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군 미세먼지
권형원 지음 / 그림과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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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원 시인을 안 것은 직장에서였다. 입사 선배였던 시인은 내게 때로 무뚝뚝하고 때로 묵직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이의 가슴 한 켠에 이런 꽃잎 같은 감성을 품고 있었을 줄 진작 알지 못했었다.

 

2의 하프 타임을 보내는 시인의 예기치 못한 변신은 내게 카프카의 그것 만큼이나 낯선 것이 사실이다. 어찌 됐든 기분은 마냥 좋다. 공무원 때야 국민의 안복(安福)을 위한 정책과 서비스를 챙기느라 분주하기 그지없으니 글 한 줄 시 한 편 맘 놓고 쓰기도 어려웠겠지 싶다.

 

시인은 올해 3월 월간 시사문단을 통해 보리밭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표현하는 자유를 본다

가장 큰 소리는 휴식을 한 채

저 먼 바다로 가 있다

 

가끔 고기떼가

고래에 밀리듯

바람이 가슴을 쓸며

옥빛으로 흘러간다

 

떠날 종달새 하늘에 있고

모든 친구들은 허리를 기대어

옥빛 반짝임으로 고개를 젓는다

 

4

아직은 까칠하지 않은

대지는 청춘의 몸짓으로

아름답게 춤춘다

 

- 보리밭전문

 

시집에는 4부에 걸쳐 모두 80편의 시가 담겼다. 시인은 때로 당면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 따뜻한 시선으로 품기도 한다.

 

표제작은 보리밭이 아니라 점령군 미세먼지. 보리밭은 흔한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미세먼지는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으니 독자의 눈에 한결 띄기 쉬었음일까.

 

점령군 미세먼지의 시상은, 정작 범상치 않다.

 

꽃들은

큰 장에 서려고

부단히 눈을 깜박여

화려한 화기 축제를 꿈꿨다

눈을 뜨니 일장춘몽이었다

 

밤새 꽃향기와 미세먼지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중전

꽃향기는 패자가 되어

희뿌연 회색빛 도시에 눌러

신음하고 있다

 

스멀스멀 접근하는 적들에

꽃들은 힘없이 스러지고

거무스레한 미세먼지의 장막이 쳐지고 있다

 

덩치 큰 높은 빌딩도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점령군 앞에 엎드려 있다

 

어제 결근했던 해는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오늘도 결근할 모양이다

 

겨우 맥만 뛰고 있는 하찮은 꽃들만

바닷속 수초처럼

힘없이 향 기포를 내뿜어 올리고

전쟁은 모두 투항하는 분위기다

 

조신할 것을 명령하지만

차오르는 화에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첨탑 위 십자가도 보일락 말락

꽃향기의 남았던 귀가

미세먼지 속에 잠기었다

 

예쁘던 기상캐스터의 희뿌연 모습에

굴복하기로 맘먹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거울 앞에 섰다

착한 자연의 향기를 짓누르고

해와 달의 출근을 저지하는 동조자

너는 누구냐?

 

- 점령군 미세먼지전문

 

밤새 꽃향기와 미세먼지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아침에 꽃향기는 패자가 되고 해는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 채 거무스레한 장막이 쳐져 있다. 세상은 희뿌연 기상캐스터의 모습처럼 명료하지 않다. 우리가 마주한 세상살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인이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거울 앞에 섰듯이 우리도 행동으로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해와 달의 출근을 저지하는 동조자를 직시하고, 그 동조자를 물리칠 힘을 얻을 수 있다.

 

마경덕 시인은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세상 풍조에서 우리의 의식은 깨어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중략) 분노할 줄 모르고 행동할 줄 모르는 안전 불감증이 만연해가는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시인은 사회적 시선에 초점을 맞추며 감정을 억제하고 사건 속으로 들어가 개입한다.

 

세상의 모든 것

꽃향기마저 외면할 수 있지만

당신의 그리움은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당신을 향한 마음은 절실하지만

 

오로지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창을 냈을 뿐

아직 그대 마음이 들어올 수 있는 창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 봄날의 아픈 사랑부분

 

시인은 이처럼 어느 봄날 한 켠에 묻어둔 아픈 사랑을 캐내기도 하고, 백일홍을 바라보며 그대 착한 이여 / 이제는 자리를 걷어라 / 오늘도 그대의 가지런한 이빨은 / 나를 겸허케 했다고 찬양하기도 한다.

 

어차피 나보다

더 잘난 사람 많은 세상

죽는 날까지

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알아내지 못했다

 

비록 한 가지 날기 위한 가벼운 영혼으로

 

인생 육십

시계에서 유턴이다

 

- 다시 태어나도부분

 

시인은 새롭게 시작하는 노년을 다시 태어나는 각오로 맞이한다. 인생 육십이 반환점이니 백살 훌쩍 넘어 까지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노년의 지하철에서는 “(노년을) 알차게 아름답게보내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이때 보리밭의 한 구절이 새삼 떠오르니, 이 무슨 조화인가.

 

4

아직은 까칠하지 않은

대지는 청춘의 몸짓으로

아름답게 춤춘다

 

그래, 청춘의 몸짓으로 아름답게 춤추는 노년은 언제나 4월이요, 새봄인 것을! 덕분에 내 마음도 한결 봄날 같아진다. 시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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