. 그러나 형 마틴마저 인디언들이 부족으로 돌아가는 사이 죽임을 당하고 결국 엘리만 홀로 살아 남는다.

 

엘리는 자신을 납치한 부족인 코만치족 코초테카(버팔로를 먹는 무리)임을 알게 된다. 그는 거기서 사냥과 전쟁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그가 얻는 코초테카식 이름은 '티에테티 타이보'(불쌍한 백인 꼬마). 부족 우두머리 토샤와이와 그 아들 에스쿠테 그리고 너어커루의 도움을 받아 엘리는 무리없이 적응해 나간다.

 

엘리가 코초테카족 자매 '한 마리의 새'(별명 일하기 싫어)와 '초원의 꽃'과 나누는 섹스신이 나오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어떤 원초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엘리의 아들 피터 대에 이르러 또한번의 살륙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원주민에 의한 것이 아닌 백인에 의해 멕시코계 페드로 가족이 몰살된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딸 마리아는 살아남는다.

 

한때 그들은 스페인의 귀족 가문이었고 왕에게서 직접 이 땅을 하사받았다. 페드로는 멕시코에 사는 일가붙이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고 자신을 멕시코인으로 여기지도 않았다.(118쪽)

 

어떻게 보면 이러한 피의 살륙은  개척사의 현장이기도 하겠다. 엘리의 아들 피터는 아버지와 달리 이성적으로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인디언과 멕시코인을 학살하거나 몰아내고 건국한 미합중국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피터는 자신이 페드로 일가의 살륙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된 결과에 대해 내내 번민하며, 페드로 일가에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보낸다. 피터의 다음 독백을 들어보자.

 

좋은 소식을 들자면, 대기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고 대지가 다시 생기를 찾았다는 것. 비가 계속 내린 덕분에, 아델리아와 헬리오트로프에 꽃이 피고, 아나카휘타가 주변 어디나 벌새들이 노닐고, 파란날개 나비가 날아다니고, 에바노와 유창목의 향기가 대기를 떠돈다. 해 질 녘에 구름이 붉게 타오르고 강물이 노을빛에 잠겨 반짝거린다. 하지만 페드로에게는 이 모든 게 보이지 않는다. 페드로에게는 오직 어둠뿐이다.(254쪽)

 

피터는 페드로 일가 살륙과 관련하여 부친 엘리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다.

 

"꼭 그런 방식이 필요했던 건 아니에요."
"바로 그런 방식이 필요했다. (페드로) 가르시아 집안이 땅을 차지한 것도 인디언을 쫓아내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였지.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땅을 얻어야 했고,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 우리에게서 그런 방식으로 땅을 빼앗아갈지도 모르지. 이 점은 네가 꼭 명심하길 바란다."(260쪽)

 

필립 마이어가 소설 제목을 "아들들(더 선)"이라고 붙인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나온다. 아래 대화는 지니의 부친 찰스(그는 거의 소설에서 열외이다)가 어느 기자에게 한 말이다.

 

딸들은 말입니다. 우리에게 벌어질 수 있는 나쁜 일이에요. 아들이 우선입니다. 그다음이 석유죠. 카리조의 밀러 잡안을 봐요. 땅을 80섹션이나 소유했지만, 그걸 물려줄 자손이라고는 계집애들밖에 없잖아요."(235쪽)

 

이 말을 엿들은 지니는 후에 딸도 한 몫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각오를 다진다. 사실 억세고 드센 텍사스에서 남자들의 힘은 절대적이다. 그런 판국에 지니 매컬로의 분투(?)는 언뜻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약은 2권 이후에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페드로 일가의 불행은 그 사위들의 못난 행실과 그런 망나니 남편을 맞아들인 딸들이 스스로 초래한 화일 지도 모른다.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사위들 둘은 피터의 가축들을 몰래 빼돌리고 있었다.

 

한편 엘리(자손들에게는 '대령'으로 불리는)가 코초테카 족과 함께 하면서 익힌 습관들은 아들 피터와 증손녀 지니에 의한 기억 속에서 대를 이어 물림된다. 마이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비록 백인들이 총의 힘으로 원주민들을 물리적으로 내몰았지만, 원주민 정신의 원형은 도도한 역사 속에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는 처신을 잘했다. 인디언 이야기도 들려주고, 막대기 두 개로 불을 붙이는 법도 보여 주고, 활솜씨(아버진 내가 끝까지 당기지도 못하는 인디언 활을 아직도 쏠 줄 안다)도 자랑하며 베란다에 모인 아이들을 즐겁게 해줬다. - 피터의 회상(187~188쪽)

대령은 손님이 없을 때는 화살촉을 만들거나 삼나무를 깎으며 베란다에 앉아 있곤 했다. - 지니의 회상(184쪽)

 

엘리가 그랬다면 증손녀인 지니는 그에게서 또다른 인간의 원형을 느낀다. 인간의 역사는 단지 유전인자만 전수되는 것이 아니리라.

 

맨살에 닿은 토끼의 부드러운 털의 느낌, 거의 물처럼 부드럽던 그 느낌과 그녀에게 몸을 기대며 어깨를 어루만지던 증조할아버지 손의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 지니의 회상(90쪽)

 

앞서 밝혔듯이 저자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5년간 수백 권의 관련 서적을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시대를 너무나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았다. 건조하고 딱딱할 수 있는 대목에서 소설 읽는 즐거움과 재미를 더해 준다. 가령 아래를 보자.

 

송아지를 울타리에 묶어놓고 어느 암소의 젖을 송아지 얼굴에 끼얹었다. 그러고는 암소에게 고아 송아지에게서 나는 자기 젖 냄새를 맡게 해준 다음, 송아지를 암소의 젖통 아래로 데려갔다. 보통은 암소가 낯선 송아지를 걷어찼지만 그러면 잠시 기다렸다가 이 일을 반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가끔은 암소가 금세 굴복하고 송아지에게 젖을 물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며칠이 걸렸다.(234쪽)

 

어디 이뿐인가? 버팔로 사냥과 고기 해체 방법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부분(16장)은 마치 그 옆에서 지켜보듯이 생생하다. 또한 코초테카 족이 사냥하고 화살 촉을 만들 때는 오호! 하는 감탄마저 일었다.

1917년 6월 21일, 이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페드로의 딸, 마리아가 피터를 찾아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그리고 있는 미 개척사의 대하소설 같은 연대기의 첫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이제 첫 번째 이야기가 막 시작된 참이다.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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